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안읍 군하리 253-8번지 일원 성뫼산에 있는 삼국시대 석성. 성뫼산성은 진안천과 마이산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소하천이 합류하는 지점의 동쪽 성뫼산(353.2m) 정상에 있다. 성의 형태는 배[舟] 모양으로 둘레는 479.5m이며, 테뫼식 석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 내부에는 너비 4m의 토루가 있으며, 남문과 북문이 있고 동벽 중앙에 동문지가 있다. 『조선 보물 고적 조사 자료』에 의하면 ‘석축을 하고 길이는 약 270간이며 우물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 내부에는 평탄한 건물 대지가 있었고, 다수의 백제 기와와 토기 편들이 채집되었다. 진안은 백제 때 난진아현(難珍阿縣)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성뫼산성은 그 치소지로 생각된다. 그러나 진안 체육공원이 조성되면서 대부분 파괴되었다. 성뫼산성은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산 정상부에 월랑공원과 진안군 문예체육회관이 건립되면서 성벽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성 내부에서는 백제 기와와 토기 편들이 산재해 있고, 백제 때 난진아현으로 비정되고 있어 그 현의 치소성으로 판단된다. 성뫼산성은 남쪽으로는 국도 26호선과 고속국도 20호선이 동-서로 지나며, 국도 30호선이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는 지점에 있다. 청소년수련관 남서쪽의 산봉우리 월랑공원과 문예체육회관이 조성되어 있는 곳이 성뫼산성이 있던 곳이다.【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1989년 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에서 발행한 『진안 지방 문화재 지표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성 내부에는 백제 시대 와편과 토기편이 산재해 있었으며 우물 터와 건물지 등이 추정된 바 있다. 한편 1960년대 전영래가 조사한 내용을 2003년 한서고대학연구소에서 『전북 고대 산성 조사 보고서』를 발행하였는데 조사 당시에도 건물지와 백제 시대 토기편 등이 산재해 있었다. 위 두 권의 보고서에서는 ‘성묘산 성지, 성묘산성’으로 보고되었으며, 2006년 전주대학교 박물관이 조사하여 발행한 『문화유적 분포지도-진안군』에서는 ‘성뫼산성’으로 보고되었다.【현황】성뫼산성의 정상부는 월랑공원과 문예체육회관 등의 시설이 건립되어 성벽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우물지로 추정되는 지름 3m의 석축호가 확인되었으며, 성 안과 그 주변에는 백제 시대의 기와와 토기 편들이 산재해 있다. 『여지도서』에 주목할 만한 기록이 실려 있는데, ‘읍산창(邑山倉)’이 그것이다. 예전에 성이 무너진 후 건물만 지어 산창(山倉)으로 이용했을 가능성이 크다.《참고문헌》鎭安地方文化財地表調査報告書(전북대학교전라문화연구소, 1989)
  • 백운면 임진로 1724[평장리 363-4] 솥내에 있는 전통 옹기 생산 업체. 2017. 6. 29. 진안군 향토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옹기장 이현배가 경영한다. 가마는 여러 차례 옮겨 짓다가 평장리 368-1 자리에 흙가마가 만들어졌다. 이후 1961년에 20m정도 떨어진 평장리 363-4 자리에 다시 등요(登窯)로 이전하였다. 이후 1993년 ‘손내옹기’라는 정식 상호명을 사용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옹기의 근간인 장독을 주요 생산품으로 하면서 다양한 그릇을 함께 만들고 있다. 초대전, 개인전 및 전람회 13회와 단체전 다수에 참여하고 있으며, 2008년에는 UNESCO 선정 Award of Excellence for Handicrafts를 통해 유네스코의 인정을 받았다. 2008년~2013년 문화재청 ‘한국 전통문화학교’가 주관하는 “전통공예 기술 보존 및 개발을 위한 전통 문화[옹기] 전문인력 양성”, 문화재청 ‘나주문화재연구소’가 주관하는 “영산강 유역 대형 전용 옹관 고대 기술 복원”, 문화재청의 “숭례문 복구용 기와 가마 자문 및 조성”, (재)예올, (주)토즈가 주관하는 ‘올해의 마이스터 2010 장인 후원 사업’인 “옹기 식기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 또한 전주문화재단 ‘온브랜드 사업단’이 주관하는 “질그릇 식기 개발”과 사우디아라비아 국립박물관이 진행하는 “한국 공예문화전”에 참여하고 있다. ‘롯데백화점’ 본점과 서울 인사동 ‘쌈지길’ 공예 골목의 초대 매장을 운영하였으며 현재는 전주 한옥마을에 매장을 두고 있다. 작업장의 구성은 크게 그릇을 빚는 독막 1동, 건조장 1동, 가마집 1동이 있으며 전통 가마로 주 가마인 등요 1기, 개량[칸]가마 1기, 대형 옹관 가마 1기, 질그릇 가마 1기 등 4기가 있고, 내열류를 굽는 가스 가마가 1기 있다. 현재 상시 다섯 명이 일하고 있으며 일에 따라 두 세 명이 더 하기도 한다. 생산하는 그릇의 종류는 200 여 가지로 소량 생산하는 방식이며 연간 1만 여개를 생산하고 있다. 전화 432-3252《참고문헌》디지털진안문화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http://jinan.grandculture.net/?local→jinan)
