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령면 강정리 2-1번지 보흥사(←寶興寺) 대웅전 앞 왼쪽에 있는 석탑. 1976년 4월 2일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73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3.97m. 기단부 위에 초층 탑신부, 그 위에 4층의 탑신부와 상륜부를 두었다. 초층 탑신부와 2층 탑신부의 체감률은 매우 크고 2층부터 5층까지는 거의 없어 전체적으로 세장(細長)한 고려시대 탑 양식을 지니고 있다. 기단부는 현재 한 개 층으로 보이나 지대석으로 여겨지는 하층 기단부는 땅에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기단부는 각 방위마다 1매석의 돌에 탱주와 우주를 하나씩 새겨 세웠다. 기단부의 갑석은 추녀와 별도로 2단의 조각이 있다. 초층 탑신은 1매석에 우주를 조각하였다. 옥개석은 4단의 층급 받침을 두었고 추녀 부분에서 약간 들린 모습으로 조각하였으며 두툼하다. 제5층 옥개석 정상부에는 방형의 노반석(露盤石)이 얹혔는데, 상연에는 화문대를 장식하였고 그 위에 둥글넓적한 돌을 얹어 보주를 삼았다. 상층 기단부 갑석과 각 옥개부에 이끼와 고착 지의류 등이 서식하고 있다. →보흥사.《참고문헌》문화재청(http://www.heritage.go.kr/heri/idx/index.do)
  • 금당사 극락전에 있는 조선 후기의 불상. 높이 1.69m. 1973년 6월 23일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었다. 금당사가 소유하고 관리한다. 극락전에 봉안된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 중 본존불만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마치 칼로 빚어낸 듯 경직된 형태의 목조여래좌상으로 머리와 상체, 하체가 벽돌을 쌓듯 비유기적으로 구성되어 순박하고 투박한 조선 후기의 조각 양식이 반영되어 있다. 머리는 예리하고 촘촘한 나발(螺髮)이지만 육계(肉髻; 부처의 정수리에 솟아 있는 상투 모양의 혹)의 윤곽이 불분명하며 중앙 계주(中央髻珠)와 정상 계주(頂上髻珠)가 솟아 있다. 넓적한 얼굴은 날카로운 눈과 직선적인 코, 꽉 다문 작고 얇은 입으로 무표정하며, 목에는 좁은 삼도(三道)가 새겨져 있다.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를 걸친 신체는 신체 볼륨이 약화되어 사각형의 둔중한 형태미를 나타낸다. 직선적으로 넓게 트인 옷깃, 밋밋한 가슴, 가슴을 가로지르는 단순한 군의(裙衣) 주름, 양팔에 걸쳐진 폭이 넓은 옷자락은 평면적으로 도식화되었으며, 오른쪽 겨드랑이를 따라 드리워진 옷자락은 반전하여 복부의 옷자락 속으로 여며져 있다. 따로 만들어 끼운 양손은 각각 엄지와 장지를 맞댄 것으로 보아 아미타불임을 알 수 있다. 현재의 금당사는 1675년에 중창되었는데, 양식상 이 목불좌상도 중건 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좌우의 협시보살(높이 1.42m, 1.28m)은 모두 손에 연꽃 줄기를 쥐었다.《참고문헌》문화재청(http://www.heritage.go.kr/heri/idx/index.do)
  • 진안군 동상주천로 2173-3 (주천면) 이부용이 소장하는 초상화. 2013.11.15.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225호로 지정되었다. 이덕응 제자인 신기영(20세) 입상 초상화는 지금까지 발견된 석지 채용신이 그린 초상화에서는 대부분 배경을 그리지 않고 있는데, 이작품은 1916년에 황단을 배경으로 제작된 매우 희귀한 작품이다. 더욱이 이 초상화는 조선조말 최고의 초상화가인 석지 채용신의 필치가 담긴 작품들로서 예술적 가치가 크며, 회화사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 진안읍 운산리 내후사동(內後寺洞)마을 입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 1971. 12. 2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었다. 방형축대 위에 2중기단을 쌓고 3층의 탑신을 올렸다. 화강암 재질인 모든 층의 탑신에는 우주(隅柱)가 새겨져 있고 정상부에는 원형의 보주가 있다. 층간 체감율이 적은 전형적인 고려 초기 탑 양식을 따르고 있다. 탑이 있는 곳은 마을 이름이 말해주듯이 원래 절이 있던 터였다. 국유(國有)로 진안군이 관리한다.《참고문헌》鎭安地方文化財地表調査報告書(전북대학교전라문화연구소, 1989), 문화재청(http://www.heritage.go.kr/heri/idx/index.do)
  • 주천면 주양리에 있는 이덕응의 초상화 3점(입상 1점, 좌상 2점). 1987. 4. 28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24호로 지정되었다. 이덕응(1866-1949)은 덕흥대원군 이초(李岹)의 후손으로 궁내부 판임관을 제수 받았고, 송병선의 제자이다. 1910년 경술국치 후 낙향하여 지방에서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주천면 대불리에 황단을 설치하고 황단제를 봉행하였다. 1922년에 13도 도순강장에 임명되어 전국을 순회하며 신유교정신을 통해 배일사상을 고취하였다. 그의 초상화를 채용신(蔡龍臣)이 그렸다. 채용신(1850-1941)은 조선말 여러 임금의 어진과 고종황제의 초상을 그린 화가로, 무과에 급제하여 사과(司果, 종6품), 의금부도사(종5품), 수군첨절제사(종3품관), 칠곡부사, 정산군수 등 20여년을 관직에 머물면서 가선대부(종2품)에 올랐다. 작가 채용신은 조선말 선비정신과 위정척사 정신을 바탕으로 작품 활동을 한 화가로 항일 우국지사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1916년 주천면 대불리를 찾아 4개월을 머물면서 이덕응과 제자들의 초상화 5점을 그려 주었다. 