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령면 강정리 248-1번지 원강정마을에 있는 일제 강점기 가옥. 2005년 6월 18일 등록 문화재 제191호로 지정되었다. 1924년에 건축한 2층 한옥이다. 풍수에 조예가 있던 집 주인 전영표가 ‘마령면 최고의 명당에 지은 집’이라고 한다. 이 집에서 초창자인 전영표를 비롯하여 2대 전봉주, 3대 전희준까지 살았으나 현재는 비어 있는 상태이다. 이 가옥은 1970년에 대문 밖에 있던 사랑채 규모를 축소하여 현재의 아래채 자리로 이축하는 등 1차 수리를 했다. 안채는 생활에 맞게 안방과 뒷마루 일부분을 안방으로 만들고 안방의 일부와 부엌을 합하여 윗방을 만들었다. 아랫방은 화장실로 개조하고 부엌방과 부엌을 합하여 입식 부엌으로 만들었다. 본디 창고였던 곳간채는 자손이 혼인하자 분가시키기 위하여 방과 세면실을 만들었다. 2007년부터 2008년까지 진행된 2차 수리 때는 가옥을 보수하고 담장을 설치하였다.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안채가 있고 그 오른쪽에 아래채, 왼쪽에 곳간채가 ‘ㄷ’ 자 형태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안채는 동남향으로 ‘ㅡ’ 자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전면에는 정원이 조성되어 있고 후면에는 장독대가 위치하고 있다. 아래채는 ‘ㅡ’ 자 형으로 안채의 오른쪽에 있다. 본디 아래채는 대문 옆에 안채와 나란한 방향으로 있으면서 사랑채 역할을 했으나 1차 수리 과정에서 현재의 위치로 규모를 축소하여 이건한 것이다. 안채 1층은 정면 5칸 측면 3칸이고, 2층은 정면 3칸 측면 1칸이다. 1층은 주인이 거주하던 안방과 윗방·부엌·화장실·보일러실로 구성되었으며, 2층은 방 1칸으로 실질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1단의 높은 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방형 기둥을 세운 다음 1층 도리와 연결하고 있다. 지붕은 1층은 경사 지붕을 하고 있으며 2층은 팔작지붕 양식이다. 아래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되어 있다.《참고문헌》진안 강정리 전영표가옥 기록화 조사보고서(문화재청, 2008)
  • 진안군 정천면 천황사에 소장된 괘불. 2014.10.29. 등록문화재 제626호. 괘불도는 사찰에서 야외법회나 의식 등을 열 때 법당 밖에 걸어 놓는 대형불화를 말한다. 천황사 괘불도는 가로 337.5cm, 세로 791.1cm의 화폭에 그린 채색화로, 영산재(靈山齋 : 불교에서 영혼 천도를 위하여 행하는 의식) 의식 도량에 왕림하는 부처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1941년에 구한말의 대표적 학승인 정호가 증명을 맡아 제작한 것으로, 여의(법화나 설법 때 법사가 손에 드는 물건)를 들고 있는 본존을 큼직하게 배치하고 두광(부처의 정수리에서 나오는 빛) 좌우로 두 여래와 두 보살, 아난존자와 가섭존자를 작게 배치하였다. 독존도가 아니면서도 본존을 크게 부각하여 그리는 구도와 본존의 착의법, 얼굴모습, 오색광선으로 채운 신광(부처의 몸에서 발하는 빛), 꽃이 흩날리는 배경은 율곡사 괘불도(1684년), 미황사 괘불도(1792년) 등 전통적 괘불도의 도상을 계승하고 있으면서도 부분적으로 옅게 음영법을 사용하는 등 근대적 특성도 보이고 있다. 천황사 괘불도는 20세기 전반까지도 사찰에서 영산재와 같은 전통적인 불교의식이 이어져 오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예이다.
