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향면 내금2길 70(능금리 806)에 위치한 반남 박씨 서당. 2000. 6. 23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59호로 지정되었다.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건물은 현재 반남 박씨 재실로 쓰이고 있다. 조선 중기 이곳에 정착한 박지영의 후손이 세운 서당이다. 현재 박순서가 소유·관리한다. 박지영의 조상은 원래 금산에 살았으나 임진왜란(1592) 때 박지영이 이곳에 온 후 후손이 정착하게 되었다. 지선당은 문중 자제의 교육을 위해 세운 것으로 지선당기에 의하면 영조 48년(1772)에 세웠다고 한다. 이곳에서 순조 16년(1816) 문과에 급제하고 공조참판에 오른 정재영과 헌종 6년(1840) 진사시에 합격한 박제대를 비롯하여 진사 5명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止善堂記】 堂以止善名 以其在明德峰下也 明德之峰 自德裕開延 西折而來 停峙於兩川合流之 望之巍然 卽之嚴然 如大人君子正色特立於千萬人之中 實羣山精氣之所鍾 而峰下 卽我 高祖墓也 我 高祖 自錦邑 來萬于峰之南崖 開荒剔翳 以奠所居 敦德勅行 以化缺俗 至今故老 稱道之不衰則 可想德業之盛而曾王考若並子 克世其家 大得鄕譽 曁我 先考從兄弟 以經學文行 蔚然擅名於京鄕 同 高祖子姓 漸次繁昌 今至三十餘家 此莫非世德積累之餘慶 而山川磅礡之精 亦不可謂無培植扶將之力也 不幸挽近 文學絶講 穀習無地 各家童 輩一任飽煖而優游 余獨墮先業 混愚俗 是懼一對諸宗咨嗟慨惋盖盟非一二捻矣 第 門稧中 有此略公物 余乃囑諸宗 要作滋殖訓學之需則 諸族 固信余之有志 許之專委 不問其出入故 八九年間 艱辛歛散 至買一斛茫良水田 先以其半 定置高祖墓祀之位 其一半則 欲作一門子姪敎成之資斧 而旣無堂室 何所藏修 乃自春初鳩材互募工匠 長少同約 日董其役 或身操版鍤 或手運棟槏 陾陾其築 殖殖其庭 凡兩閱月而功告訖 規模制度 雖未宏華 而敞軒煥房 足可容衆 卽迎師表 聚子姪而學之 伊吾向亮之殽戛然有紹先德績舊業之望 玆余所以日夕來聽 心悅誠喜者也 堂旣完成 適屆花春 書述四隣親知而落之 酒行 請命堂名於座上 諸益 咸曰 子之血誠 斷斷十載艱勤 莫非善心善事也 一爲奉先而報本 此止善也 二爲訓後而開蒙 亦止善也 大學三綱領 只是箇明德新民止至善而 子能以明善復初 修齊孝恭之方 獎就門內之後進則 是實明德新民之止於至善也 況此堂 旣在明德山之下則 堂名以止善 顧不亦偶合而襯着乎 余於是 惺然有悟 聲折而謝 卽以止善二字 扁之堂額 噫 凡我登堂而扶筴者 志古學明新之道 顧今日止善之名 於止知止 循序漸進 滌舊染如泥珠之淨拭 勉新德如寶鑑之還明 孜孜勉勉 不自己焉 則將見格致誠正修齊而 功極於道學矣 亦期立身揚名顯親而 光動門欄矣 誠不亦猗歟休哉 旣以是激勸羣童 因敍作堂之顚沫 庸爲是記焉. 時 崇禎 三壬辰 四月上澣 家老 相禎記. 戊子 二月 旬三 曾孫 性之 監 必之 書￿
    【지선당 기】 당을 지선(止善)으로 이름한 것은 명덕봉(明德峯)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명덕의 봉우리가 덕유(德裕)에서 내려와 서쪽으로 꺾어와서 두 시내 합류점에 우뚝 솟아있다. 바라보면 높고 다가가면 엄숙하여 대인 군자가 만인 속에 우뚝 서있는 듯 하니, 실로 여러 산의 정기가 뭉쳐있는데 봉의 아래는 곧 나의 고조 묘이다. 내 고조께서 금산(錦山)에서 봉의 남쪽 기슭에 오셔서 황무지를 개간하고 파헤쳐 터를 잡고 덕행을 닦고 모자란 풍속을 교화하였다. 이로 인하여 지금까지 고로(故老)의 칭송이 끊이지 않으니, 크신 덕업을 상상할 수 있다. 증조와 조고(祖考)께서 가풍을 잘 이어 지역의 칭찬을 크게 얻으셨으며, 내 선고(先考) 종형제에 와서는 경학문행(經學文行)으로 이름을 경향(京鄕) 간에 성하게 드러내시었다. 