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운면 반송리 359-2 마을 앞 천변에 위치한 정자. 학남정과 나란히 서 있는 개안정은 상량문을 보아 1896년에 건립되었는데, 그 후 여러 번 중수하였다. 건물은 사모 지붕으로 정면2칸, 측면, 2칸의 벽체 없는 무실(無室)정자이다. 홑처마집이며 서까래와 기둥에는 석간주칠을 하였고 마구리는 흰색으로 도채하였다. 지붕의 기와는 전통 기와를 사용하였고 서까래와 기둥, 창방, 중인방, 하인방 등은 석간주로 칠하였다. 또한 서까래 마구리는 흰색으로 칠하였고 양 우주의 주초석은 가공 원형초석을 사용하였고 건물 양 측면의 중앙 기둥은 그대로 기단 위에 놓았다. 배면 쪽에 주초석이 하나 남아 있어서 수리할 당시에 잘못 계산하였거나 여분의 초석을 더 만들어두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루는 전통 우물 마루가 아닌 일본식 장마루로 대체되었고 니스칠이 된 흔적이 여기저기 보인다. 정자 안에는 박연창(朴淵昌)이 쓴 ‘개안정유사’ 판액(板額)과 ‘개안정상량문’ 판액(板額)이 걸려 있다.

    【開眼亭遺事】 鎭安縣治南三十里 有一勝區 乃盤松村也. 村前有溪 溪之源 出於八公山 縈廻于莘岩 岩勢磅磚 或聳或坎 仍作小湖 是乃濟龍江 以蟾津江上流也 江之畔 千年巨木鬱鬱蒼蒼 胸圍六抱 有若神明之威 二柱喬松 如盤如盖 嫗蹇佇立 有若丈夫之像 中有開眼亭 寔以供村叟杖屨之所以仍構者也 而遠呑白馬八公之山色 平揖銀河濟龍之江瀨 窮杜陵吉古平野之目 聞梧井梅山之香 眞可謂 騷人墨客之解 錦囊而吐 瓊琚之處也 時在駬南堂朴先生之 移京歸鄕 潛究性理之丙申年間 以 任 鎭 長 三郡 縣監之 互相存問 馬耳之南 復見君子云 而每期于此 或辯郡治做去觴咏 因爲年例事 板揭上樑文 卽任實倅 趙蕉田之所述也 南遊文章詞客 四時不絶 於是乎 斯亭之繁華 登鶴樓鳳坮矣 一自庚戌國恥後 世降俗弛 君子隱退 偏作村丁避暑之處 而額與文 板卽被島夷之所侵 兼無亭名之考證 而閒散無涯矣 至于庚申年間 村論歸一 而重修一新 然 未揭者 是額字與文板 恒塊于中者 多年就中 最可愛惜者 有二 是巨木喬松也 往年春 喬松一株 胸剖而枝葉凋零 是年六月二十八日午前十時三十分 天無風 地無揚塵而平穩日氣也 喞喞有聲而巨木半身 部折而倒臥 此由何以然歟 松之樹齡 三百年 木之樹齡 一千年 雖曰植物學者之辯 然 此喬松之在世 果三百年 巨木之在世 果一千年歟 噫 古人所謂死不可復生 折不可復續 果天壽 奈何 矧可愛惜也哉 與以村老之一登此避暑休息而坐 舍第淵喆君 四從姪昌燮君 與內戚孫姜君大沃 斂膝而請曰 盤松 卽是吾村名之冠 巨木 卽是吾村設基之原 喬木不可以不敬重 丁戊兩年 俱爲枯折 實吾村氓之率皆 嗟惜事也 不可以泯滅其由 書以本末 幸以補吾村史 而多年未揭之 開眼亭額字及上樑文 俱爲揭板之地 是吾村上下歸一之論 老昏中 悚惶無比 然 以副吾擧村之望云 故 余亦同感 不以不文辭 欣然而諾 以書其槪如右而額字 卽 自書 文 卽 索出於自家藏書中 抄而揭之 以補 後日之考證焉 歲 戊申(1968) 秋 七月 旣望 密陽 朴淵昌 書
    【개안정 유사】 진안 소재지 남쪽 30리에 경치 좋은 곳이 하나 있으니, 반송촌이다. 마을 앞에 시내가 있으니 수원이 팔공산에서 나와 신암에 감도는데 바위형세가 가득하여 혹 솟기도 하고 혹 파이기도 하여 작은 호수를 만들었으니, 이곳이 제룡강이요, 섬진강 상류가 된다. 강가에 천년거목이 울울창창하고 둘레가 여섯 아름이나 되니 신명의 위엄이 있는 듯하고, 두 그루 높은 소나무가 서린 듯 덮은 듯, 할미가 절름거리며 오래 서 있는 듯, 혹은 장부의 형상이 있는 듯 하다. 그 가운데 개안정이 있으니 이는 마을 어른들께서 집을 짓도록 제공한 것이다. 멀리 백마산과 팔공산의 산색을 머금고 평평히 은하 제룡의 강 물결을 굽어보면서 궁두능길(窮杜陵吉, 주변 지명) 옛 평야의 트인 곳에 오정 매산(梧井梅山)의 향기를 들으니, 참으로 문인묵객이 비단 주머니를 풀어 아름다운 옥을 토해 내는 곳이라 할만하다. 이남당(駬南堂) 박 선생이 서울을 떠나 귀향하여 성리학을 잠구(潛究)하던 병신(丙申, 1896)년간에 때맞춰 임실·진안·장수의 3군 현감이 서로 문안을 드렸다. 마이산 남쪽에서 다시 군자를 보겠다고 하면서 매양 이곳에 모여 혹 군정을 변론하기도 하고 술잔을 들고 시 읊는 것을 실행하여 연례사를 삼아 상량문을 판갈하니, 곧 임실 원 조초전(趙蕉田, 당시 임실군수 趙奎夏의 아호)이 지은 것이다. 남으로 노니는 문장사객이 사계절 끊이지 않아 이에 정자의 번화함이 황학루와 봉황대 만큼 되더니, 경술국치 이후로 세태는 타락하고, 풍속은 해이해져 군자들은 숨어버리고, 마을 청년들의 피서하는 곳으로 되어 버렸다. 이에 판액(板額)과 문판은 곧 일제가 침탈하니 정자 이름의 고증도 없어져 스산하기 이를 데 없다. 경신년간에 이르러 마을 의논이 하나로 돌아가 중수하여 일신하였으나, 액자와 문판을 걸지 못하여 항시 가슴에 뭉클한지 여러 해가 되는 가운데에도 가장 애석한 것이 둘 있으니 거목과 반송이다. 지난해 봄, 반송 한 주의 가슴이 쪼개지고 지엽이 말라 떨어지더니, 그 해 6월 28일 오전 10시 30분에 하늘에 바람도 없고 땅에 먼지도 일지 않았는데 찍-찍 소리가 나면서 거목 반신이 쪼개져 꺾어졌으니 이 무슨 이유인가? 송의 수령이 5백년이고 목의 수령이 1천년이라 한 것은 식물학자의 이야기라 하지만, 이 반송이 과연 삼 백년을 살았으며 거목이 과연 일천 년을 살았는가? 아! 옛사람이 이르기를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 못하고 꺾어지면 다시 이을 수 없는 것이라 했으니, 과연 천수에 어찌하리오! 애석한 일이로다. 촌로와 더불어 한번 여기에 올라 피서하면서 쉬고 앉았는데, 사제(舍第) 연철(淵喆)과 사종질(四從姪) 창섭(昌燮)이 내숙손(內戚孫) 강대옥(姜大沃)과 더불어 무릎 꿇고 청하기를, “반송은 곧 우리 동네 이름의 머리요, 거목은 곧 우리 동네 터를 열게된 근원이니, 경중(敬重)히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무(丁戊, 1967-1968) 양년에 함께 마르고 꺾어졌으니, 실로 우리 동민이 다 함께 슬퍼하는 일입니다. 그 사유를 빠뜨릴 수 없으니 본말을 써서 우리 동네 역사를 보존해야 하는데, 여러 해를 걸지 못했으니 개안정 액자와 상량문을 함께 게판하는 것이 우리 동네 상하의 한 뜻입니다. 노혼 중에 황송하기 그지없지만 우리 온 동네의 바라는 바를 들어주시오” 하기 때문에 나 또한 동감이라 글 못함을 사양치 못하고 기쁘게 허락하여 그 줄거리를 우와 같이 쓰니, 액자는 곧 내가 썼고 글은 내 집 장서 중에서 찾아내어 써서 걸어, 후일의 고증에 도움을 주고자 하노라. 무신년(1968) 7월 16일에 밀양 박연창이 쓰다.

