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담댐 수몰 이전 용담면 옥거리 상거마을 서북쪽 수성천변 절벽위에 있다가 용담면 수천리 13-15 용담 망향의 동산에 이건된 누정. 1984. 4. 1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102호로 지정되었다. 도리 기둥에 난간을 갖춘 전면 3칸, 측면 2칸, 팔작 기와지붕의 정자이다. 용담댐 수몰로 1998년 현재의 자리로 이건(移建)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본디 태고정이 있는 자리에는 15세기 말 경에 현령 조정(趙鼎)이 지은 이락정(二樂亭)이라는 작은 정자가 있었다. 그 뒤 현종 7년(1666) 당시의 현령 홍석(洪錫 1604~1680)이 새로 고쳐 짓고, 이름도 태고정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홍석은 1665년 용담향교를 개축하고, 1668년 삼천서원을 창건한 사람이다.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이 쓴 ‘태고정(太古亭)’의 현판과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쓴 ‘용담현 태고정기(龍潭縣太古亭記)’의 현판이 있는데, 홍석은 삼학사의 하나인 김상헌(金尙憲)의 문인으로 성품이 맑고 곧아 병자호란이 굴욕적인 화의로 끝을 맺자 벼슬을 단념하고 태백산 춘양(春陽)에 은거하며 학문을 닦아 ‘태백산오현(太白山五賢)’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 뒤 송시열 등에게 추천되어 벼슬에 나아갔다가 60세에 이르러 용담현령에 제수(除授)되었던 바, 조정에도 그의 인품을 존경하는 사람이 많았던 듯 하다. 송시열이 지은 기문으로 보면, 본래 그 자리에는 만송정(萬松亭)이 있었는데 퇴락하여 버리고, 그 자리에 집 한 채를 짓고 온돌방을 마주보도록 꾸며 남쪽은 와선실(臥仙室, 신선이 누워있음)이라 명명(命名)하고, 북쪽은 이은실(吏隱室, 벼슬자리를 떠나고 싶음)이라 하였으며, 이은실의 북쪽에 또 작은 헌(軒)을 하나 지어 주홀(株笏, 벼슬아치가 지니는 홀을 꽂아버리다)이라 하였고 한다. 모두 홍석 자신이 명명하고 자기(송시열)에게 이 사실을 기술해 달라기에 “세 가지 이름이 좋기는 하나 모든 것은 하나로 귀결하는 만큼 태고정(太古亭)이라 합해서 불렀으면 좋겠다”라고 권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로 보면 당시의 태고정은 지금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태고정의 원형이던 이락정(二樂亭)은 주자천이 반석과 바위사이를 스치고 흐르는 천변 옆에 몇 장 높이의 절벽이 있고, 그 위에 소나무가 무성한 절경에 세워진 정자였다. 이락정(二樂亭)은 ‘군자는 산과 물을 좋아한다(樂山樂水)’는 뜻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름은 오래 가지 못하고 소나무가 많다 하여 만송정(萬松亭)이라 불렸는데,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태고정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1911년 봄 조선총독부에서 국가에 헌납케 한 후 국고수입을 올린다는 구실로 공매처분하게 되었다. 그 때 수천리(壽川里) 송림마을의 임소환(林昭煥)이 조선총독부에서 당시 화폐로 250원에 매수한 후 용담현(龍潭縣)의 공유물로 기증하였다. 그 뒤 용담댐으로 터가 수몰되는 바람에 지금의 남산마루에 이건하게 된 것이다. 태고정은 용담현 제1루인만큼 본시 많은 판액(板額)이 걸려 있었을 것이나 세월이 지나고 이건(移建)을 거치면서 남아있는 게 거의 없으나 다행히 송시열기(宋時烈記)는 판액이 남아있고, 이경석 기(李景奭記)는 원문이 『진안지(1925)』에 실려있어 그 전말(顚末)을 알 수 있다.
【宋時烈記】 萬松亭在龍潭衙舍之西偏 雖有蒼翠蔟立 而蓁莽蓊鬱勝致埋沒焉 歲甲辰洪侯錫君敍來莅 縣事公餘登覽而樂之 卽輦燔疏剔 先搆一屋 而對置燠室 南曰臥仙 北曰吏隱 又吏隱之北 構一小軒曰柱笏 皆侯之所名也 旣成 侯以書來 請記其事 余謂三者之名則美矣 然凡物會之歸一 請以太古之亭 合而名之可乎 盖侯之爲政 撲素醇質 絶去俗吏之習尙 故其按使閔公維重 書其考曰 一境太古 斯不可無傳 傳之不可不揭之斯亭 使後之登斯亭者 有所觀慕焉 或曰舊名萬松亭 據其實也 今易之以此 無乃爽其實 而近於誇乎 余曰斯亦其實也 夫縣境深僻 民稀俗厖 侯因而撫之 不事外飾 斯非今世之所尙也 盖侯以簪纓世家 隱於深山之中 淸陰先生 嘗欲隱居求志 薦於朝 孝考朝 竟蒙獎拔 侯旣不色喜 又不索高 去就眞率 無心咎譽 及來此縣 日與山氓 問桑說麻 抛棄敲扑 時以布衣葛巾 仰而見山 俯而聽泉 兀然無朱墨之累 則吏隱之趣 在是矣 時寄軒窓 悠然有出塵之想 而升沈得失 不入於心境之間 則臥仙之興不小矣 巖峀秀拔 雲烟開歛 獨立騁眺 朝暮不厭 則拄笏之意可知矣 然則其人也 甚宜於其境其民矣 宜其按使之以是書其考也 此皆其實事也 以實而易其實 斯乃所以以不易 易之矣 何實之爽 而誇之爲近耶 然侯之意 以爲吏隱 不如眞隱 臥閣之仙 不如臥雲之仙 拄笏看山 不如捨笏而看 將有謝紱歸來之計 早晩北窓之下 陶然若羲皇上人 則是乃眞太古矣 然則斯亭之名 益抵於實 而傳之無愧矣 其扁額及溪壑八字 同春宋浚吉之筆云
