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진안군총람]→[종교단체]→[천주교]
  • 마령면 강정리 북서쪽에 있는 석성 터. 마이산에서 서쪽으로 뻗은 산줄기 능선을 따라 축성된 포곡식의 석성이다. 산성의 평면 형태는 장타원형이며, 둘레는 611m이다. 남서·북동 성벽은 계곡 쪽으로 내려오면서 대부분 파괴되었고 성벽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구역은 남동쪽 약 70여 미터이다. 성벽은 지대가 낮은 서쪽은 편축, 나머지 쪽은 협축 하였으며 높이는 약 4~5m이다. 성문은 북쪽과 남쪽, 동쪽 등 3개소가 추정되고 있다. 성 내부의 동남부는 가장 높은 곳으로 평탄한 대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지대가 낮은 서벽 중앙에도 대지가 조성되어 있다. 이 대지에서는 호형토기‧삼족토기‧개배편 등의 토기류와 내면에 승석(돗자리)흔이 있는 기와 편 등의 삼국 시대 백제 유물 등이 확인된 바 있다. 그러나 통일신라~고려시대로 보이는 토기 편들도 확인되고 있어 백제 이후에도 산성이 경영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지금은 묻혀 있지만 성 경내에는 우물이 있어 농성하기에 좋은 조건을 가진 성이었다. 동-서, 남-북으로 사통팔달한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어 이 산성은 백제 마돌현의 치소(治所: 관아 소재지)성의 배후 산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듬은 돌을 ‘品’ 자형으로 쌓고 있는 점은 고대산성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1989년 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가 발행한 『진안지방문화재 지표조사보고서』와 2006년 전주대학교 박물관이 조사하여 발행한 『진안군문화유적분포지도』 등에서 ‘합미산성’으로 보고되었다. 지금은 산림이 우거져 성 내부 현황은 잘 살펴지지 않으나 외형적으로 산 정상부와 능선을 감싸고 있는 포곡식의 산성 형태가 관찰된다. →산성.《참고문헌》鎭安地方文化財地表調査報告書(전북대학교전라문화연구소, 1989), 디지털진안문화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http://jinan.grandculture.net/?local→jinan) 재인용
  • ⇒ [문화유산]→[향교·사당]→[사당]
  • 대불리 화양산 정상에서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며 삼극(三極)에 올리는 제례(祭禮). 1919년 고종황제의 승하 소식을 듣고 이 고장의 유학자 수당(守堂) 이덕응(李德應, 1866~1949) 선생은 비분강개하여 마당에 자리를 펴고 북향 4배 통곡한 후, 3년 동안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상복 차림으로 제자들과 화양산에 올라 북쪽을 향하여 망곡(望哭)했다. 그 후 이덕응은 순종황제에게 일곱 군데의 황단 설치를 상소하여 윤허를 받아 오면서 그 증표로 고종의 어진(御眞)을 모셔오며 삼극사(三極使)로 임명되었다. 삼극은 천극(天極) 옥황상제, 지극(地極) 공자, 인극(人極) 고종황제를 말하는 것으로서 천지인 삼극을 배향(配享)하는 황단을 세운 것이다. 그 후 매년 8월 그믐 정오에 삼극 축송(祝頌)과 홀기(笏記)등을 갖추고 8변8두의 제기(祭器)를 진설하여 성인예(聖人禮)에 따라 기울어가는 국운을 만회하고 황실의 안녕과 자주독립을 염원하는 제를 올리고 있다. 화양산 황단은 대불리 개화마을에서 500m 올라간 화양산 정상에 100여 평의 터를 잡아 낮은 담에 돌을 붙이고 중앙에 가로 2m, 세로 1m, 높이 60cm의 단을 쌓은 곳을 말한다. 제례 때는 돗자리를 펴고 차일(遮日)을 치며, 대부분의 제기도 목기와 놋그릇을 사용한다. 매년 8월 그믐(29일) 정오에 삼헌관을 위촉하여 엄숙하게 봉행한다. 헌관은 전라북도 부지사, 진안군수, 군의회 의장, 부군수, 진안(또는 용담)향교 전교, 지방유림 등으로 선정하고, 제례복으로는 정승의 예복을 입는다. 이 황단제는 수당의 후손과 제자 그리고 뜻있는 인사와 지방유림에 의하여 일제의 감시와 6.25 전란 중에도 한 번도 궐사하지 않았다. 수당이 타계한 후에는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그의 자부인 김영기(金泳箕)여사가 정성을 다하여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그 전통이 98회째 이어지고 있다. 화양산 황단은 2016. 12. 28. 진안군문화유산 유형 제 20호로 지정되었다.《참고문헌》朱川面誌(주천면·진안문화원, 2014)
  • 부귀면 황금리 노래재 동쪽의 정상부(황금리 산45)에 있는 삼국시대 석성 터. 테뫼식의 편축 석성으로 둘레는 약 150m이며 대부분 붕괴하여 성벽의 흔적만 남아있다. 성 내부에서는 삼국시대 토기편과 격자문양이 있는 기와편 등이 수습된 바 있어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임진왜란 시 축성되었다는 구전이 있지만, 출토유물로 보아 삼국시대로 추정하는 것이 옳다. 가치마을의 동쪽에는 남-북으로 해발 450m 내외의 작은 분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환미산성은 가치마을에서 동북쪽으로 800여m 떨어진 분지 건너편의 산봉우리 중 가장 북쪽인 해발 540m 내외의 봉우리 주위에 축성되어 있다. 노래재의 서쪽으로는 험준한 옥녀봉(737.8m)이 솟아있다. 1989년 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에서 발행한 『진안지방문화재 지표조사보고서』에서 환미산성(丸未山城)으로 보고되었으며 일부 성벽을 확인하였다. 2006년 전주대학교 박물관이 조사하여 발행된 『진안군문화유적분포지도』에서는 환미산성(丸米山城)으로 보고되었다. 환미산성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편이고 성 내부는 좁고 평탄한 구역이 적으며, 구덩이들이 있었다고 한다.《참고문헌》鎭安郡文化遺蹟分布地圖(진안군·전주대학교박물관,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