    【開眼亭上樑文】 (□□은 판독불능 자) 簿書叢裡抽身出 欲察畝□□*艱難 雲水光中洗眼來 忽有亭□□蕭灑 翼然駿矚 足以暢情 念邑基處四塞深□之區 而民居無一片爽□之所 八公之螺鬟 隐若烟嵐 聳萬古之觀瞻 雙尖之馬耳 屹如風景 作一縣之形勝 奈旱澇項背之相継 而接濟鼻眼之莫開 受重瞳分憂之貴 寧忽自我民視也 顧四面被荒之處 莫如於吾身見之 於焉二東面行尋 不覺一隻眼驚拭 幾千疂雲屏好萊峰峨峨 六七里水聲聞莘谿 灾分三等之列 行遍一邑之中 嗟溢目之有憂 歎暢懷之無暇 蔀屋之疾苦方切若癏在躳 草堂之顔色忽生如瞽得目 心勞政拙惱爾銅章之虛縻 眼忽氣舒完如金箆之自刮 喜名區之獨擅 問主人兮爲誰 山居之耕鑿入眸禾麻菽麥 村秀之誦讀洋耳禮樂詩書 夫何濟龍之肇名 宜有模象之新號 脑襟爽豁那禁長在目之思 體勢淸閒允爲可捿身之地 思蒿目而幾惱 睇翠眉而忽凝 土肥泉甘地得人而尤美 峰迴路轉天教我而遍看 爰改二字 用助六郞. 兒郞偉抛樑東 眼底村閭東復東 骨秀神淸如夢覺 遅遅紅日照牎東. 兒郞偉抛樑西 黃雲滿眼大田西 華山灝氣如藍碧 遥望長安日下西. 兒郞偉抛樑南 蒼蒼上耳面其南 源頭活水淸如許 瀉出两峰杜苑南. 兒郞偉抛樑北 睡僊遥對山之北 石温處士今何居 悵望水南與水北. 兒郞偉抛樑上 榱角逈臨飛鳥上 髙處騁眸神忽驚. 依然身人瓊楼上 兒郞偉抛樑下 餙躳捿息於其下 欄頭百尺闢林霏 垤穴岈洼袵席下. 伏願上樑之後 亭額載新 石齒不老 對此云胡不樂吾心亦凉 望之蔚然而深子居何陋 名焉兹而志喜泉石居然 觀者慘兮忘歸水竹據了 歲 丙申(1896) 趙蕉田.
    【개안정 상량문】 바쁜 고을 업무에서 빠져 나와 농사의 상황을 살피려 하였는데, 빼어난 풍광을 보며 눈을 씻고 왔더니 홀연히 시원한 정자가 있구나. 나는 듯이 우뚝한 모습, 가슴을 씻어 내는구나. 이곳은 사방이 막힌 궁벽한 고을이어서, 어떤 마을에도 시원스레 터진 곳이 없다. 이내 속에 우뚝 늘어선 팔공산은 만고의 자랑이고, 풍경처럼 뽀족한 두 봉우리 마이산은 온 고을의 승경이지만, 가뭄과 장마가 이어져서, 눈코 뜰 새 없이 구제하기 바쁘니, 임금님과 수령처럼 존귀한 사람이라도 하늘은 백성들이 보는 대로 본다는 것을 어찌 소홀히 하겠는가. 사방의 재해를 당한 곳을 돌보는 것은 내가 몸소 보는 것이 제일이다. 이에 이동면(二東面, 지금의 백운면 일부지역)을 순행하다가, 나도 모르게 놀라 눈을 비비고 바라보네. 수천 겹의 구름 병풍에 싸인 내동산의 높은 모습, 6, 7리까지 물소리 들리는 신암리 계곡의 시내물, 재해(災害)는 3등급으로 하고, 온 고을을 다 순행해 보니, 눈에 근심이 가득한 것을 탄식하고, 회포를 풀 여가 없음을 슬퍼하게 되도다. 내 몸에 병이 있는 듯이 백성들의 고통을 절실히 느껴야, 소경이 눈을 뜨듯이 초당(草堂)의 안색이 활짝 펴지는 법이다. 마음으로는 애를 썼으나 정사(政事)가 졸렬하여 군수 자리 헛되이 차지한 것이 괴로웠는데, 갑자기 눈에 총기가 퍼지며 금빗[金篦]으로 눈곱을 긁어내는 듯하다. 명승을 독차지한 것을 기뻐하며, 주인이 누구인지 물어 보네. 산촌에 일군 전답에는 벼, 삼(麻), 콩, 보리 등이 보이고, 시골 수재가 글을 읽으니 예악(禮樂) 시서(詩書)가 귀에 가득하다. 제룡(濟龍)이란 명칭이 어찌하여 유래했나, 마땅히 이것저것 참조하여 새 이름을 지어야겠다.* 흉금이 상쾌하니 길이 음미하고픈 마음 어찌 하겠나. 체세(體勢)가 청한(淸閒)하니 충분히 깃들 만한 곳이로다. 세상의 환란 생각하면 근심이 쌓여, 눈썹을 찌푸리게 된다. 물 좋고 기름진 땅 적임자가 있어야 더욱 아름답고, 봉우리들 사이로 굽은 길 하늘이 다 보게 해 준다네. 이에 두 글자를 고쳐서* 대들보 세우는 사람들을 돕는다.