【풀이】 송시열 기(宋時烈記)
만송정(萬松亭)은 용담(龍潭) 관아(官衙)의 서쪽에 있는데, 비록 푸른 뫼뿌리가 죽순처럼 솟아있으나 잡초가 무성하여 승개(勝槪)를 엿볼 수 없었다. 갑진년(甲辰年)에 홍후 석(洪侯 錫) 군서(君叙, 자인 듯)가 이 고을을 맡아 왔다. 공무의 여가를 이용하여 이곳에 등림하여 즐기고 즉시 연번(輦燔)*하고 개척하였다. 홍후는 먼저 집 한 채를 짓고 온돌방을 마주보도록 꾸몄는데, 남쪽은 와선실(臥仙室)이라 명명(命名)하고, 북쪽은 이은실(夷隱室)이라 하였다. 이은실의 북쪽에 또 작은 헌(軒)을 하나 지어 주홀(株笏)이라 하였는데, 모두 홍후(洪侯)가 명명한 것이다. 집이 낙성되자 홍후가 서신을 보내서 이 사실을 기술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리하여 내가 이르기를 “세 가지 이름이 좋기는 하나, 모든 것은 하나로 귀결하는 만큼 태고정(太古亭)이라 합해서 불렀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대체로 홍후의 정사(政事)는 박소(樸素)하고 순질(醇質)하여 속리(俗吏)의 습상(習尙)을 떨쳐버렸기 때문에, 그 곳 관찰사 민공(閔公) 유중(維重)이 고과(考課)를 매기기를 “일경(一境)이 태고(太古)스러우니 이는 전하지 않을 수 없고, 전한다면 정자에 내걸어 후일 정자에 오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보고 사모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혹자는 이르기를 “옛 이름인 만송정은 사실에 입각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지금 이 명칭으로 고친다면 이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 되고 과장에 가까운 것이 되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 역시 사실에 입각한 것이다. 무릇 이 고을은 경지가 깊고 궁벽하여 백성은 드물고 풍속이 순박하다.”고 하였다. 홍후는 이에 순응하여 안무(安撫)하고 외식(外飾)을 일삼지 않으니, 이는 지금 세상에서 숭상한 바가 아니다. 홍후는 잠영(簪纓)의 세가(世家)로 깊은 산 속에 숨어 지냈는데, 청음선생(淸陰先生)이 일찍이 은거하며 뜻을 기르다 조정에 천거하여 효종조에 마침내 발탁이 되었다. 홍후는 색(色)을 좋아하지 않았을 뿐더러 고답적인 것도 좋아하지 않았고, 거취가 진솔(眞率)하여 훼예(毁譽)에 관심이 없었다. 그리하여 이 고을에 와서는 날마다 산골 백성들과 어울려 농상(農桑)에 관한 이야기만 주고받으며 고복(敲扑)*은 포기한 채 때때로 포의(布衣)와 갈건(葛巾)으로 우러러 산을 보고 굽어 시냇물을 들으면서 올연(兀然, 고답적인 모양)히 문부(文簿)에 구속됨이 없었으니, 이은(夷隱, 관리가 되어 은거하다)의 지취(志趣)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또 때때로 헌창(軒窓)에 기대어 유연(悠然)히 진세(塵世)를 떠난 상념(想念)이 있었고, 승침(升沈)과 득실(得失)이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았으니, 와선(臥仙)의 흥취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곳에 있으면 암수(巖岫)는 수발(秀拔)하고 운연(雲煙)은 개합(開闔)한데, 홀로 서서 조망(眺望)하면 아침저녁으로 싫은 생각이 없었을 터이니, 주홀(柱笏, 홀을 꽂음)의 취미를 알 만하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그 지경과 그 백성들에게 매우 적절한 사람이니, 관찰사가 고과에 그렇게 적은 것이 마땅하다 하겠다. 이것들은 모두 실사(實事)이다. 실사를 가지고 실사를 바꾸니 이는 바뀌지 않은(변함이 없는)것으로 바꾼 것이다. 무엇이 실실(失實)이고 과장에 가까운 것이 있는가? 그러나 홍후의 생각은 이은(夷隱)이 참으로 숨은 것만 못하고, 관각(館閣)에 누웠던 신선처럼 운림(雲林)에 누웠던 신선만 못하며, 홀(笏)을 꽂아놓고 산을 구경하는 것이 홀을 버리고 산을 구경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이제 곧 인수(印綬)를 버리고 돌아올 생각을 하고 있어 조만간에 도연(陶然, 마음에 흐뭇해 하는 모양)히 북창(北窓) 아래에 누워 희황상인(羲皇上人)*처럼 될 것이니, 이야말로 참다운 태고(太古)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정자의 이름은 더욱 실(實)에 가까움이 되니, 전해짐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그 판액(板額)(扁額)과 계학(谿壑) 여덟 글자는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의 글씨이다.
* 연[輦]은 도끼 톱 따위의 연장을 실어 올린다는 뜻이고, 번[燔]은 불사른다는 뜻.
* 관장이 백성에게 교령[敎令]을 가르치는 도구. 긴 것이 고[敲]이고, 짧은 것이 복[扑]이다.