  • 진안읍 어은동길 23[죽산리 453]에 있는 진안 성당 관할의 공소. 2002.5.27.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어은동마을은 1888년에 공소가 설립된 유서 깊은 천주교 신자촌이다. 진안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신유박해[1801년] 이전부터이다. 전주 본당[현 전동성당] 관할이었던 어은동공소는 1900년 9월 22일 전주 본당에서 분가해 전주 동남쪽인 진안, 장수, 무주, 남원 일대까지 관장하는 본당으로 설정되었다. 전라도에서 두 번째로 사제가 된 김양홍(金洋洪)[스테파노, 1874~1945]이 어은동 본당의 초대 주임신부였다. 당시 인계받은 본당 관할 공소는 11곳이었으나 신자들의 편의를 위해 18개 공소로 나누었다. 신자 수는 모두 999명이었고, 어은동에만 189명이 있었다. 1888년 9월 옛 공소를 수리하고 확장해 목조 7칸 성당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교세가 점점 불어나자 1904년 마을 아래쪽에 새 성당 15칸 크기의 한옥을 신축하였다. 1905년에는 주교 뮈텔[Mutel, 閔德孝, 아우구스티노, 1854~1933]의 지시로 여성 신도들을 위하여 통로를 따로 만들었다. 1906년 다시 성당을 넓힐 때 남녀 교우청을 각각 한 칸씩 신축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09년 3월 마침내 돌너와지붕 목조 162㎡[49평]의 새 성당을 준공하였다. 지붕을 돌너와로 일 때 신자들이 인근 산에서 등짐으로 직접 돌을 운반하였다고 한다. 이 건물은 2002년 5월 31일 등록 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었다. 성당이 완공되던 1909년에 김양홍은 성당 사랑채에 영신학교를 세워 국어·한문·수신·산수 등을 가르쳤으며, 1911년에는 성당 앞마당에 학교를 신축하기도 하였다. 학교가 신축되던 1911년 어은동 본당 관할 신자 수는 2,117명이었고, 어은동공소 신자만 520명이나 되는 등 어은동은 진안·장수 지역 신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21년 어은동 본당은 본당 자리를 마령면 연장리 한들공소로 넘겨주고 다시 공소로 편제되었다. 이후 어은동공소는 1947년 11월 송남호를 주임신부로 맞이하면서 다시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나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1951년 다시 폐쇄되어 한들본당의 공소가 되었다. 그러다가 본당이 1952년 진안읍으로 옮겨 가면서 어은동공소도 진안 본당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말과 어은동공소 중간쯤 모시골[당고개재] 산 능선에는 완주군 천호성지로 유해가 이장된 성인 이명서의 묘터가 있다. 2014년 현재 신자 수는 21세대 약 51명[남자 24명, 여자 27명]이고, 어린이들은 없다. 전화 433-7368. 어은동공소는 1909년 전통 한옥으로 지어진 돌너와 성당으로 등록 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건축학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성당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4칸인 전통 한옥으로 지어졌지만 유럽의 양식인 ‘바실리카’식 성당 평면 요소를 현지의 재료와 건축 방식으로 구현했기 때문에 서양 성당의 양식을 한국적 방식으로 토착화하였다는 점에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 정면과 측면의 축을 바꾸어 긴 장방형의 종축(縱軸) 끝에 제단을 둔 방식은 실제적인 전례 공간을 위한 독창성을 보여 주고 있으며, 중앙 기둥 사이의 칸막이로 남녀 기도석을 구분한 것은 한국의 전통[남녀 구분]을 위한 독특한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성당의 평면은 한옥이지만 전통 한옥의 구조를 고집하지 않고 필요에 의해 재구성한 독창성[제의방, 고해실, 제단 등]을 지니고 있다. 마찬가지로 삼랑식 실내 평면 구조 또한 전통 한옥의 평면 구조와는 전혀 다른 형태를 지닌 독특함을 갖추고 있다. 또한 지붕으로 얹은 돌너와는 백운면 영모정, 장수군 천천면의 신광사 등과 함께 지역적 특성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한옥과 양옥의 절충적 형태로 전통성과 독창성을 모두 갖춘 어은동성당은 건축학적으로도 중요한 가치가 있을 뿐더러 초기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에도 중요한 건물이다. 또한 성인 이명서의 묘가 있었던 모시골이 인근에 있어 천주교 문화 유적지와의 연계에도 좋은 위치이다.《참고문헌》한국 가톨릭 대사전 10권(한국교회사연구소, 2004), 진안성당105년사(진안성당, 2006), 순교의 맥을 찾아서(가톨릭출판사, 2009), 가톨릭교회 문화유산 보존관리방안 연구(주교회의문화위원회,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