    어기영차! 대들보 동쪽에 던지자![兒郞偉抛樑東]* 눈 아래 시골 마을 동쪽의 동쪽, 빼어난 모습 맑은 정신 꿈에서 깬 듯, 더디 뜨는 붉은 해 동창을 비추네. / 어기영차! 대들보 서쪽에 던지자! 황운(黃雲)에 서쪽 대전(大田, 동창들)이 눈에 가득하여라. 화산(華山, 내동산을 가리키는 듯)의 넓은 기운이 푸르고, 멀리 보이는 長安에 해가 서쪽으로 지도다. / 어기영차! 대들보 남쪽에 던지자! 푸르디 푸른 상이암(上耳庵)이 남쪽으로 향했구나. 지극히 맑은 샘물이 솟아 나오고, 두원(杜苑, 반송리의 마을)의 남쪽에 두 봉우리(성수산)를 뿜어내었구나. / 어기영차! 대들보 북쪽에 던지자! 수선루(睡僊樓)가 멀리 산의 북쪽에서 마주보고, 석온처사(石温處士, 미상)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나, 물길 따라 여기저기 창망히 바라보네. / 어기영차! 대들보 위쪽에 던지자! 서까래 쭉 뻗은 곳에 새가 날아들고, 높은 곳으로 눈을 돌리니 정신이 번쩍 드는데, 의연(依然)히 이 내 몸은 경루(瓊樓) 위에 있구나. / 어기영차! 대들보 아래쪽에 던지자! 몸을 단장하고 그 아래 들어가니, 백 척의 난간 앞에 이내 서린 숲이 열리네, 임석 아래에 개밋둑이 우묵하도다. / 삼가 바라건대 상량을 한 뒤에 정자의 판액(板額)이 산뜻해져서 돌처럼 늙지 않아라. 이 정자를 대하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내 마음도 시원하고, 바라보니 우뚝하고 빼어나니 그대 거처 어찌 누추하랴. 이름을 짓고 나니 마음이 기쁘고 천석(泉石)이 반짝반짝하고, 바라보는 이는 날이 어둡도록 돌아가지 못하고 수죽(水竹)에 묻히기를 바라노라. 歲 丙申(1896) 조초전(趙蕉田, 당시 임실군수 趙奎夏의 아호)
    *제룡(濟龍)이란 천(川) 이름의 유래가 모호(模糊)한 것에 대한 자문(自問)인 듯.
    *당시 주변에서 정자이름을 제룡정(濟龍亭)으로 정했던 모양인데 개안정(開眼亭)으로 바꾼 사실을 말하는 듯 하다.
    *아랑위(阿郎偉)는 여럿이 힘을 모을 때 쓰는 감탄사 ‘어기영차’를 한문으로 표현한 글이고 포량동(抛樑東)은 ‘대들보 동쪽에 던지다’이다. 상량식을 할 때 만두나 떡 같은 음식을 사방으로 던지는 관습에서 유래한 말이다.
  • 백운면 임진로 1080[남계리 234]에 있는 정자. 국도 30호선 백운교 옆에 자리한 정자로 단기 4300(1967년)년 정미년 5월 3일 상량하였다. 백운면에 거주하는 경술생(1910년생) 동갑계원 25명이 건립하였다. 당시 계쌀 100가마를 들였으며 25명 계원의 명단이 경우정에 판액으로 걸려있다. 계원들은 모두 별세하고 그 자녀들이 계를 잇고 있다. 현재 백운에 10여명의 계원들이 거주한다. 정자에는 정귀영(鄭貴泳)이 쓴 기문과 계원들의 성명을 기재한 판액(板額)이 걸려있다.

    【庚友亭記】 鎭安之南, 南溪德峴之間, 有一小崗而其後大路, 直通全州市. 客車貨轍, 晝宵連續, 譁然有城府之物態. 前有淸溪, 流出十餘里, 有沼有淵, 浴斯可宜, 比若曾點之詠歸. 論之四圍, 仙閣仙人两峰, 逺近在東, 可占神仙之窟宅. 萊東山岳, 嶄嶄在西, 彷髴蓬萊仙遊徃來之跡. 地接雲水, 群山羅列南方, 如見錦繡奇花之妙. 馬耳筆峰, 屹然北立, 宛若文明之氣像. 崗之畔, 翼然有佇立者, 庚友亭也. 世皆楼亭之淸香淸趣而爲稱者, 不爲不多, 奚獨曰庚友也? 惟我庚戍同庚, 每佳節良辰, 會集崗山片, 致酒賦詩, 歡然談笑, 盡日暮歸, 仍成契案, 名之曰庚友契. 友也者, 友其德也. 千善萬行, 莫非以德爲最, 而外何他求? 亭亦契中所以建, 而揭楣顔庚友亭者, 以其然也.亭旣成, 同庚諸君子, 願有其記於貴泳, 顧此拙工, 累辭大匠之手, 而終是不獲, 恐未免覧者之嘲笑也. 噫! 方此世道彜倫掃地, 而朋友有信, 亦五倫之一也. 固守友誼者, 盛莫盛焉. 非徒會友遊亭, 呼酒賦詩爲能事, 足以責善輔仁之道, 爲法於當時, 則石交之情, 斯亭之名, 將流芳之無限矣. 以契以亭, 善始善終, 雖是契中僉彦之力, 特梁德隐在炯, 崔溪隐龍日, 崔雲岡峻泰, 林隐樵永春, 尸其事者也. 大韓光復後戊申端午節, 東萊鄭貴泳記.