* 복희씨[伏羲氏]이전 사람, 즉 태고시설 사람이라는 뜻. 高臥北窓下, 自謂羲皇上人[陶潛]
【李景奭記】 余自暮春 抱情鐘之慘 不事文字矣 今者玉川洪使君 抵書爲其新構之閣 願得二十八字 以輝楣壁 拙詞何足以副其望 而其意勤矣 亦何可孤 詩不暇焉 應之以無韻之文 夫吏上者 子赤子急 而宣鬱豁襟 臨莅之所 不可缺 民社之暇 捐俸鳩財 營得亭榭 不亦善乎 吾素聞玉川 如歐陽之滁 環邑皆山 峰攢水複 境絶路險 莫有稱一勝槩者 故會贐知縣之行云 行穿虎豹千重嶺 坐壓蛟龍萬丈潭 以爲實際語 今據使君之揭示而述之 盖別有洞宇 爲富媼所秘 而使君宜探發之 其猶燕喜亭之丘荒 輦且燔而突然者 亦猶訾家洲之莽蒼伐惡 制奧而條見者乎 雖天作地勝 得人乃著 而勝益奇 不其然乎 堂之扁以吏隱者 冠百丈奇巖之上 高松古檜 連雲切霄 下有淸川 如龍之掉尾 長鏡新磨 素練平鋪 白沙彌望 點塵不到 不秋而霜 未冬而雪 三伏倚欞 爽氣來襲 左壓邑里 朝暮炊烟 如赤城之霞氣 右俯郊坰 襏襫攸集 綠鍼抽水 黃雲擺隴 俱可觀也 至於蒼巒合畓 泓峭交映 紫綠萬像 嵐靄千變 此則几案之所可收 非圖畵之所可輸也 亭名臥仙者 與吏隱堂相連 其曰柱笏軒者 當前楹 卽一區而異其額 其得之庭戶之間者 略同焉 使君辟地於嶠南太白山之下 可謂隱矣 得此巖洞捷息焉 其亦爲隱谷而盤旋者歟 夫隱於隱者 隱而不能爲隱 隱於不隱者 不隱而能爲隱 隱於吏者是也 是以古者 以城市之隱 爲大隱 使君之取以爲名者 孰不曰名副其實也 其曰柱笏者 亦豈無鸞情鳳想之極雲霄者乎 竊所獨怪者 三島十洲 渺乎茫然 鞭龍駕鶴 孰能覩之 而人或慕之者 取其飛昇也 而今稱臥仙何也 此亦可見其不憑虛也 柳子曰 無事爲閒 不死爲仙 夫呑金餌玉 久視長生 非儒者所可感 惟其閑靜高臥 自在烟霞爲衛 雲月爲朋 殆仙與隱 無甚別焉 使君之意 其在斯乎 顧吾不能無訝於使君者 洞天勝地之水雲光景 何獨占之專 而不與之分乎 如有意取溪藤之如白雲如白雪者數百張 或寫以長篇短詠 或以松檜間漫錄 或以川石上濯纓之所述 付之風便 則千里爲跬步 萬景來吾左右矣 此則亦不可隱也 使君以爲何如使君名錫吾 一見而莫逆者也 遂爲之記 又以此答之云
【풀이】 나는 모춘(暮春)에 정종(情鍾, 유자[幼子])의 참변을 당하고부터는 문자(文字)에 관한 일에 손을 대지 않았는데, 이번에 옥천(玉川, 용담의 고호)의 홍사군(洪使君)이 서신을 보내서 그가 새로 지은 전각(亭閣)에 이십팔 자(二十八字, 절귀[絶句]를 뜻함)를 얻어서 문미(門楣)를 빛내고 싶다 하였다. 그러나 졸시(拙詩)가 어떻게 그의 소망에 부응할 수 있겠는가? 또한 그의 간청이 절실하니 어떻게 저버리겠는가? 시는 지을 겨를이 없으니 운자(韻字)가 없는 글로 부응하겠다. 무릇 관리로 으뜸이 되는 것은 백성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으나, 답답함을 풀고 흉금(胸襟)을 펴는 것도 재임(在任)에 없어서는 안 되므로, 백성과 농사의 겨를에 녹봉(祿俸)을 덜고 재력을 모아 정사(亭榭)를 짓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평소에 들으니, 옥천은 구양수(歐陽修)의 저주(滁州)*와 같아 고을의 주위는 모두 산이어서 봉우리는 모이고 물은 겹쳤으며, 지경은 외떨어지고 길은 험하여 하나도 좋은 경치가 없다고 하였다. 일찍이 지현(知縣, 수령의 뜻)의 행차에 지어 주기를 “걸음은 호표의 천중 고개를 뚫고, 앉으면 교룡의 만장 못을 내려다본다.(行穿虎豹千重嶺, 坐壓蛟龍萬丈潭)”라 하였는데, 이는 실제를 그린 말이다. 이제 사군(使君)이 계시한 바에 의거하여 기술하자면, 대체로 별천지의 동우(洞宇)가 부온(富媼)*의 숨긴 바 되었으니, 사군은 의당 개발하여야 하고, 이는 그대로 연희정(燕喜亭)*이 황폐된 것은 연번(輦燔)하여 우뚝하게 한 것보다 낫고, 또 자가주(訾家洲, 미상)의 무성한 잡목을 베고 터서 잠깐 보는 것보다는 나은 것이 아니겠는가? 비록 하늘이 만든 승지(勝地)라 하더라도 사람을 얻어야만 드러나고 경치도 더욱 아름다워지는 것이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當)으로 이은(夷隱)이라 명명한 것은 백장(百丈)의 기암(奇巖)을 이고 있는데, 위에는 고송(高松)과 고회(古檜)가 구름과 연하여 하늘을 찌르고, 아래는 맑은 시내가 있어 용이 꼬리를 흔드는 듯하다. 기다란 거울을 새로 닦아놓은 듯, 흰 비단을 반듯이 펴놓은 듯, 하얀 모래는 한 점의 티끌도 없으며, 가을이 아니라도 서리가 내린 듯 하고, 겨울이 아니라도 눈이 내린 듯 하니 삼복(三伏)에 기둥에 기대어 섰으면 서늘한 기운이 엄습한다. 왼쪽으로 읍내(邑內)가 내려다보이는데, 조석으로 밥짓는 연기는 마치 적성(赤城, 중국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산 이름인데, 산이 붉은 빛의 토산[土山]어서 먼데서 보면 노을이 피어오른 듯하고 표기[標旗]를 세워놓은 듯하다고 함)의 노을과 같다. 오른쪽으로는 들판이 굽어보이는데, 도롱이들이 모이고 푸른 싹이 물위에 솟아나며, 누런 구름이 언덕 사이에 피어오르는 듯한 광경들은 모두 볼 만한 정경이다. 창만(蒼巒)이 전답과 합해지고 물과 산이 어울려 비치며, 자록(紫綠)이 만상(萬像)이고, 남애(嵐靄)가 천변(千變)함에 이르러서는 문자(文字)로 수습할 수 있지 그림으로는 형용할 수가 없다 하겠다. 와선(臥仙)이란 정자는 이은당(夷隱當)과 연해 있고 주홀헌(柱笏軒)은 앞에 있어 같은 구역이지만, 이름은 달리하고 있는데 호정간(庭戶間)에 있는 것만은 대충 같다. 사군은 영남의 태백산(太白山) 아래에 땅을 개척하였으니 가위 숨었다 할 수 있는데, 이 골짜기를 얻어 살고 있으니 이 역시 은거하여 반선(盤旋)할 곳이란 말인가? 