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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반산 성터(天盤山城址). 천반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1,200m에 있는 산성 터. 넓은 터가 있고 우물이 있어 농성하기에 적당한 곳이다. 특히 북동쪽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어서 따로 성벽이 필요치 않아 성벽은 서쪽과 남쪽으로만 축조되어 있는데, 현재 서쪽 일부와 남쪽 일부가 무너진 채 남아 있다. 가막교를 건너 100여 미터 지점에서 북쪽으로 약 700m 가면 먹재골 입구에 이르고 먹재골에서 산 정상부를 따라 다시 700m 오르면 산성에 도달한다. 1989년 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가 발행한 『진안지방 문화재 지표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서북쪽의 성문지(城門址)와 성벽 흔적만 확인된 것으로 ‘下加幕 城址’로 보고되었다. 2006년 전주대학교 박물관이 발행한 『진안군문화유적분포지도』에는 ‘천반산성’으로 명명되어 있는데 성 내부의 평탄면을 확인하였다. 원래 성의 둘레는 약 2,000m이며 대부분은 무너져 그 흔적만 남아있다. 성 내부에는 비교적 넓은 평탄지가 조성되어 있고 상당량의 옛 기와편도 수습된다. 이 산성의 축조 시기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 없으나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산성의 남서 및 북서쪽 가막리 일원에는 금강의 상류인 천천(←)이 여러 번 굽이쳐 북으로 흐르며, 산성의 북동쪽으로는 구량천이 남동에서 서북으로 흘러 가막리 북쪽에서 천천과 합수하여 금강 본류를 이룬다. 이 지점에 강 속의 섬처럼 죽도가 형성되어 있다. 이처럼 산성은 굽이치는 금강 줄기를 훤히 관망할 수 있는 지점에 있다. 진안고원의 동쪽에 치우쳐 있으며, 금강변 동안(東岸)에 자리하고 있다. 수로를 따라 형성된 전북 동부내륙 교통로 중 금산-진안-장수를 잇는 남-북교통로를 감시하기에 좋은 입지를 하고 있다. 구전에 의하면 조선 후기 정여립(鄭汝立)이 역적으로 몰렸을 때 이 성을 근거지로 관군에 대항하여 싸웠다고 하나, 당시 전말로 보아 믿기 어렵다.《참고문헌》鎭安郡史(진안군, 1992), 鎭安地方文化財地表調査報告書(전북대학교전라문화연구소, 1989), 鎭安郡文化遺蹟分布地圖(진안군·전주대학교박물관,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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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촌리 비사랑마을 고지집. 백운면 노촌리 46번지 비사랑마을에 있는 고지집. 산간지역에서 주로 볼 수 있는 귀틀집이다. 2016. 12. 28. 진안군문화유산 유형 제 18호로 지정되었다. 귀틀집은 통나무나 죽각재를 가로로 포개어 벽체를 꾸미고 모서리와 교차부는 서로 아래위를 따서 물리거나 부재의 틈을 진흙으로 메워 마감하는 형식으로 짓는 집을 말한다. 남부지방에서는 강원도 산간지방, 지리산 주변 소백산맥 일부 지방, 울릉도 등에서 발견되고 북부지방에서는 중부이북지방이나 개마고원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건축양식이다. 지방에 따라서 방틀집, 목채집, 틀목집, 투막집, 고지집 등으로 불리는데 진안에서는 고지집이라 부르고 있다. 1955년 건립된 이후 현재까지 원형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이 집은 자연석으로 기단 겸 주초를 넓게 깔고, 그 위에 2치~4치 정도 굵기의 굴참나무를 껍질을 벗기지 않고 가로로 쌓아올려 벽체를 축조하였다. 전체적인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1칸이며, 정면 5칸 중 좌측부터 2칸은 방이고 가운데 한 칸은 부엌이며 우측 1칸은 헛간과 외양간으로 하였다. 이 집은 좌측 3칸만 귀틀 양식으로 쌓고 우측 2칸은 통나무 적층식이 아닌 일반 가구식으로 축조하였다. 칸 사이는 9자5치에서 10자 사이로 잡았다. 천장은 참나무를 사용하여 평평하게 고미반자 형식으로 흙을 올려 덮었고, 그 위에 대공을 세운 다음 우진각 형태로 지붕을 만들고 함석을 덮었다. 고지집은 10여 년 전부터 빈 집으로 방치되었다고 하며 보존상태도 좋지 않다. 