당시 이덕응과 채용신과의 관계는 기록이 없으나, 1900년대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궁내부에 출사한 이덕응과 같은 무렵 궁중에서 어진을 그린 채용신은 서로 알고 지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권 상실 후 주천면 대불리에서 화양도원을 설립하고 국권회복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고 있는 이덕응을 찾아와 그의 초상을 그렸을 것으로 추측된다. 초상화 3점은 금관조복(金冠朝服)을 착용한 입상 1점과 유건(儒巾)본, 평상복본 등 2점의 전신 좌상이다. 같은 인물에 대해 다양한 의관으로 초상화를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금관조복의 입상은 155×69㎝의 크기이고, 유복의 좌상은 94×54㎝, 평복의 좌상은 94×54㎝의 크기이다. 비단 위에 채색하였다. 평상복의 초상화는 3점 가운데 가장 나이가 든 얼굴 모습이다. 후손 이부용(주천면 주양리)이 소장하고 있다.《참고문헌》문화재청-우리지역문화재(http://www.cha.go.kr)
  • 진안군 동상주천로 2173-3 (주천면) 이부용이 소장하는 초상화. 2013.11.15.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26호로 지정되었다. 조병순 입상 초상화는 지금까지 발견된 석지 채용신이 그린 초상화에서는 대부분 배경을 그리지 않고 있는데, 이작품은 1916년에 황단을 배경으로 제작된 매우 희귀한 작품이다. 이 초상화는 이덕응의 제자인 조병순(24세) 입상으로 조선조말 최고의 초상화가인 석지 채용신이 익산 금마에 낙향하여 그린 작품으로서 예술적 가치가 크며, 회화사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 정천면 갈룡리 1428번지 천황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불전. 1973. 6. 13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었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맞배지붕이다. 다포양식의 공포를 가졌다. 공포는 내외 3출목(內外三出目)을 둔 비교적 복잡한 형태로 외부제공(外部諸工)은 세장(細長)한 앙설형(仰舌形)으로 되었고, 내부제공은 초각(草刻)하여 연(蓮)꽃을 새겼다. 내부 불상 위로는 간략한 닫집[寶蓋]을 설치하고 그 위로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참고문헌》문화재청(http://www.heritage.go.kr/heri/idx/index.do)
  • 안천면 백화리 905번지에 있는 화산서원(←華山書院)에 봉안된 황희(黃喜)의 초상. 1987. 4. 28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9호로 지정되었다. 비단 바탕에 채색, 가로 54㎝ 세로 80㎝. 이 초상은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소재 옥동서원(玉洞書院)에 소장되어 온 것을 1884년에 모사한 것이다. 옥동서원본은 황희가 62세 때 그려진 초상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를 모본(母本)으로 하여 그린 초상 5~6본이 산재하고 있었으나, 모두 전란 중에 소실되었고, 나주 노안면 노덕서원(老德書院)과 파주영당(坡州影堂) 등에 모사본이 전해오고 있다. 그 중에서도 화산서원본은 모사본이기는 하지만 원본 이상으로 우아한 느낌을 주어 황희의 국가 표준초상으로 지정된 바 있다. 얼굴 묘사에 있어서 콧날과 눈 주위에 음영을 가하여 요철(凹凸)을 표현하고 있다. 흰색과 검은 색의 터럭이 섞인 수염은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관복의 옷주름은 비교적 강한 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초상은 인물을 화면 전체 가운데 약간 우측에 치우치도록 배치하였다. 그림 속의 황희는 정면을 향하고 있으나 모자의 배치나 기울기, 그의 시선으로 볼 때 화면의 약간 좌측 아래를 향하고 있는 모습이다. 녹색의 운문사로 된 관복을 입고 두 손을 소매자락 사이에 숨기고 있다.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쌍학흉배와 옥 각대를 갖춘 관복차림의 반신상(半身像)인데, 복색으로 그의 지위를 짐작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홍여하(1621~1678)가 이 초상화를 보고 황희의 인품에 대해 찬(撰)한 글이 전한다.《참고문헌》문화재청(http://www.heritage.go.kr/heri/idx/index.do)
  • 상전면 주평리 17번지 회사마을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 1976. 4. 2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2호로 지정되었다. 국유이며 진안군이 관리하고 있다. 절터(→회사동 절터)로 보이는 밭 가운데 서 있으며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높이 1.4m의 소형석탑이다. 초층 옥신(初層屋身)은 우주(隅柱)를 새겼으며, 탑신부 이상은 소형으로 매우 균제(均齊)하고 견실한 결구미(結構美)를 보여준다. 초층 옥개석(初層屋蓋石)의 추녀는 파손되었으나 중후(重厚)하면서 우아하고 추녀 밑에는 3단의 받침이 새겨져 있다. 2층 옥신부터는 높이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 탑은 기단양식이나 옥개석의 특징 등에서 신라탑의 형식을 보여주고 있으나 고려 전반기의 작품으로 보인다.《참고문헌》문화재청(http://www.heritage.go.kr/heri/idx/index.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