  • ⇒ [문화유산]→[서당·정자]→[정자]
  • ⇒ [문화유산]→[서당·정자]→[정자]
  • ⇒ [문화유산]→[향교·사당]→[사당]
  • ⇒ [문화유산]→[서당·정자]→[서당]
  • ⇒ [문화유산]→[비석(암각서)]→[동향면 편]
  • ⇒ 군상리 우화산 일원 유적군(羽化山一圓遺蹟群). 진안읍 군하리 산1-1 진안읍 남쪽 우화산 일대에는 우화정을 비롯하여, 우화산 비석군, 가학대, 영모대, 옥류천 등 역사성이 있는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이를 모두 포함하여 2016. 12. 28. 진안군문화유산 기념물 제 2호로 지정되었다. 암각서는 진안천으로 돌출되어 있는 암벽에 새겨져 있다. 각서는 크게 세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맨 처음 새겨진 각서는 편액처럼 장방형으로 구획된 틀에 초서로 새겨진 ‘가학(駕鶴)’이라는 암각서는 신선이 학을 타고 논다는 뜻이다. 그 다음 두 번째는 각서는 ‘영모대(永慕臺)’ 각서와 그 아래의 천안 전씨의 가계 내력을 새긴 각서이다. 전반적인 내용은 천안 전씨 시조인 환성군이 백제 개국공신이라나 내용과 후손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마지막 세 번째 각서는 석벽의 좌측 중단에 새겨져 있는데, 광서 16년(1889) 현감 김요협이 고을의 선비 전의호, 전재택과 함께 새긴 석실제명이다. 이를 풀어 보면(안내문의 해석) “무릇 선비는 석실에 이름을 새긴 것은 공과 덕이 있어서 이지만 오늘 날은 그렇지 않다. 내가 몇몇 사람과 더불어 여가를 타서 노닐다 읊나니 우리들의 짧은 인생이 한탄스럽고 자연의 무궁함이 부러워서 기록한 것이나 후일에 소옹(송나라)이나 양웅(한나라) 같은 사람의 기록이 없으리라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라는 내용이다. 한편 가학대 각서 아래쪽에는 12기의 석비가 세워져 있는데, 본래 진안군청 앞에 있는 불망비와 선정비 등을 이건한 것이다. 비석이 세워진 연대는 대체로 19세기 초반부터 1950년대까지 다양하다.《참고문헌》진안군 비지정문화재 조사용역보고서(전라문화유산연구원 2016)
  • ⇒ [문화유산]→[비석(암각서)]→[성수면 편]
  • 진안군이 국가지정문화재나 전라북도가 지정한 문화재 이외의 향토문화자원을 유지, 보존하기 위하여 제정한 제도. 2016년 모두 26점이 지정되어 있다. 유형유산으로는 삼천서원 묘정비, 용담향교 공적비, 박이풍 석정려, 최학부 묘비, 삼계석문 암각서, 마이산, 용암일대 암각서군, 고무정, 학남정, 쌍벽루, 쌍계정, 한들공소, 두원공소, 화산서원, 학륜당, 완월루, 도장각, 어서각, 고지집, 김대거 종법사 생가, 화양산 황단, 천황사 대웅전 석가여래 삼존불상 및 대좌·수미단 등 21점, 무형유산으로는 금척무, 중평농악 등 2점, 기념물로는 웅치전적지, 우화산 일원 유적군, 담락당 하립·삼의당 김씨 부부유지 등 2점 등 기념물 3점 등이다.《참고문헌》진안군문화재일람표(2016)
  • 부귀면 세동리 산302에 소재하는 묘비. 이 비는 부귀면 세동리 웅치 부근 산 능선에 세워져 있다. 방형의 대석위에 약 80㎝의 석비가 세워져 있다. 귀부나 이수 등이 갖춰져 있지 않고 석비만 있는 형태이다. 비문은 무안 현감과 강원도 관찰사, 병조참판을 지낸 한익상이 찬했다. 글은 최학부의 아들인 최설로 추정되며, 서체는 창암 이삼만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문에 의하면 휘는 학부, 자는 문백(文伯)이다. 초가집 둘레에 대나무를 심었더니 대가 빽빽하게 자라 숲을 이루었다는 의미에서 죽림옹(竹林翁)이라 하였다. 병자(순조 16년, 1816년)년에 생을 마치니 향년 77세였다. 글을 찬한 한익상은 최학부의 아들인 최설보다 네 살 위로 전주 조경묘 별검 시절에 서로 친하게 지내던 사이이다. 한익상이 무한현감을 지내던 때에 이곳에 들러 비문을 써줬다고 한다. 비문의 내용 중에 “…鎭安之二北笛川舊熊峙洞都主峰東麓最上節乾坐…”, 즉 “진안의 이북면 적천마을(현 부귀면 적천마을) 옛 웅치의 골짜기 제일 높은 봉우리 동쪽 기슭 건좌에 묘를 썼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이 비문을 통해 이 일대가 임진왜란 당시 관군과 의병 천여 명이 왜군을 맞아 처절하게 항쟁했던 웅치전투의 현장임을 파악할 수 있다. 이 비는 2016. 12. 28. 진안군문화유산 유형 제 4호로 지정되었다.《참고문헌》진안군 비지정문화재 조사용역보고서(전라문화유산연구원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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