    【풀이】 진안(鎭安)의 남쪽 남계(南溪)와 덕현(德峴) 사이에 작은 산등성이가 하나 있는데 그 뒤쪽의 큰 길은 전주시(全州市)와 직통(直通)하므로 객차와 화물차가 밤낮으로 계속 이어져서 떠들썩하게 성부(城府)의 물태(物態)가 있다. 그 앞에 맑은 시냇물이 있어 10여 리(里)를 흘러 나오는데 소(沼)도 있고 연(淵)도 있어 목욕을 하기에도 좋으니, 비교하자면 증점(曾點)이 시를 읊으며 집에 돌아가던 곳*과 같다고 하겠다. 사방 주위를 말하자면, 선각봉(仙閣峰)과 선인봉(仙人峰) 두 봉우리가 동쪽의 원근(遠近)에 있어서 신선(神仙)의 굴택(窟宅)을 점유할 수 있고 내동(萊東) 산악(山岳)이 서쪽에 뾰족하게 있어서 봉래산(蓬萊山)의 선유(仙遊)를 방불하게 한다. 왕래하는 자취는 땅이 운수(雲水 임실(任實)을 말함)와 접하였고 여러 산들이 벌여 있다. 남쪽은 마치 수놓은 비단과 기묘한 꽃들을 보는 듯하고 마이산(馬耳山)의 필봉(筆峰)이 우뚝하게 북쪽에 서있어서 영락없이 문명(文明)의 기상(氣像)과 같다. 산등성이 옆에 날아갈 듯이 우두커니 서있는 것이 경우정(庚友亭)이다. 세상의 모든 누정(樓亭)이 청향(淸香)이나 청취(淸趣)를 호칭으로 삼은 것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니로되, 어째서 유독 ‘경우(庚友)’라고 하였을까. 생각건대 우리 경술년(庚戌年) 동갑 친구들이 아름다운 계절의 날씨가 좋은 때에 산등성이 한쪽에 모여서 술도 마시고 시도 읊으면서 즐겁게 담소(談笑)하다가 해가 다하면 저물녘에 돌아오곤 하였는데 그대로 계안(契案)을 만들어 이름을 경우계(庚友契)라고 하였으니 벗이라는 것은 그 덕(德)을 벗하는 것이다. 천만 가지의 선행(善行)이 덕을 가장 높은 것으로 삼지 않는 것이 없으니 그 밖에 무엇을 구하겠는가. 정자 역시 계중(契中)이 건립해서 현판에 계우정이라고 내걸은 것은 그러한 까닭인 것이다. 정자를 만들고 나자 나이가 같은 여러 군자들이 나에게 기문(記文)을 쓰기를 원하였는데, 나를 돌아보매 솜씨가 변변찮아서 글을 잘 짓는 사람에게 누차 사양하였으나 끝내 그렇게 되지 못하였으니 보는 사람들이 비웃는 것을 면하지 못할 듯하다. 아, 바야흐로 지금은 세상 도덕과 인륜이 땅바닥을 쓸어 없앤 듯이 모조리 사라졌는데 붕우유신(朋友有信)도 또한 오륜(五倫)의 하나이니, 우의(友誼)를 굳게 지키는 것은 참으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일이다. 한갓 벗들을 모아 정자에서 놀면서 술을 부르고 시를 읊는 것만 능사로 삼지 아니하고 족히 책선(責善)하고 보인(輔仁)하는 도리로써 당시에 본보기가 되고 있으니 돌처럼 단단한 우정과 이 정자의 이름이 장차 무한토록 아름다운 향기를 전하게 될 것이다. 계(契)를 보거나 정자를 봐서는 선(善)하게 시작하고 선하게 마무리한 것이 비록 계중의 여러 선비들의 힘으로 만들어졌으나 특별히 덕은(德隱) 양재형(梁在炯), 계은(溪隱) 최용일(崔龍日), 운강(雲崗) 최준태(崔峻泰), 은초(隱樵) 임영춘(林永春)이 그 일을 주관한 사람들이다. 대한(大韓)이 광복(光復)한 뒤 무신년(戊申年, 1968) 단오절(端午節)에 동래(東萊) 정귀영(鄭貴泳)이 기문을 쓰다.
    *증점(曾點)이……돌아가던 곳 : 공자(孔子) 앞에서 여러 제자들이 각기 제 뜻을 말할 때 증점(曾點)이 남다르게 술회(述懷)하여 공자의 동감(同感)을 얻은 말. 『논어』〈선진(先進)〉편에 의하면, “늦은 봄에 봄철 옷이 만들어지면 어린애 6-7명을 데리고 함께 기수에 가서 목욕하고 무에 가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며 돌아오리라.”고 하였다고 한다.
  • 동향면 신송리 774-1, 고무정마을 큰길가 건너편에 있는 정자. 2016. 12. 28 진안군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마을사람들이 1966년(丙午) 고무정 마을 앞에 건립하였고, 1987년에 중수하였다가 다시 2016년에 중수하였다. 고무정이란 이름은 이 정자의 동쪽에 선인봉(仙人峰), 남쪽에 옥녀봉(玉女峰)이 있고, 두 봉우리 사이에 고봉(鼓峰)이 위치해 있고, 북쪽에 무봉(舞峰)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곳에 정자가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 한다. 마을 이름도 이 정자 이름에서 유래하여 붙여지게 되었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정자 건축이다. 평평한 대지에 자연석 덤벙주초를 놓은 다음 두리기둥을 세우고 창방으로 결구한 다음 지붕을 얹었다. 기둥 상부는 주두를 얹었으며 곡이진 대들보를 단변 방향으로 걸치고 그 위에서 충량을 직각 방향으로 맞대어 걸었다. 기둥 상부 두공은 끝부분을 직각으로 자른 직절 초익공 양식으로 특별한 조각 없이 소박하게 꾸몄다. 추녀 쪽 서까래는 평연에 가까운 말굽 서까래형으로 걸고 있으며 기와는 암수 일체식 시멘트 기와로 올렸다. 내부 바닥은 우물 마루를 깔았으나 근래에 개량한 것으로 보이고, 난간은 후대에 중수하면서 기대어 앉을 수 있도록 2단으로 설치하였다. 상부 천정은 대들보 위에 양 방향으로 충량을 걸고 대들보 위에 대공을 세운 다음 충량과 접하여 중앙부를 우물 천장으로 마무리하였다. 부재는 가칠 단청으로 마감하였다. 정자 안에는 성두봉(成斗奉)의 고무정기(鼓舞亭記)와 창립계원 23인의 명단과 1987년 중수계원 29명의 판액(板額)이 걸려 있다.

    【鼓舞亭記】 歲在丙午暮春 鼓舞亭居住諸賢 欲效蘭亭之遊 仍竪亭於仙人峰下 鼓峰之前 可謂 遠近勝景 獨占此亭也 仙人在東 玉女在南 鼓峰居中 舞峰在北 明山麗水 四面相照 玉女貴人左右端整 令人一見 不覺 鼓之舞之樂也 噫 謀成韻致之事業者 若非特志之士 不可也 晉陽人 姜鎬映 獨擔此役而晝宵靡懈 二個月餘乃告竣工 寔罕有之功也 洛城之日 余亦以請賓 參在座中 不勝欣感而妄擧蕪筆 以表鎬映之特志焉 丙午 四月 一日 逸雲 成斗奉 記
    【고무정 기】 병오년 늦은 봄에 고무정마을에 사는 제현(諸賢)이 정자를 지어 노닐고 싶어 선인봉 아래 고봉(鼓峯) 앞에 정자를 세웠으니 원근의 경치를 이곳에서 독점하고 있다 할 것이다. 선인(仙人)은 동쪽에 있고, 옥녀(玉女)는 남쪽에 있고, 고봉은 그 가운데, 무봉(舞峯)은 북쪽에 있어, 명산(明山) 여수(麗水)가 사면에서 마주하고 옥녀(玉女) 귀인(貴人)이 좌우(左右)에 단정(端正)하니 사람으로 하여금 얼핏 봐서는 고무(鼓舞)의 즐거움을 깨닫지 못하게 한다. 희(噫)라! 이런 운치 있는 일을 도모함에는 특지(特志)를 가진 사람이 없으면 못할 일이라, 진양인(晉陽人) 강호영(姜鎬映)이 이 역사(役事)를 홀로 맡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여 2개월 여만에 준공하게 되니 참으로 드문 공로라 할 것이다. 낙성일에 나 역시 초청해주어 좌중에 참석하였다가 즐거운 기분을 누르지 못하여 망령되이 거친 붓을 놀려 강호영의 특지를 드러내고자 한다. 병오(丙午, 1966)년 4월 1일에 일운(逸雲) 성두봉(成斗奉)은 기하노라.