좌측 방은 비가 들이쳐 하부 통나무들이 많이 부식되어 있고, 우측의 헛간과 외양간 부분도 많이 기울어져 있다. 원래의 지붕재료는 알 수 없으나 현재는 함석지붕이다. 부식이 많이 진행된 상태이다.《참고문헌》디지털진안문화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http://jinan.grandculture.net/?local→ji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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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 정재(呈才)로 진안군에서 재현·공연한 춤. 2016. 12. 28. 진안군문화유산 무형 제 1호로 지정되었다. 금척무는 본디 조선을 개국한 태조의 건국 이념에 맞추어 몽금척(夢金尺)이라는 이름으로 창제한 당악정재[唐樂呈才: 고려 때 송(宋)에서 들어온 궁중 무용의 한 종류] 양식의 춤인데, 궁중정재 무형 문화재 고 김천홍의 지도를 받은 김광숙에 의해서 1981년에 진안에서 ‘몽금척무’라는 이름으로 첫 재현 공연을 하였다. ‘몽금척’의 기원은 마이산과 관련된 설화에서 시작된다. 『진안지(鎭安誌)』(1924)에 실려 있기를 “야사(野史)에 의하면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 어느 날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금척(金尺)을 건네주면서 ‘이 금척으로 장차 삼한 강토를 헤아려 보라.’고 한다. 이후 1380년에 전라북도 운봉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황산대첩]하고 개선하는 도중 이성계는 마이산을 들르게 되는데, 산의 풍광이 꿈에 신인에게서 금척을 받았던 곳과 같았기 때문에 놀란다. 창업의 경사와 마이산의 풍광을 노래한 내용이 1393년에 제작한 ‘몽금척요(夢金尺謠)’에 수록되어 있다.” 『진안지』의 이 글을 접한 마이산 은수사 주지 황순필(작고)이 1975년 국립국악원 궁중정재 무형 문화재 김천홍에게 이 가무의 재현과 전수를 의뢰하였고, 전주의 무용가 김광숙이 이를 전수받았다. 그리고 현 진안제일고등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진안백합무용단’을 통해서 1981년에 첫 공연을 함으로써 금척무가 진안에서 전승되는 계기가 되었다. 진안군에서는 2007년부터 ‘금척무용단’을 발족시켜 이 춤을 계승하고 있으며, 매년 진안 군민의 날 축제에서 공연하고 있다. 금척무는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1. 초입 배열(初入排列): 맨 처음 악에 맞추어 족도(足蹈 : 다리를 굽혔다 폈다 하는 춤 동작)하면서 늘어선다. 구성 인원은 죽간자 2인, 족자 1인, 금척 1인, 황개 1인 등 의물(儀物)을 든 4인과 좌우 6인씩의 무녀로 모두 17인으로 구성된다. 나머지 의물 즉 인인장, 정절, 용선, 봉선, 작선, 미선, 홍개, 흑개 등의 의물을 든 사람은 좌우와 후면에 도열할 뿐 춤판에 들어가 춤을 추지는 않는다. 악공은 궁중 아악이 연주된다. 악공이 없는 경우에도 반드시 박(拍)을 치는 사람은 있어 춤의 시작과 끝 장면의 변화 등을 지시한다. 2. 아악 <오운개서조인자(五雲開瑞朝引子)>가 연주되고 박(拍)을 치면 족자를 든 사람과 죽간자를 든 사람 2인이 나란히 줄지어 족도(足蹈)하면서 조금 앞으로 나선다. 음악이 그친 다음 죽간자가 ‘봉정부지영이(奉貞符之靈異)’라고 구호의 앞부분 6자만을 창한다. 3. 죽간자의 구호가 끝나고 박을 치면 앞서 연주했던 아악을 연주하고, 죽간자를 든 두 사람은 족도하다가 박을 치면 물러가 좌우로 갈라선다. 이때 족자는 뒤에 위치하여 선다. 4. 박을 치면 좌우 대열에서 앞에서부터 한 사람씩 춤을 추며 앞으로 나온다. 박을 치면 수족을 모으며 발을 밟아 가 족자의 좌우에 나란히 섰다가, 박을 치면 전과 같이 물러가서 족자의 뒤에 갈라서면 좌우 대열의 제2인도 앞처럼 동작하고 물러가서 제1인의 뒤에 선다. 제3인, 제4인, 제5인, 제6인이 이 동작을 반복한다. 제6인이 위치를 정하고 춤을 마치려 할 즈음 먼저 서 있던 10인 또한 동시에 손을 폈다가 다시 거두고 서면 악이 그친다. 5. 최자령(崔子令)[당악곡의 하나]을 연주한다. 박을 치면 금척을 든 사람과 황개를 든 사람이 함께 족도하면서 조금 앞으로 나와 선다. 악이 그치고 금척을 든 사람이 ‘몽금척수명지상야(夢金尺受命之祥也)’라고 치어(致語)를 한다. 6. 박을 치면 앞의 악을 연주하고, 금척을 든 사람과 황개를 든 사람이 족도하다가 멈추면 악을 그친다. 