무릇 숨어야 할 처지에 숨는 것은 숨어도 숨는 것이 아니며, 숨지 못할 처지에서 숨는 것은 숨지 않아도 능히 숨는 것이니 관리로 숨는 것이 바로 이 경우이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에는 성시(城市)에서 숨는 것을 대은(大隱)이라 하였는데, 사군이 따다가 이름으로 삼았으니, 뉘라서 명실(名實)이 상부(相副)한다 하지 않겠는가? 또 주홀헌(柱笏軒)이라 이름한 바는 어찌 난봉(鸞鳳)의 정취(情趣)가 운소(雲宵)에 극한 바가 없겠는가? 유독 저으기 괴이하게 여기는 바는 삼도(三島)와 십주(十州, 모두 신선이 사는 곳)는 아득하고 감감하여 용(龍)을 채찍질하고, 학(鶴)을 몬다 해도 누가 능히 눈으로 볼 수 있겠는가마는 사람들이 혹 선망하는 것은 날아서 오르는 뜻을 취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와선(臥仙)이라 칭한 것은 무슨 뜻인가? 이 역시 그의 생각이 빙허(憑虛, 가공[架空])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유자(柳子)*가 말하기를 “일이 없는 것이 한가한 것이고, 죽지 않은 것이 신선이다”고 하였다. 무릇 금단(金丹)을 삼키고 옥설(玉屑)을 마신다 해도 오래 보고 오래 사는 것은 유자(儒者)로서는 생각해 보지 못한 바이고, 오직 한정(閑靜)을 취하고 높이 누웠으면 저절로 연하(煙霞)가 호위를 하고 운월(雲月)이 벗이 되어주나니, 신선과 은자(隱者)는 자못 큰 차이가 없는 것인데 사군의 취지가 혹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는지. 그러나 돌이켜보면 나는 사군에게 석연치 않은 바가 있으니, 동천(洞天) 승지(勝地)의 산수(山水)와 연운(煙雲)의 경치를 어찌 독점하고 함께 나누어 가지지 않는지 모르는 일이다. 만일 사군이 뜻이 있다면 계등(溪籐)이 백운(白雲)과 같고, 백설(白雪)과 같은 것을 수백 장 그리든지, 혹은 장편(長篇)과 단영(短詠)으로 읊든지, 혹은 송회(松檜) 사이에서 만록(謾錄)한 것이든지, 혹은 천석(川石) 위에서 탁영(濯纓)한 기술을 풍편(風便)에 부쳐준다면, 천리(千里)를 반걸음으로 달려와 일만 경치가 나의 좌우에 있게 될 터인데, 이 역시 숨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가? 사군은 어찌 생각하는가? 사군의 이름은 석(錫)이니 내가 한 번 보고 막역(莫逆)으로 여긴 분이다. 이로써 기(記)를 삼고 아울러 이로써 답하는 바이다.
* 중국 안휘성[安徽省]에 있는 지명인데 송나라 때 구양수[駒陽修]가 이곳에 있는 취옹정[醉翁亭]에 기[記]를 쓰면서 “온 주위는 모두 산이다.[環除, 皆山也]”라고 하였는데, 그 뜻을 인용한 말이다.
* 지신[地神]의 별칭. 땅은 풍부한 자원을 갖고 있기 때문에 부쳐진 이름이다.
* 중국 광주부[廣州府] 연주성[連州城]에 있는 정자 이름인데 당[唐]나라 한유[韓愈]가 기[記]를 지었다.
* 당[唐]의 유종원[柳宗元]을 가리키는 말인 듯.
백운면 반송리 659, 마을 앞 천변에 위치한 정자. 2016. 12. 28 진안군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867년에 김혁장이 기술한 ‘학남정서’에 1867년에 중수했다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도 선행 정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누정은 전면 1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원래는 점판암 너와 지붕이었으나 1970년대에 시멘트 기와로 교체되었다고 한다. 초석이 사각형 위에 원주형 반장대석 형식으로 교체된 듯 하고 마루는 우물 마루였으나 장마루로 교체되었다고 추정한다. 왜냐면 장마루 아래에 원래 우물 마루 가설 시 사용된 장귀틀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사각형 위에 원형의 반장대석 주초를 두고 그 위에 기둥을 올렸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정자로 앞에 흐르는 내를 고려해서인지 높이 가설되었다. 기둥에 마루를 끼울 귀틀을 끼우고 그 위에 중하인방을 끼웠으며 중하인방과 마루가설용 귀틀 사이에 연주문의 장식이 간간히 남아 있다. 마루는 원래 우물 마루였으나 장마루로 교체하였고 창방과 도리장여 사이에 소로를 끼운 소로수장집이다. 건물의 앞뒤를 잇는 큰 대들보를 자연스럽게 1개 걸었고 4면의 추녀를 중심으로 선자연으로 서까래를 설치하였다. 기둥과 창방, 중하인방, 서까래 등은 석간주가칠을 하였고 각 부재의 마구리 부분은 흰색으로 칠하였다. 지붕은 팔작지붕이지만 서까래의 결구 형식으로 보면 모임 지붕이거나 우진각 지붕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홑처마 민도리 수장집이면서도 추녀에 활주를 세운 특징이 있다.정자의 마루면이 높히 가설되었기 때문에 지면에서 정자에 오르는 계단이 원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방부목을 사용하여 계단을 두었다. 주초석 역시 근래에 다시 끼워 넣은 것으로 추정되며 지붕에도 변형이 있다고 본다. 또한 마루도 우물마루였던 것이 장마루로 교체되었다. 정자 안에는 김혁장(金赫璋)이 찬한 학남정 서[鶴南亭序]와 장규찬(張奎燦)이 찬한 ‘학남정상량문’, 박연창(朴淵昌)이 쓴 ‘학남정’ 현판 그리고 다수의 시운(詩韻) 판액(板額)이 걸려 있다.