  • 백운면 신암리 777 섬진강 상류 천변에 있는 정자. 전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지붕으로 백운면 출신 기사생(1929년) 계원들에 의해 1982년 건립되었다. 정자에는 ‘기우정기’와 ‘계원방명’이 동일한 판액에 기록되어 걸려있다.
  • 백운면 운교리 산66-1에 위치한 정자. 쌍계정에서 서남쪽으로 직선거리 200m지점 냇가 암벽 중간에 지어졌다. 건립연대는 자세하지 않으나 진양 하씨 오형제 호(灝), 선(璿), 립(氵昱,), 식(湜), 봉(㵯) 등이 조선 순조 때 정자 건너편에 있는 방화마을로 이사 온 뒤에 지었다고 하는데 상량에 의하면 1970년에 중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한 익공 건물이다. 콘크리트로 기초를 한 기단 위에 다음은 초석을 놓고 그 위에 원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에는 용두 모양의 익공을 올렸고 처마는 겹처마이다. 팔작지붕을 하였는데 상부는 구부러진 부재를 수직으로 엇갈아 놓은 후, 상부에 서까래를 올린 모임지붕의 형식이다. 이러한 형식은 원래 사모 지붕이거나 우진각 지붕이었던 것을 후대에 팔작지붕으로 개조한 결과로 본다. 바닥은 우물 마루를 깔았다. 정자에는 하천수(河千秀)가 찬한 만취정 중건기(晩趣亭重建記)와 진양 하씨의 오형제가 지은 제 만취정(題晩趣亭) 판액(板額)이 걸려있다.

    【晩趣亭重建記】 二間小楼立於荒穢之地 而名流千秋者 由其文學人所作成故也 以若山水之美亭子之傑乃五君子 勞心工役 意匠爲一生盤桓之所者乎信矣 賢人所過山川精彩也 恭惟我 從先祖 獨樂堂諱灝 二樂堂諱濬 湛樂堂諱氵昱 友樂堂諱湜 和樂堂諱㵯 五昆季公 是文祖敬齋先生十二世孫而鳳村翁之肖子鍾山嶽亭毒之氣應神翁遺符之運 生而風彩秀發才諝卓越 兄孝而弟孝 冬氷得魚旱苗得雨 十指注血喪債得蓉 廬墓三年 村疫退神 有營邑繡衣吏禮之褒題 而無綽楔之典以陽不照盆爲識者之恨 兄學而弟 學博究經傳 淹貫百家 切磋琢磨 鞭策箴規 相期於進修克復 兄難弟難 以同氣而兼師友 早遊公車 不得於有司 則懷眞潛晦於山水處爰起一亭子 是古人橧巢之意 而顔以晩趣 卽托晩年幽趣者也 於是乎 藏修遊息頣餋精神磨礱道義益造高明着力 於古聖賢所樂之地實遯世無㦖之君子 世之論人者 重朝而輕野 以皮相而失實際也 且湛樂公之配 三宜堂 金海金氏 行篤內則允爲巾幗中師範 詩文贍敏 天機自動逈然 若鳳鳴鶴唳炫燿如錦貝珠玉 與唐夏侇氏 麗王氏 垺豈非間世之賢媛乎 噫 五賢霍然就晝休咎乗除亭不得獨存 只有遺墟之荒涼 東西冠帯之過於斯者 必式而起敬曰 山川草樹 芸芸職職之森羅萬像莫不被當日風韻而翼然 古亭便作雪瓜嗟惜而興懷不是尋常况乎 雲裔之深切於報本追逺之誠者乎 積營重建齊心合力 庀材蕫工因其舊制築而新之輪奐得宜侈儉適中可以爲名區 大觀徘徊瞻眺 一花一石 宛若平泉別庄 眼界昭曠 脑次爽豁如登周夫子 光風霽月之楼 慕賢之心油然而生 讀五賢之書 學五賢之行 軆念而實踐 以孝悌爲本忠信 爲用則 雖百世之逺而有親灸之感媺哉 僉宗之精誠 嘉謨可以光先而啓後 亦可以孤燭於昏衢五賢英靈 其將悅豫而洋洋在上矣 亭旣成讌飮而落之 後孫 相台 注容 責余記之 余以夏虫之語氷辭不得 謹書此以寓景仰之思 継之以詩曰, 昏衢乎燭是亭成 草若飛如精彩生 五祖弟兄留賸馥 千孫花樹盡衷誠 光風浮動至今在 霽月徘徊依舊明 一讀遺文一寓慕 愀然興感我心淸. 檀紀四千三百二年己酉重五. 宗後學 河千秀 謹記.
    【만취정중건기】 두 칸의 작은 누대가 황량한 곳에 서 있는데도 천년토록 명성을 유지한 것은 학문한 사람이 지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산수(山水)에 있는 이처럼 걸출한 정자(亭子)는 바로 5군자(五君子)가 마음을 다하고 기교를 다하여 평생 동안 반환(盤桓)할 곳으로 삼은 것이니, 참으로 현인(賢人)이 사는 곳은 산천(山川)에 정채(精彩)가 생기는구나. 삼가 생각해 보건대, 우리 종선조(從先祖)이신 독락당(獨樂堂) 휘(諱) 호(灝), 이락당(二樂堂) 휘 준(濬), 담락당(湛樂堂) 휘 립(氵昱,), 우락당(友樂堂) 휘 식(湜), 화락당(和樂堂) 휘 봉(㵯) 다섯 형제공은 문조(文祖) 경재 선생(敬齋先生)의 12세손이자 봉촌옹(鳳村翁)의 초자(肖子)이시다. 산악이 길러 주는 기운을 모으고 신령이 부적으로 남긴 운명에 부응하여 태어나면서 풍채가 빼어나고 재주가 탁월하셨다. 형이 효도하면 아우들도 효도하여, 겨울 얼음 속에서 물고기를 얻었고 가뭄에 곡식이 마르면 비를 얻었으며 열 손가락을 잘라 병든 어버이에게 피를 먹이고 시묘(侍墓)를 3년 동안 하였고 마을에 역병이 돌자 신령이 물리쳤다. 감영과 고을, 어사와 이조 예조에서 포제(褒題)하였으나 작설(綽楔)하는 은전은 없었으니 임금의 은혜가 구석구석까지 미치지 못한 것을 식자들이 한탄하였다. 형이 학문을 하면 아우들도 학문을 하여, 경전(經傳)을 널리 탐구하고 제자백가를 통섭(通涉)하였으며 절차탁마(切磋琢磨)하고 채찍질하여 경계하며 진덕(進德)하고 수신(修身)하여 극기복례(克己復禮)하기를 서로 기약하였다. 그리하여 난형난제(難兄難弟)가 되어 동기(同氣)로서 사우(師友)를 겸하였다. 일찍이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는 못하였다. 그러자 지조를 품고 산수(山水)에 숨어 살면서 정자 하나를 지었으니 이것은 검소하게 산 옛사람들을 본받으려는 뜻이었다. 그리고는 편액을 만취(晩趣)라고 했는데 바로 만년의 그윽한 풍취를 기탁(寄託)한 것이었다. 이에 자나깨나 학업에 전념하면서 정신을 함양하고 도의(道義)를 연마하여 더욱 고명한 경지로 나아가 옛 성현이 즐기던 경지에 힘을 쏟았으니 실로 은둔하여 세상이 알아 주지 않아도 근심하지 않는 군자이셨다. 