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당사에 소장된 조선 후기의 괘불탱. 1997년 8월 8일 보물 제1266호로 지정되었다. 금당사가 소유하고 관리한다. 1692년에 제작되었다. 삼베 바탕에 채색. 가로 8.70m, 세로 4.74m. 명원(明遠), 처헌(處軒) 등 4명의 화원 비구(畵員比丘)가 제작하였다. 원형 두광(頭光)에 거신광배(擧身光背)를 지닌 본존불은 좌향하여 연꽃 가지를 들고 있는 독존(獨尊) 형식의 부처로서 7면의 얼굴이 새겨진 보관을 쓰고 있고 둥근 얼굴에 긴 눈과 작은 입으로 묘사하였다. 좁은 어깨의 신체는 세장(細長)한 편으로 안정감이 있다. 거신광배 안에는 꽃무늬마다 범 자(梵字)를 새긴 장식적인 광배(光背)로 화려하다. 광배의 바깥, 좌우로 열 구씩 등장한 총 이십 구의 화불(化佛)은 충청남도 무량사 미륵불괘불탱(1627년 작)과 개심사 영산회괘불탱(1772년 작) 등과 흡사하다. 보관불의 가슴을 가린 내의(內衣) 위로는 띠가 왼쪽 어깨를 지나 오른쪽 겨드랑이로 비스듬히 지나 가슴 아래에서 묶어져 흘러내렸다. 어깨를 덮는 천의(天衣) 자락은 복부(腹部)에서 두 번 유(U) 자형을 이루며 팔 위로 늘어지고, 허리띠는 매듭지어져 무릎 사이로 흘러내렸다. 보관과 목걸이, 치마인 상의(裳衣)는 영락(瓔珞)과 꽃무늬, 다양한 수식(垂飾) 등으로 매우 화려하다. 적색과 녹색이 주조색으로 하늘색, 황색, 흰색, 분홍색, 금채(金彩)가 돋보이며 이들은 화사한 문양과 함께 밝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화기(畵記)에 바탕(波湯), 복장(腹藏), 초지(草紙), 후배지(後褙紙), 주홍(朱紅), 하엽(荷葉), 오색사(五色絲), 아교(阿膠), 말장(末醬), 원경(圓鏡) 등 괘불탱 제작에 필요한 물품을 시주한 명단이 자세하게 명시되어 있다. 현재 판독 가능한 괘불탱 화기(畵記)는 다음과 같다.(□는 판독불능 글자) “康熙三十一年(1692년) 壬寅六月聳出山金堂寺□, 佛幀 波湯 施主金尙立兩主, 施主李時達單身 施主文德生兩主, 施主金好珠單身 施主金□傑單身, 施主朴乭善單身 施主金吾□單身, 施主金已文兩主 腹藏施主金□□兩主, 供養紅□□末□施主辛京三兩主, 供養施主幼學金起仁兩主 施主崔淡伊兩主, 施主紅元比丘 朱紅施主善□比丘, 荷葉施主金末□兩主, 圓鏡施主李□末兩主 施主金尙□兩主, 施主姜萬億兩主 阿膠施主白吉元兩主, 五色絲施主□善兩主, 布施施主鄭貴男兩主, □灵通施主金□瑞單身, 波湯保□曺海□兩主, 波湯保□崔明在兩主, 供養保□相信比丘, 草紙施主 印□比丘, 後褙紙施主宋白□兩主, 施主□□比丘□□□ 施主孫氏□春兩主, □□□施主白日□單身, □□施主□□兩主, 畵員 明遠比丘, 處軒比丘, □□比丘, 致□比丘, 證明信密比丘, 供養主白惠比丘, □印比丘, 化士□□比丘, 別座善沃比丘”《참고문헌》金塘寺掛佛幁畵(금당사, 1692), 문화재청-우리지역문화재(http://www.cha.go.kr)
동향면 대량리 어서각에 소장된 교지(敎旨). 1983. 5. 7 보물 제746호로 지정되었다.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이었던 성석린(←成石璘)에게 내려진 왕지로 소유와 관리자는 성배현[창녕 성씨 종중]이다. 교지는 1402년 ‘방간(芳幹)의 난’을 평정하고 태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로로 익대좌명삼등공신(翊戴佐命三等功臣)에 포상된 바 있는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성석린에게 보직이 주어지는 왕지이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王旨 成石璘 爲輸忠同德 翊戴佐命功臣 大匡輔國 崇祿大夫 領義政府使兼 判開城留後司 修文殿大提學 領春秋館事 昌寧府院君者 洪武三十五[太宗二]年 十一月 十八日.’ 관명은 여말선초(麗末鮮初)의 관직명이 병용되고 있다. 연호 위에 찍은 도장은 ‘朝鮮國王之印(조선국왕지인)’으로 보이며 명(明)에서 보내온 금인(金印)으로 추정된다. 7행으로 쓰였으며, 상단 일부와 하단의 일부가 훼손된 외에는 대체로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지질은 저(楮)의 장지(壯紙)이다. 