【鶴南亭序】 鎭之南有鶴南亭 蓋取諸東坡生日鶴南飛之意也 夫鶴之爲物, 可以喩至誠之道, 故繫于易以其子和之詠於詩而聲聞于天. 凡天下萬物之理, 有誠則感, 有感則通. 噫, 感通之竗, 人無彼我之間, 地無遠近之隔, 而有聲相應 氣相求之理, 則應君子之在鎭南而作是亭者, 亦豈非□孚於天而修稧於懸弧之日, 經營於開眼之下也哉? 余以聚奎之歲升諸司馬而□亭亦重修, 而以天中節設落成宴, 稧中諸益, 懇余參同, 而聲應氣求之感, 且及於余, 余何敢□, 且夫水石之奇, 槐松之茂, 足爲一區名勝, 而以其初構之心, 有此重修之擧, 則與其新構之時, 同也. 其設是宴也, 固宜然(?)而古人之臺榭林亭, 刊於名園□區者何限, 而浩劫千載, 盡爲邱墟, 欲其新亭之久久存存, 而其於海塵, 何哉? 余登斯亭, 執盞而祝之曰, 我亦稧中子也, 繼祈□之志, 守肯構之誠, 則庶乎斯亭之爲鶴南者, 在後猶今也. 歲 丁卯(1867) 也養 金赫璋 書.
【학남정 서】 진안의 남쪽에 학남정이 있는데 대체로 소동파(蘇東坡)의 생일에 학이 남쪽으로 날아간 옛 일*의 뜻을 취한 것이다. 학이라는 동물은 지성(至誠)의 도(道)를 비유할 수 있기 때문에 『주역(周易)』의 계사(繫辭)에 실려 있고 그 새끼가 화답한 것을 『시경(詩經)』에서 노래하였으며 우는 소리가 하늘에까지 들린다고 하였다. 무릇 천하 만물의 이치는 성(誠)이 있으면 감응(感應)하고 감응이 있으면 소통(疏通)하는 것이니, 아 감응하고 소통하는 오묘함은 사람들에게 피아(彼我)의 차이가 없고 땅에 원근(遠近)의 간격이 없어서, 소리가 서로 응하고 기(氣)가 서로 구하는 이치가 있는 것이다. 군자가 진안 남쪽에 있으면서 이 정자를 지은 것도 또한 하늘에 미더움이 통하여 태어난 생일에 계(契) 모임을 갖고 눈만 뜨면 보이는 곳에 경영한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규성(奎星)이 모인 해*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이 정자를 중수(重修)하였으며 단오절(端午節)에 낙성연(落成宴)을 열었는데, 계중(契中)의 여러 벗들이 나에게 함께 참석하도록 간청하여 소리가 응하고 기가 구하는 느낌이 나에게까지 미쳤으니 내가 어찌 사양하겠는가. 그리고 또 기이한 수석(水石)과 무성한 괴송(槐松)이 족히 한 구역의 명승(名勝)이 되기에 충분하고, 처음 정자를 짓던 마음으로 이렇게 중수하는 일을 하였으니 새로 지은 때와 똑같은 것이다. 이 잔치를 연 것이 참으로 마땅하고 옛사람이 대사(臺榭)와 임정(林亭)을 이름난 곳에 지은 것이 어찌 한둘 뿐이겠는가마는 천년의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모조리 언덕이 되어버렸으니 이 정자를 오래오래 남아있게 하고 싶더라도 해진(海塵)*에 대해서는 어찌하겠는가? 내가 이 정자에 올라 술잔을 잡고 축원하기를, “나도 또한 계원의 한 사람이니 기원(祈願)한 뜻을 계승하고 긍구(肯構)하려는 정성을 지키면 아마 이 정자가 학남정(鶴南亭)이 된 것이 훗날에도 지금과 똑같으리라. 정묘년(1867) 야양(也養) 김혁장(金赫璋)*이 쓰다.
*소동파(蘇東坡)의……옛 일: 송(宋)나라 소식(蘇軾)이 생일에 적벽(赤壁) 아래에서 술자리를 베풀고 거나하게 취하여 높은 봉우리에 걸터앉아 학 둥지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강의 상류 쪽에서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을 시켜 가서 알아보게 하였더니, 진사 이위(李委)라는 이가 소식의 생일에 ‘학이 남쪽으로 날아가다’라는 뜻의 〈학남비(鶴南飛)〉라는 신곡(新曲)을 지어서 소식에게 바치는 것이라 하였다.
*규성(奎星)이 모인 해: 송(宋)나라 태조(太祖) 건덕(乾德) 5년에 수, 화, 금, 목, 토 다섯 별이 규성의 별자리에 모인〔五星聚奎〕 일이 있었는데, 당시 복자(卜者)가 이것을 인재가 많이 배출될 조짐이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해진(海塵): 창해(滄海)의 먼지[塵]이라는 뜻으로, 바닷물이 전부 말라버려 흙먼지가 일어남을 비유한다.