고조(高祖) 자손이 점차 번창하여 지금 삼십여 호에 이르니, 이는 세덕(世德)이 쌓여 남은 경사이며, 산천의 가득한 정기 또한 북돋아 붙들어준 힘이다. 불행히 근래에 와서 문학강론이 끊어지고 착한 풍습이 없어져 각 가정의 아이들이 하나같이 배부르고 따뜻하여 놀기만 하거늘, 내가 홀로 선업을 떨어뜨리고 우속(愚俗)에 섞임을 두려워하여 한번 일가들을 만난 자리에서 슬퍼하고 탄식하여 맹세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다음 문계(門稧, 종중의 계)에서 약간의 공물이 있기에, 내가 일가들에게 부탁하여 훈학(訓學)의 선비를 양성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일가들이 내 뜻을 굳게 믿고 허락하여 맡기고 곡식 이식(利殖)을 상관하지 않은 까닭에 8, 9년 간 어렵게 길러 10말 짜리 넓고 좋은 논을 사기에 이르렀다. 먼저 그 절반으로 고조 묘사(墓祀) 위토(位土)를 정하고, 반은 종중의 자질(子姪)을 가르칠 땔감 밑천으로 했으나, 집이 없으니 어디에서 공부를 하리요? 이에 봄부터 처음으로 재물을 모아 서로 공장(工匠)을 불러 어른 아이가 함께 약속하여 날마다 감독하며, 혹 몸소 흙손과 가래를 잡고 혹 손으로 재목을 운반하여 소리내어 쌓은 담장하며 반듯한 그 뜰이 두 달을 지나 공을 마치니, 규모와 제도는 비록 크고 화려하지 못하지만 넓은 창과 밝은 방이 족히 여러 사람을 용납할 만하다. 곧 스승을 맞고 자질(子姪)을 모아 배우게 하니, 글 읽는 소리 낭랑하게 어울려 선덕을 잇고 구업을 이룰 수 있는 희망이 있으니, 이것이 내가 밤낮으로 와서 듣고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이다. 당이 완성되니 때마침 꽃피는 봄이라, 이웃 친지들을 초청하여 낙성하고 술잔이 들자 좌상에 이름을 물었다. 벗들이 모두 말하기를, “자네의 혈성(血誠) 단단한 10년 고생은 모두 착한 마음이요, 착한 일이다. 첫째 조상을 받들어 근본에 보답하니 이는 선(善)에 그침이요, 둘째 후손을 가르쳐 몽매함을 깨우치니 또한 선에 그침이다. 대학 삼강령(三綱領)이 명덕(明德) 신민(新民) 지어지선(止於至善)인데, 자네가 능히 선을 밝히고 본성을 회복하며 수신제가(修身齊家)하고 효공(孝恭)하는 방법으로 종중 안의 후진을 장려하니, 이는 실로 명덕(明德) 신민(新民)의 지선(至善)에 그침이다. 하물며 이 집이 이미 명덕산 아래에 있으니 지선(止善)으로 이름한 것이 돌아보건대, 우연히 합하고 가까이 다가선 것이 아닌가 한다.” 내 이에 똑똑히 깨달아 소리내어 사례하고 곧 지선(止善) 두 글자를 당액(堂額)에 걸었다. 무릇 우리 당에 올라 책을 잡는 이는 고학(古學) 명선(明善)의 도(道)에 뜻을 두고 금일 지선(止善)의 이름을 돌아보아 그칠 데에 그칠 줄 알아서 차례를 따라 점진하여 옛 더러움 씻기를 진흙 속 구슬을 깨끗이 씻듯 하고, 신덕(新德) 힘쓰기를 좋은 거울이 다시 밝아지듯 하여 부지런하고 힘써서 스스로 그치지 않는다면, 장차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하여 도학(道學)에 공(功)의 극치를 이룰 것이며, 입신양명하여 어버이를 나타나게 하여 가문에 광채가 동하게 될 것이니, 또한 성하고 아름답지 않겠는가! 이것으로 아이들을 격려하고 따라서 집 지은 전말을 펴서 기문(記文)을 쓰노라. 때 숭정 삼인진(三壬辰, 영조 48, 1772) 4월 선보름에 문중 늙은이 상정(相禎)은 기문을 짓고, 무자(戊子, 고종 25, 1888) 2월 13일 증손 성지(性之)가 감수하여 필지(必之)가 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