필체는 조선초에 일반적으로 사용된 초서체이고, 크기는 가로 61.1㎝ 세로 32㎝이다. 이 교지를 봉안하고자 세운 어서각(御書閣)은 1883년에 세워진 것으로 동향면 대량리 661번지 양지마을에 있다. 전라북도 지방의 교령류로는 가장 오래 된 것이다. 어서각은 이 교지가 태종의 글씨로 쓰였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지만 태종의 글씨인지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성석린, →어서각.《참고문헌》鎭安地方文化財地表調査報告書(전북대학교전라문화연구소, 1989), 文化財廳홈페이지데이타(200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 디지털진안문화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http://jinan.grandculture.net/?local→jinan) 재인용
마령면 강정리 산57번지에 있는 누정. 1975년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6호로 지정되었다가 2019.12.30. 국가유산 보물 2055호로 지정되었다. 수선루는 진안군에 현존하는 정자 중에 으뜸으로 평가받고 있다. 마령면 강정리 월운마을 앞에서 섬진강을 따라 약 8백 미터 하류 쪽 강변의 산기슭 암굴에 위치해 있다. 이 누정은 숙종12년(1686년)에 연안 송씨 사형제 진유(眞儒), 명유(明儒), 철유(哲儒), 서유(瑞儒) 등이 건립하였다. 그 뒤 고종21년(1888년)에 그의 후손 송석로(宋錫魯)가 중수하였고 1888년 송병선(宋秉璿)등이 재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진안군지’에 송병선이 지은 수선루중수기가 게재되어 있으며 수선루 사변(四邊) 암벽에는 延安宋氏睡仙樓洞門(延安宋氏睡仙樓洞門)이라는 아홉 자가 새겨져 있다. ‘수선루(睡仙樓)’ 라는 명칭은 목사 최계옹(崔啓翁)이 명명했다고 전해진다. 정자는 자연 암굴을 이용하여 이층으로 세워져 있고 이층 중앙에 ‘수선루(睡仙樓)'라는 현판이 있고 1층의 문을 통하여 오르게 되어 있다. 자연 암반 속에 지은 맞배지붕, 정면 3칸 측면 1칸의 2층 누각이다. 정면은 전통 기와를 사용하였으나 배면의 지붕은 석판을 사용하였고 정면은 겹처마이나 배면은 홑처마 지붕이다. 정면의 향 우측이 출입구이고 가운데 칸이 마루 칸이며 왼쪽에 방을 들였다. 왼쪽 방의 아궁이는 건물 뒤편에 마련되었고 방을 이루는 뒤쪽 기둥은 흰개미 등의 충해를 입었다. 단청은 새롭게 칠해졌으며 연목에는 연화머리초, 연목마구리는 3태극, 부연은 녹화머리초를 사용하였고 주두는 녹화결련금을 베풀었다. 대들보는 연화머리초에 인휘로 구성되었고 머리초와 머리초 사이의 계풍에는 금문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번안하여 올렸다. 마루와 방이 연결되는 벽면에는 산수화, 화조화, 화병화, 백학, 호랑이 물고기, 매화 등의 민화가 그려졌고 대들보 위쪽의 왼쪽 벽면에는 흰 수염을 가진 선비들이 바둑을 두는 장면이 그려졌다. 그림에는 4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연안 송씨 4형제를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은 80세가 넘도록 아침 저녁으로 정자를 오르내리며 바둑도 두고 시도 읊었는데 그 모습이 옛날 사호(四皓)의 네 신선이 놀았다는 이야기와 비슷하다 하여 정자의 이름이 수선루가 되었다. 대들보 위쪽의 오른쪽 벽면에는 이들보다 더 나이 든 노인들이 그려져 있어 세대 간의 이음을 표현하는 듯하다. 마루는 우물 마루이고 건물 앞쪽에 쪽마루를 내달고 난간을 돌렸다. 1984. 4. 1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6호로 지정되었다. 방은 비닐 장판을 깔았으며 사용하고 있지 않다. 단청은 근래에 새롭게 베풀어 상태는 양호하고 현판이 7개 걸려 있다. 수선루 중수기(睡仙樓重修記)는 <별책부록-1(기문·묘갈문·비문)>에 표제항목으로 실려 있다.《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