*김혁장(金赫章, 1797[정조 21]~1882[고종 19], 자는 봉주(奉周), 호는 야양재(也養齋). 본관은 금산으로 금산군(錦山君) 신(侁)의 후손이다. 장수 신기촌에서 출생하였고, 진안 마령 평지리에서 살았다. 증조는 부호군 평(平), 조는 상옥(相沃), 부는 성진(性眞)이며, 처부는 조영완(趙榮玩)이다.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1862년(철종 13년) 충청도를 비롯하여 전라․경상도에서 삼정(三政)의 문란에 항의하는 민란이 발생하였을 때, 그에 대한 대책을 서술하여 상소하였다. 또한 1866년(고종3년) 병인양요가 일어나 민심이 흉흉할 때 척양문을 지어 민심을 바로잡으려 하였다. 이도복(李道復)이 묘표를 찬하였다.
【鶴南亭上樑文】 伏以 老少同志之人 玆以弧辰鳩聚 山水登臨之處 翼然亭子鶴飛 己覺東坡仙遊 更進南州人物 僉主人 鄕黨達尊之齒 學館生進之名 洛南涯洛北涯 人皆知溫石之里 楊東巷楊西巷春不鎖元白之隣 信友孝親 不翅居相近性相近 家詩戶禮 聿覩兄爲難弟爲難 所嗟吾生須曳 難免輪廻之劫 安得勝地佳麗 以爲棲息之階 幸逢朝野昇乎之時 獲遂林亭咸集之計 唐學士之香社 不遑治石室之功 宋君子之耆英 未暇傳給圖之事 念舊俗 切魚面之會 而新築 逢龍江之邊 雙尖之馬耳屹如 風景擅一鄕之形勝 八公之螺鬟隱若 煙嵐聳萬古之觀瞻 溪山縈紆 奚但地靈之告吉 木石俱備 抑亦人謀之克藏 肆是度而是尋 遂爰居而爰處 槐門柳逕 眞是山野之風流 石瓦松欄 實非公卿之臺榭 星聚百里 共吾儕少戊靑襟 山名九仙 誠此地同庚白髮 朝廷之縉紳或咏 方知兪長水李慶平諸函 溪堂之文酒相尋 每遇金雲館鄭綺園者類 展也寰中之別界 超然物外之仙區 可以樵可以漁 坐擁十里平野 是乎風是乎浴 俯挹一帶長川 顧道士曰 笑乎可想淸溪之消息 問主人兮 誰也自饒赤壁之前緣 恭成短引 助擧修樑 兒郞偉抛樑東 仙閣歸雲指顧中 淸明時節紛紛雨 亭外桃花强半紅 抛樑西 萊芩初月入簾低 歸臥山亭秋水隔 十年書刀夢依迷 抛樑南 龍江水色碧於藍 一望常山多隱見 行人日夕許停驂 抛樑北 羽化睡仙臨斗極 嗟我晩生琴酒筵 每依明月問消息 抛樑上 雲白山靑天宇曠 戞然孤鶴長鳴過 若遇蘇仙眞骨相 抛樑下 盤溪曲曲抱村瀉 人生感物非徒斯 蚯垤蟻封皆類也 伏願上樑之後 亭額載新石齒不老 山巾野服 好作平地神仙 墨客文人 共添滿壁書盡 名焉玆以 吾所志喜 登斯也者 孰不仰瞻 歲在丁卯端陽 南坡張奎燦撰
【풀이】 생각건대, 노소(老少)의 뜻을 같이하는 사람은 여기 호신(孤辰, 생일날)에 모였고, 산수(山水)의 등림(登臨)하는 곳에는 날렵한 정자 학이 나는 듯하다. 이미 동파(東坡, 소식[蘇軾]의 호)의 선유(仙遊)임을 알았는데, 다시 남주(南州)의 인물들이 모였다. 첨주인(僉主人)은 향당(鄕黨)에서 달존(達尊)의 연세요, 학관(學館, 성균관을 뜻함)에선 생원 진사의 명인(名人)들이다. 낙수(洛水)의 남쪽 비탈과 북쪽 비탈은 사람들이 모두 온석(溫石)의 마을임을 알고 버들의 동쪽 골목과 서쪽 골목은 봄이 원백(元白, 원진[元禛]과 백거이[白居易])의 이웃에 성큼 다가섰다. 신우(信友) 효친(孝親)하니 거주가 가깝고 천성이 가까울 뿐만이 아니라 가시(家詩) 호례(戶禮)하니, 이에 난형난제(難兄難弟)임을 알겠노라. 서글픈 것은 우리 인생 잠깐이면 윤회(輪廻)의 겁운(劫運)을 면할 수 없는데,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승지(勝地)를 얻어 서식(棲息)하는 계제로 삼을 수 있을 건가? 다행히 조야(朝野)가 태평할 때를 만나 임정(林亭)에서 모두 모일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당학사(唐學士)의 향사(香社, 향산사[香山社])는 석실(石室)을 마련할 겨를이 없었고, 송군자(宋君子)의 기영(耆英, 기영회[耆英會])은 도서(圖書)를 전해줄 기회가 없었다. 옛 풍속을 생각하니 어면(魚面)의 모임이 간절했고, 그러나 신축(新築)은 용강(龍江)의 언저리를 얻게 되었다. 쌍으로 뾰족한 마이산의 높다란 풍경은 한 고을의 형승(形勝)을 독점하였고, 팔공산(八公山)의 산세는 어슴프레 하여 운연(雲煙)은 만고의 경관(景觀)이 뛰어났다. 시내와 산줄기 휘감았으니 어찌 지령(地靈)이 길지(吉地)를 알릴 뿐이었겠는가? 목재와 석재 다 구비하였는데 인모(人謀) 역시 잘도 어울렸단다. 이에 재고 헤아려서 마침내 이곳에 거처하게 되었는데, 괴문(槐門) 유경(柳逕)은 참으로 산야(山野)의 풍류이나 석와(石瓦) 송란(松蘭)은 실은 공경(公卿)의 정자가 아니었다. 