세상에서 사람에 대해 논하는 자들은 조정에 나간 사람을 중시하고 초야에 묻힌 사람을 가볍게 여기지만 이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가지고 평하는 것이지 실제를 놓친 것이다. 또한 담락공의 배필인 삼의당(三宜堂) 김해 김씨(金海金氏)는 여자로서의 법칙을 독실히 행하여 진실로 규문(閨門)의 사표(師表)가 되고 시문(詩文)에 능하고 천기(天機)가 저절로 발동하여 걸출하게 봉황이 울고 학이 우는 듯하며 찬란히 금패(錦貝)와 주옥(珠玉) 같았다. 당(唐)나라의 하후씨(夏候氏)나 고려의 왕씨(王氏)처럼 뛰어났으니 어찌 세상에 드문 어진 여자가 아니겠는가. 아, 다섯 현자가 쓸쓸히 돌아가시고 길흉화복이 스쳐가는 동안 정자도 홀로 남아 있지 못해서 옛 터만 황량하게 남아 있었지만 이곳을 지나는 동서(東西)의 관리들은 반드시 경의를 표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켜 말하기를, “산천의 초목과 끝없이 무성한 삼라만상이 당시의 풍치를 잃은 것이 없는데 우뚝하던 옛 정자는 눈밭에 남긴 기러기 발자국처럼 사라졌구나.” 하며 개탄하며 감회에 젖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으니 하물며 보본추원(報本追遠)의 마음이 깊고 간절한 먼 후손이야 말할 것도 없지 않겠는가. 중건(重建)을 계획하고 마음과 힘을 합하여 재목을 모으고 공사를 감독하여 옛날의 구조를 따라 새로 지으니 찬란하게 알맞게 되고 화려함과 검소함이 적절하고 알맞게 되어 이름난 지역의 큰 볼거리가 되었다. 주위를 배회하며 바라보면 꽃 한 송이 돌 하나가 뚜렷이 평천별장(平泉別庄)과 같고, 시야가 밝게 트이고 가슴이 상쾌하여 주부자(周夫子, 주돈이[周敦頤])의 광풍제월루(光風霽月樓)에 오른 것 같아서 현인을 연모하는 마음이 뭉클하게 생긴다. 다섯 현자의 글을 읽고 다섯 현자의 행실을 배워서 체념(體念)하고 실천하며, 효제(孝悌)를 근본으로 삼고 충신(忠信)을 행동으로 삼는다면 비록 백대(百代)가 지나더라도 직접 가르침을 받은 감동과 아름다움이 있게 될 것이다. 여러 종친의 정성과 아름다운 계획이 선조를 빛내고 후손을 계도할 것이니 이 또한 어두운 거리의 외로운 촛불이 될 것이고, 다섯 현인의 영롱한 영혼이 장차 기뻐하며 그 위에서 양양(洋洋)할 것이다. 정자가 완성되자 잔치하고 낙성하고서 후손인 상태(相台)와 주용(注容)이 나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였다. 내가 여름날의 벌레가 얼음에 대해 말하는 격이라며 사양하였으나 끝까지 부탁하므로 삼가 이렇게 써서 경앙(景仰)하는 마음을 표하고 이어서 시를 지어 붙인다. 어두운 거리에 이 정자 완성되니, / 풀잎이 나부끼듯 정채가 나도다. / 다섯 할아버지 형제 향기를 남기시고, / 나무에 핀 꼬처럼 많은 후손이 효성을 다했도다. / 맑은 바람은 지금도 불어오고, / 깨끗한 달빛 하늘에서 옛날처럼 밝도다. / 남기신 글 읽을 때마다 사모하는 마음 일어서, / 정색하며 감흥하며 내 마음 맑아지네. 단기 4302(1969)년 기유(己酉) 단오절 종후학(宗後學) 하천수(河千秀) 근기(謹記)

    【題晩趣亭】 茅屋成來小小邱 棄其煩雜取其幽 / 每尋四皓靑山麓 時訪三閭綠水洲 / 局上爭途消夏趣 花間共醉伴春遊 / 兄酬弟勸湛和翕 惟恨雙丸日夜流
    【풀이】 모옥(정자) 작고 작은 언덕에 지었으니, / 번잡함을 버리고 그윽함을 취했네. / 매번 푸른 산기슭에서 사호(四皓)*를 찾고, / 때마다 푸른 물가에서 삼려(三閭)*를 방문하네. / 바둑을 두며 여름의 흥취 삭이고, / 꽃 속에서 함께 취하며 봄놀이 함께하네. / 형제 서로 술을 권하며 화합하여 즐기는데. / 다만 총알처럼 빠른 세월이 한스럽다네.
    독락당(獨樂堂) 하호(河灝, 장남)
    *중국 진시황 때에 난리를 피하여 산시성(陝西省) 상산(商山)에 들어가서 숨은 네 사람. 동원공(東園公),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甪里先生), 기리계(綺里季)를 이른다. 호(皓)란 본래 희다는 뜻으로, 이들이 모두 눈썹과 수염이 흰 노인이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후세에 나이도 많고 덕도 높은 은사(隱士)를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삼려대부(三閭大夫)로 있다가 조정에서 쫓겨난 초(楚)나라 굴원(屈原)을 가리킨다. 그의 〈어부사(漁父辭)〉에 “세상은 모두 혼탁한데 나만 홀로 맑고, 사람들 모두가 취했는데 나만 혼자 깨었는지라, 그래서 조정에서 쫓겨났다.[擧世皆濁我獨淸 衆人皆醉我獨醒 是以見放]”는 말이 나온다.

    天慳地秘等閒邱 五弟兄同卜此幽 雲裏樵歌生碧峀 雨餘漁笛向芳洲
    評花品石隨時興 覓句呼樽暇日遊 世上榮枯都夢外 濯纓濯足俯淸流
    천지가 감추어 두어 등한히 여기던 언덕,
    오형제 함께하여 이 그윽한 곳에 자리 잡았네.
    구름 속 나무꾼 노랫소리 푸른 산에서 나오고,
    비 온 뒤 어부의 피리소리 아름다운 물가를 향하네.
    꽃과 경치를 품평하니 수시로 흥취가 솟고,
    시구 찾고 술잔 부르며 여가를 보내네.
    세상의 영고성쇠 모두 꿈밖이라,
    갓끈 씻고 발 씻으며* 청류 굽어보네.
