• 마령면 평지리 원평지마을 앞 도로변에 있는 효자충신 정려각. 효자 오성복(吳成福)과 충신 오빈(吳玭)의 정려를 하나의 정려각에 같이 걸었다. 오성복(吳成福)의 정려문은 ‘孝子贈童蒙敎官朝奉大夫吳成福之閭(효자증동몽교관조봉대부오성복지려)’이다. 오빈(吳玭)의 정려문은 ‘忠臣將仕郞成均館學諭吳玭之閭(충신장사랑성균관학유오빈지려)’이다. 정려는 1677년에 내렸다.《참고문헌》鎭安地方文化財地表調査報告書(전북대학교전라문화연구소, 1989)
  • 안천면 백삼로 33(백화리 중배실) 어귀 화산서원 앞 도로변에 있는 정려. 1865년에 건립되어 하배실 앞 동산에 있었는데, 농로가 나면서 훼손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육씨 부인은 임진왜란 중에 남편 황대성이 의병을 이끌고 싸우러 나간 뒤에 시비(侍婢) 천분(千分)과 같이 난을 피하여 상배실 앞 구례말 남쪽 산 불공터에 움막을 짓고 숨었으나 왜병에게 붙들려 욕을 당하게 되자 둘이 함께 자결하였다. 이 일이 알려져 조정에서 정려를 명하였다고 한다. 여각은 정면 측면 각 1칸의 우진각 기와지붕이며, 그 안의 현판에는 ‘烈婦 通政大夫黃大成妻沃川陸氏之閭(烈婦 통정대부황대성처옥천육씨지려)’라 써있다. 기문은 열부육씨정려중수기(烈婦陸氏旌閭重修記)라는 제목으로 <별책부록-1(기문·묘갈문·비문)>에 표제항목으로 실려 있다.《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鎭安郡史(진안군,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