별은 백리(百里)에서 모였으니, 우리들은 모두 소무(少戊, 미상)의 선비들이요, 산 이름 구선(九仙)이니 모두가 이 곳의 동갑내기 백발이라네. 조정의 진신(縉紳)들도 혹 창영(唱詠)하였는데, 비로소 유장수(兪長水)·이경평(李慶平)의 문주(文酒) 서로 찾으니 김운관(金雲館)·정기원(鄭綺園)의 부류일세라. 참으로 역중(域中)의 별천지요, 뛰어난 세상 밖의 선구(仙區)로다. 나무도 하고 고기도 잡고 앉아서 10리의 평야를 껴안았고, 바람도 쏘이고 멱도 감으며 숙여서 한 줄기 장천(長川)을 움켜쥐었다. 도사(道士)를 돌아보니 우습게도 청계(淸溪, 이백[李白]이 노닐던 시내 이름)의 소식을 상상케 하는데, 주인에게 묻노니, 그 누가 적벽(赤壁, 양자강가에 있는 절벽으로 소동파[蘇東坡]가 노닐면서 적벽부[赤壁賦)를 지어 유명하다)의 지난날 인연을 가졌다 하던가? 공손히 단인(短引, 짧은 시)을 지어 들보 올리는 일을 돕노라. “아랑위(兒郞偉) 동쪽 들보 올리니 / 선각(仙閣. 선각산)의 귀운(歸雲)이 안계(眼界)에 있구나. / 청명(淸明) 철의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 정자 밖 복숭아꽃 반절 남짓 피었구려. / 아랑위 서쪽 들보 올리니 / 내동산 초승달이 처마 끝에 낮게 들어오네. / 돌아와 산정(山亭)에 누웠으니 가을물 가로막았는데 / 10년의 서검(書劍, 하찮은 기술) 생활 꿈속에도 아스라하네. / 아랑위 남쪽 들보 올리니 / 용강(龍江)의 물빛이 쪽물보다 푸르네. / 상산(常山)을 바라보니 다분히 보였다 안보였다 하는데 / 행인들 낮이나 밤이나 말을 멈춰 세우고 바라보네. / 아랑위 북쪽 들보 올리니 / 우화(羽化)한 신선의 졸음 북두(北斗)에 다달았네. / 슬프다, 우리 후생의 금주(琴酒)자리에선 / 매양 명월(明月)에 의지하여 신선 소식 묻는구나. / 아랑위 윗쪽 들보 올리니 / 구름은 희고 산은 푸르며 하늘은 널따랗다. / 끄르륵 외로운 학 길게 울고 지나가니 / 소선(蘇仙, 소동파)의 진면목을 보는 듯하구려. / 아랑위 아랫쪽 들보 올리니 / 반계(盤溪)는 굽이굽이 마을을 안고 흐르네. / 인생이 사물을 보고 느끼는 건 이것들만이 아니라 / 구질(蚯垤, 지렁이가 땅속에서 나오면서 만들어 놓은 흙무덤)과 의봉(蟻封, 개미의 집. 개미무덤. 아주 작은 흙무덤을 지칭한 말) 모두가 그러하다네. / 엎드려 바라옵건대 / 들보를 올린 뒤에는 정자의 현판 새로워지고 돌의 나이도 늙지 않으며, 산건(山巾)과 야복(野服)으로 평지의 신선이 되고 묵객(墨客)과 문인(文人)은 모두 벽의 서화(書畵)에 오르게 하소서.” 이름내기 좋아하여 나의 기쁨을 적나니 여기에 오르는 사람 뉘라서 우러르지 않을손가. / 정묘(丁卯, 1927) 단양(端陽)에 남파(南坡) 장규찬(張奎燦)이 찬(撰)하다.
시운(詩韻) 판액(板額) ①
中臺水石擅東西 羽化亭南鶴影低 疇昔風儀蘭社榭 卽今花樹武陵溪
古人淸債鈞遺䪨 吾輩弧辰共品題 有笛聲飛仙復返 老松千載白雲迷
松嶠 金赫容
중대산(中臺山, 팔공산) 수석이 동서에 으뜸이고,
우화정(羽化亭) 남쪽에 학 그림자 낮구나.
옛날엔 풍의(風儀)가 난사(蘭社)의 정자요,
지금은 화수(花樹)가 무릉(武陵)의 시내일세.
고인의 맑은 빚*이 남긴 시운(詩韻)에 전해져,
우리들이 생일날 함께 품평을 하였노라.
피리 소리에 신선이 날아갔다 돌아오고,
노송은 천년 동안 백운 속에 희미하네.
송교(松嶠) 김혁용(金赫容)
*맑은 빚: 원문의 청채(淸債)는 청정채(淸淨債)의 준말로, 좋은 경관을 보면 좋은 시를 지어 보답해야 하는 빚을 말한다.
②
畵榭玲瓏仙閣西 倚空招鶴白雲低 名湖百里南通峽 老木千章下夾溪
蘇子當年知有笛 蘭亭後輩惜無題 新詩華額銘留在 鴻瓜雪泥久不迷
丁卯 天中節 竹波 金赫象
그림같은 나무들이 선각산 서쪽에 영롱하고,
허공에 기대어 학을 부르니 백운이 낮구나.
백리나 되는 명호는 남쪽으로 산골에 통하고,
천 그루 늙은 나무들이 협곡으로 내려가네.
소자(蘇子, 蘇軾)는 당년에 피리가 있는 줄 알았을까,
난정(蘭亭)의 후배는 글제가 없음이 아쉽노라.
새로 지은 시를 멋진 판액(板額)에 새겨 남겨두니,
눈밭의 기러기 발자국처럼 오래도록 뚜렷하리.
정묘년(1867) 단오[端午:天中節] 죽파(竹波) 김혁상(金赫象)
③
翼然亭起濟龍西 雙閣諸峰在地低 學士風流前赤壁 道翁消息又淸溪
讓人仙趣歸先輩 故我詩痴請後題 檻外飛湍鳴石齒 笛中遺響聽依迷
也養齋 金赫璋
날아갈 듯한 정자를 제룡강(濟龍江) 서쪽에 세우니,
쌍각(雙閣)에 산봉우리들이 땅바닥에 나지막하네.