    이락당(二樂堂) 하준(河濬, 둘째)
    *갓끈과 발을 물에 담가 씻는다는 뜻으로, 세속(世俗)에 얽매이지 않고 초탈(超脫)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함.

    峰回巖轉作閒邱 鬼護神藏最寂幽 太古溪山前赤壁 至今泉石後瀛洲
    烟花勝日賖樽醉 詩賦良宵伴月遊 㤼界浮生何事業 只將晩趣寄淸流
    봉우리 구비하고 바위 굴러 한가한 언덕 만들어,
    귀신 보호하고 감추어 가장 적막하고 그윽한 곳.
    태고의 시내와 산은 적벽의 앞이요,
    지금의 산천의 경치는 영주(瀛州)* 다음이라오.
    봄꽃 핀 아름다운 날 술동이 기울여 취하고,
    시 지으며 좋은 밤 달과 짝하여 노니네.
    속세의 덧없는 인생 무슨 일 하리오,
    다만 만취를 청류에 붙인다네.
    담락당(湛樂堂) 하립(河氵昱. 셋째)
    *삼신산(三神山)의 하나. 봉래(蓬萊), 영주(瀛洲), 방장(方丈)으로 신선이 산다는 곳.

    老石蒼松一小邱 隨兄隨弟卜居幽 隨雲採藥過長壁 伴月垂竿坐碧洲
    嫩柳新畵時盛會 淸詩白酒日娛遊 三千八百前頭在 脁朒何關缺隙流
    오래된 돌 푸른 소나무 작은 언덕에 한결 같은데,
    형제들 서로 따르며 그윽한 곳에 살 곳을 정하였네.
    구름 따라 긴 벼랑 지나 약초 캐고,
    달 짝하여 푸른 물가에 앉아 낚싯대 드리우네.
    버들잎 신록으로 새 그림 그릴 때에 성대히 모여,
    맑은 시 짓고 백주(소주) 마시며 하루 즐겁게 보내네.
    3천 8백개의 풍광 앞에 있는데,
    세월은 빗장을 풀고 어느 틈으로 흘렀는가?
    우락당(友樂堂) 하식(河湜, 넷째)

    遁世心情擇此邱 白雲深處碧山幽 時同樵客巖間路 更逐漁翁雨後洲
    酬酌香醪多興趣 敲椎佳句亦娛幽 前頭事業無窮在 那得挽回年矢流
    둔세의 심정으로 이 언덕을 택하였는데,
    흰 구름 깊은 곳 푸른 산 그윽한 곳이라네.
    때론 나뭇꾼과 바위 사이 길을 같이하고,
    또는 비온 뒤의 물가에서 늙은 어부를 따르네.
    향기로운 막걸리 서로 권해 흥취 돋우며,
    아름다운 시구 고심하며 그윽함을 즐긴다네.
    앞으로의 사업 무궁하게 있는데,
    화살처럼 흐르는 세월 어떻게 되돌릴까?
    화락당(和樂堂) 하봉(河㵯, 막내)
    순조 6년[1806] 병인 늦은봄 제하다(崇禎戊辰後四十九年丙寅暮春題)
  • 백운면 덕현리 봉서마을에서 북쪽으로 450m 거리 섬진강 천변 명마대(溟磨臺, 바위) 위에 있는 정자. 1975년에 세워졌다. 전면 2칸 측면 2칸의 골함석 팔작지붕이다. 명마(溟磨)라는 말은 사전에도 없고, 달리 쓰이는 용례(用例)로 없는 말이다. 굳이 글자 그대로 풀이한다면 명상(冥想)을 연마(練磨)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는 있다. 이 바위가 수십 인이 앉아 술잔을 돌릴 수도 있도 있을만큼 편편하여 인근(隣近)의 천렵(川獵) 장소로도 많이 이용된 곳이라 이곳을 선(禪, 명상)의 수행처로 삼자는 뜻에서 작명(作名)했는지 모른다. 또 하나는 이 바위가 개구리 모양 같대서 명와암(鳴蛙岩)이라고도 했다는데 명와암에서 명마암으로 바뀌어졌는지도 모른다. 이 바위 아래로 섬진강이 부딪혀 흐르므로 정자에 올라 음유(吟遊)하는 정취가 각별하다. 정자에는 전종하(全鍾廈)가 찬한 명마대기(溟磨臺記), 전태주(全太柱)가 술(述)한 명마대기(溟磨臺記), 崔涫錫, 全鍾廈, 梁仁權, 朴漢祚, 李漢喆, 金容哲 등 6인이 련(聯)하여 새긴 溟磨臺韻 판액, 李龍夏, 全炳浩, 丁南洙, 鄭昌根, 全永學, 全炳日 등 6인이 련(聯)하여 새긴 溟磨臺原韻 판액이 걸려있다. 명마계는 원산, 원운교 마을에서 서당을 함께 다녔던 구한영(具漢永), 전태주(全太柱), 유길준(劉吉俊), 정호현(丁浩鉉), 정봉성(鄭奉星), 전상권(全相權)과 더불어 전명석(全明錫), 전형석(全亨錫) 형제가 만든 계이다. 자녀들이 이를 기리기 위해 섬진강변 바위 위에 1975년 음력 6월 24일에 지었다. 정자 상량 당시 명마계원들 중 생존하던 분은 2인(전태주, 정호현)이었다고 한다. 해마다 자녀들이 상량일인 음력 6월 24일에 계모임을 갖고 정자를 청소한다.