악관이 금척령(金尺令)을 연주하면 양쪽 12인이 손을 모으고 족도하면서 악절(樂節)에 맞추어 ‘유황감지(惟皇鑑之)’라고 금척사를 창(唱)한다. 7. 박을 치면 양쪽 12인 모두 금척사 중 제용[帝用度吾心兮] 이하만을 세 차례 창(唱)하고 춤을 추면서 앞으로 나갔다 뒤로 물러갔다 한다. 금척무를 추면서 족자의 좌우에 이르게 물러난다. 끝나고 악이 그친다. 8. 악관이 포구악령(抛毬樂令)을 연주한다. 박을 치면 오른쪽 죽간자가 족도하면서 선도한다. 다음은 족자, 다음은 금척, 다음은 황개, 다음은 왼쪽 죽간자, 다음은 좌대의 6인, 다음은 우대의 6인이 차례로 족도하면서 나아간다[좌우대 12인이 함께 춤을 추면서 나아간다]. 왼쪽으로 돌면서 춤을 추어 오른쪽 죽간자와 서로 연이어 함께 악절에 맞추어 창사(昌詞)를 부른다. 9. 회무(廻舞)로 세 차례 돌고 끝나면 오른쪽 죽간자가 남쪽에 이르러 북향하고 먼저 족자, 금척, 황개를 인도하되 가운데로부터 앞으로 나가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고, 또 왼쪽 죽간자 역시 춤추는 무녀 12인을 인도하되 동쪽으로부터 앞으로 나가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여 다함께 처음의 대열대로 선다. 10. 악이 그치면 죽간자 2인은 ‘악기주어(樂旣奏於)’라 후구호(後口號)를 창한다. 11. 박을 치면 악관이 ‘오운개서조인자(五雲開瑞朝引子)’를 연주하고, 죽간자 2인, 족자 1인, 금척 1인, 황개 1인이 족도하다가 박을 치면 물러간다. 12. 박을 치면 무녀 12인이 춤을 추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박을 치면 손과 발을 모으고 족도하다가 박을 치면 춤을 추면서 물러가고 악이 그친다. 이것으로 금척무가 끝난다. →몽금척《참고문헌》몽금척 무보(진안문화원 2007), 금척무에 대한 고찰/이미영(이화여자대학교대학원 무용학과 석사 학위 논문,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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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면 좌포리 812-1(원좌길 33-10)에 소재하는 가옥. 이 집은 원불교의 대산 김대거 종법사(1914~1998)가 태어나고 성장한 집이다. 김대거 종법사는 1914년 여기에서 태어나 11세에 원불교 교조인 소태산(小太山) 박중빈(朴重彬)대종사와 인연을 맺었다. 1962년 종법사가 된 후 33년간 교단을 이끌었다.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 아랫채,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현재는 안채만 남아 있고 다른 건물들은 후대에 건축하였다. 그리고 안채 측면에는 뒤주가 있다.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인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일자형 겹집으로 지붕은 추녀가 있는 팔작지붕이다. 좌측에 부엌이 있고 우측에는 전면 마루가 있고 방과 대청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조는 1단의 낮은 기단위에 자연석 덤벙주초를 놓고 방형기둥을 세운 다음 도리와 결구하고 있다. 가옥의 기단은 낮은 자연석 기단이지만 기둥이 보통집 보다 한자 이상 높아 훤칠해 보인다. 안채의 면적은 83.57㎡로 옛 한옥으로서는 규모가 큰 평이고, 기둥이 높고 대들보 등 여러 부재들도 적절한 크기로 구성되어 모든 면에서 짜임새 있게 건축되었다. 특히 앞뒤의 퇴칸을 5자 반 정도로 하여 툇마루를 널찍하게 한 것도 특징적이다. 또한 부엌의 외벽인 판벽에 자귀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어 전통적인 방식으로 목재를 다듬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013년 안채를 보수하였다. 사랑채는 현재의 종무소(사무소)건물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이후 문간채가 들어서 중앙에 대문이 있고 좌우는 1칸씩으로 구성되어 마굿간 등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가옥은 2016. 12. 28. 진안군문화유산 유형 제 19호로 지정되었다.《참고문헌》진안군 비지정문화재 조사용역보고서(전라문화유산연구원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