학사(學士)의 풍류는 예전의 적벽(赤壁)이고,
도옹(道翁)의 소식은 또 맑은 시냇물이네.
선취(仙趣)는 선배에게 돌아가도록 양보하고,
내 시는 바보 같아서 뒤에 써달라고 청하네.
난간 밖의 빠른 여울 돌에 부딪치며 흐르고,
피리 속에 남은 메아리가 아련하게 들리네.
야양재(也養齋) 김혁장(金赫璋)
④
山盡東南水盡西 危樓縹緲半空低 鶴棲松畔雲三逕 龍臥橋頭雨一溪
綠酒華欄歸客晩 荒苔古璧碩人題 逍遙筇屐重來見 風物無非遠積迷
壬寅秋 皓溪 金善經
산은 동남에서 다하고 물은 서쪽에서 다하니,
높다란 누대가 희미하게 허공에 나지막하네.
학이 깃든 솔숲 가에 구름이 세 갈래 길이고,
용이 누운 다리 끝에 시냇물 한 줄기 흐르네.
멋진 집에 맛난 술 있어 길손이 늦게 돌아가고,
빛바랜 이끼 덮힌 옛 벽에 명사가 시를 썼네.
지팡이 짚고 둘러보다 다시 와서 바라보니,
풍물이 전부 멀리에서 아스라이 쌓여왔구나.
임인년 가을 호계(皓溪) 김선경(金善經)
⑤
羽化之南開眼西 新亭鶴舞白雲低 岸如赤壁因多石 欄似孤舟傍小溪
酒得笙歌又更快 詩兼圖畫滿相題 也知吾輩同眞樂 歲歲弧辰醉不迷
丁卯 五月 斗村 金興均
우화정 남쪽에서 서쪽이 눈에 띄여,
새 정자에 학이 춤추고 백운이 나지막하네.
벼랑은 적벽(적벽)처럼 돌덩이가 많고,
난간은 외딴 배처럼 작은 시내에 붙었네.
술은 생황 노래를 얻으니 또 다시 빨라지고,
시는 도화를 겸하니 상에 가득하게 써있네.
우리가 모두 함께 참다운 즐거움을 알았으니,
해마다 생일에 모여서 얼큰하게 취해보세.
정묘년 5월 두촌(斗村) 김흥균(金興均)
⑥ 次鶴南亭韻
洞門遠闢水東西 鶴影千年復且低 人皆社下無雙士 亭是湖南第一溪
如從仙分酬前債 更覩塵寰有此題 萍跡三生緣底事 回頭斜日夢魂迷
丁丑(1877)仲春 知縣 李益應
학남정의 시를 차운하다[次鶴南亭韻]
동네 입구에서 멀리 냇가 동서쪽에 지었으니,
학의 그림자가 천년 뒤에 다시 낮아졌노라.
사람은 모두 사하(社下)의 둘도 없는 선비들이고,
정자는 곧 호남에서 첫째가는 시냇가에 있노라.
선분(仙分)*을 따라 전날의 빚을 갚고 싶어서,
다시 진환(塵寰, 세상)을 바라보며 이 시를 쓰네.
삼생을 부평초같이 살아온 이유가 무엇이련가,
고개 돌려 지는 해 바라보니 몽혼(夢魂, 꿈속의 넋)이 희미하네.
정축년(1877) 중춘(仲春) 지현(知縣) 이익응(李益應)
*선분(仙分): 신선 인연〔仙分〕이란 신선이 살 만한 곳과의 인연을 말한다. 풍광이 뛰어난 곳을 구경할 수 있는 인연은 아무나 누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곳이 마치 전에 미리 약속이나 한 듯이 친숙하게 느껴진다는 말이다.
⑦
紅亭高出白雲西 海屐登登野日低 柳外鷄聲來遠店 松間鶴氣映淸溪
昔人盃酒何其壯 此地風烟盡入題 鬂髮蕭條歸未得 江南山水夢中迷
壬寅 暮春 晉陽人 小石 鄭彰鎔
붉은 정자가 백운 서쪽에 높게 솟았으니,
나막신 끌고 오르면 들판에 해가 낮노라.
버들 너머엔 닭소리가 먼 주막에서 들려오고,
솔숲 사이엔 학의 기개 맑은 시내에 비치네.
옛사람의 술자리는 어찌 그리 장(壯)하였나,
이 곳의 풍연(風煙)이 모두 시에 들어있네.
쓸쓸히 늙어가는 내 신세 돌아가지 못하니,
강남 땅의 산수(山水)가 꿈속에 아스라하네.
임인년(壬寅年)* 모춘(暮春) 진양인(晉陽人) 소석(小石) 정창용(鄭彰鎔)
*임인년(壬寅年)이 1902인지 1962년인지 분명하지 않다.
⑧
南飛鶴返杜陵西 千載一亭雲影低 隱若曲樑龍濟洞 翼如危檻鳥聲溪
同庚蘭稧多眞樂 雌甲桂癯且戱題 却向後人良用意 永今書盡醉塵迷
丁卯端陽 松隱 崔鳳燁
남쪽으로 날아간 학이 두릉(杜陵, 두원마을) 서쪽에 돌아오니,
천년에 하나뿐인 정자에 구름이 낮게 비치네.
숨은 듯한 들보엔 용이 동리(洞里)를 건너고,
나는 듯한 난간엔 새소리가 시냇가에 들리네.
동갑 친구들 계모임은 참다운 즐거움이 많고,
늙은 이 동갑내기도 서로 웃으며 시를 짓노라.
후세 사람들아 부디 마음을 선량하게 써서,
오늘 쓴 글 다하도록 아리송한 세상에 취하게나.
정묘년 단양(端陽) 송은(松隱) 최봉엽(崔鳳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