    [[溟磨臺記]] 古今楼臺 盖取山水之景 而有名者也 白雲一境之水 瀉出萊東山下 洗去塵埃 沙明石白之間 兩崖蒼岩 星羅碁列盤據地勢 而一大魁岩 壓鎭流域 逈出空中 大水溟浪 未甞沉越 排流磨回 古稱溟磨臺者是也 上可坐数十人 回觴宴飮 而鳥鳴于山魚躍于水 有物外之樂 無不登臨 而翫賞焉 往在丁卯年間 地方名士 全明錫 全亨錫 昆季 與同硏 具漢永 全太柱 劉吉俊 丁浩鉉 鄭奉星 全相權甫 輔仁修稧 逐日風浴 浩然詠歸 以寓物外之志 題名溟磨 商量一亭而未就 太半逝去 具劉兩氏 離外不知其住 至今生存全太柱 丁浩鉉二翁 亦在老廢 而六家之賢胤 追慕父老之志 紹修遺稧 而立亭 以盡爲子之道 使人登臨 身若羽化 有不老更少之氣分 是亦爲善於若海之偸閒者也 族弟 永學 與同宗 炳浩 克勤蕫役亭旣成也 請余爲記以不文固辭 不獲而叙之 嵗乙卯(1975) 七月旣望 天安人 憂堂 全鍾廈 謹識
    【풀이】 고금의 누대(樓臺)는 대개 산수의 경치를 취해서 이름을 짓는다. 백운면 온 경내의 물이 쏟아져 나와 내동산 아래에서 세속의 진애(塵埃)를 씻어 내어 밝은 모래와 흰 돌이 양쪽 물가에 있고 창연한 바위가 하늘의 별처럼 바둑판의 돌처럼 늘어선 편편한 곳에 큰 바위 하나가 물길을 누르고 우뚝이 공중에 솟아 있다. 큰 물길이 어둑히 파도쳐도 일찍이 잠기거나 넘친 적이 없이 휘돌아 흐르며 바위를 갈며 돌아 흐르는 곳이 있으니 예부터 명마대(溟磨臺)라고 이르던 곳이 이곳이다. 바위 위에는 수십 인이 앉아 술잔을 돌리며 마실 수 있다. 산에 새가 울고 물에서 물고기가 뛰면 세상을 벗어난 즐거움이 있으니 그때마다 올라가서 경치를 감상하지 않은 적이 없다. 지난 정묘년간에 지방의 명사(名士)인 전명석(全明錫), 전형석(全亨錫) 형제가 동문(同文)인 구한영(具漢永), 전태주(全太柱), 유길준(劉吉俊), 정호현(丁浩鉉), 정봉성(鄭奉星), 전상권(全相權) 군과 함께 보인수계(輔仁修稧)*하여 날마다 바람을 쐬다가 호연(浩然)히 노래하며 돌아감*으로써 세상에서 벗어나려는 뜻을 빗대어 표현하려고 명마대라고 이름을 짓고 정자 하나를 세우려고 계획하였으나 미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뒤에 태반의 사람이 서거하고 구씨와 유씨는 외지로 나가 어디에 거주하는지 알지 못하고 지금 생존한 이는 전태주와 정호현 두 늙은이인데 이들 또한 늙어서 집안에만 있다. 여섯 집안의 어진 자손들이 부로(父老)의 뜻을 추모하고 옛날의 수계(修禊)를 이어가기 위해서 정자를 세워 자식 된 도리를 다하였다. 만일 그 정자에 올라 보면 몸이 마치 우화등선(羽化登仙)하는 것 같아서 늙지 않고 다시 젊어지는 기분이 있으니 이 또한 바다처럼 시원해지고 한가로워지는 기분이 든다. 집안의 아우 영학(永學)이 동종(同宗)인 병호(炳浩)와 애써 일을 감독하여 정자가 이미 완성되자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글을 잘하지 못한다고 고사(固辭)했으나 되지 않아 이와 같이 서술한다. 을묘(1975)년 7월 16일. 천안인 우당(憂堂) 전종하(全鍾廈) 근지(謹識)
    *보인 수계(輔仁修稧) : 보인은 ‘以友輔仁’을 줄인 말로 친구를 통해 나의 인을 돕게 한다, 나의 인을 향상시킨다는 뜻이고 수계는 물가에서 놀면서 불길한 재앙을 미리 막던 풍속으로 보통 삼월 삼일에 행하였는데 진나라 왕희지의 蘭亭 修稧의 고사가 유명하다. 여기서는 이를 본받은 것이다.
    *바람을 쐬다가 浩然히 노래하며 돌아감 : 논어 선진편에, 공자가 제자들에게 각자의 소원을 묻자 曾點이 대답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溟磨臺記】 蘭亭之修稧 石室之題名 古猶今而物外之世徜徉乎 山水之間 有遺蹟也 今我溟磨臺 白雲之勝地也 山高水長魚鳥之樂 沙明石白 風浴之趣 實有仙境之感 昔余八人 同塾之餘以朋友 輔仁之義 修稧題名 課日登臨 甞一亭 未得成就 世値滄桑 具劉兩家 離散於外 世遠人亡 而余與 丁浩鉉 相存 然在於老廃小復 作夢而齎恨者久矣 何幸靑少相謀修稧 告余立亭 不勝感喜 身在病廃 雖未登臨 庶幾無恨而叙實焉 嵗 乙卯 秋 七月 旣望 蘭汀 全太柱 述
    【풀이】 난정(蘭亭)의 수계(修禊)는 석실(石室)의 제명(題名)으로 고금(古今)에 세간(世間)을 떠나 산수(山水) 간에 노닌다는 유적(遺跡)이다. 이제 우리의 명마대(溟磨臺)는 백운면의 경승으로 산 높고 물 길어 새와 물고기가 맑은 모래 하얀 돌을 즐기고 풍욕(風浴)을 하는 실로 선경(仙境)인 감이 있다. 예전 나와 8인이 동문의 벗으로써 수계를 하여 정자를 지어 매일 올라가 즐기기로 했으나 (정자는) 아직 이루지 못하였다. 세월이 많이 흘러 구씨, 유씨 두 집은 외지로 나간 지 오래고, 세상은 오래되어 사람들은 죽어 없어져 나와 정호연(丁浩鉉) 두 사람만 남았다. 그러나 늙고 병들어 움직이기 힘들어 집에 들어앉아 과거 기억이나 반추하며 사는 지 오래 되었다. 다행히도 젊은 사람들이 서로 의론하여 수계를 하여 정자를 세우고 나에게 고하므로 기쁨을 이기지 못하겠다. 몸은 병들고 피폐하여 비록 (정자에) 오르지는 못하나마 바라건대 여한이 없도록 사실을 기술한다.
    을묘(1975)년 음7월 16일(旣望) 난정(蘭汀) 전태주(全太柱) 술회하다.

    [명마대 원운(溟磨臺原韻)]
    天然勝地建高臺 世愁可解琴三尺 蟾影徘徊鏡面開 生界惟存酒一盃
    喬岳怪岩山勢險 執杖徬徨看此景 淸川磯石水縈回 不知歲月老將來
    德山 李龍夏
    천연의 명승지에 높은 다락을 세우니,
    세상 근심 거문고 하나로 풀 수 있네.
    두꺼비 그림자 배회하니 수면이 열리고,
    생애는 오로지 술 한잔에 달려 있구나.
    뾰족한 산과 괴이한 바위 산세가 험하니,
    지팡이 짚고 서성이며 이 경치 바라보네.
    맑은 내의 낚시터에 물결이 휘감아 도니,
    세월이 늙어가는 것조차 아랑곳하지 않네.
    덕산(德山) 이용하(李龍夏)

    父老題名占此臺 騷客賦詩時覓句 相尋遺稧續修開 遊人載酒日傾盃
    地無越嶺山重疊 登臨亭上多新趣 岩不浸流水自回 惟願賔朋去復來
    池峯 全炳浩
    부로들이 이 누대 차지하여 이름 지으니,
    시인들이 시를 읊을 때에 싯구를 찾노라.
    남기신 계(禊)를 찾아 뒤이어 열고나니,
    나그네도 술을 싣고 와 날마다 기울이네.
    땅은 넘어야 할 재가 없고 산은 겹쳐서,
    정자 위에 올라보면 새로운 흥취가 많네.
    바위는 물속에 안 잠기고 물은 절로 도니,
    바라건대 벗과 손님들 갔다가 다시 오시게.
    지봉(池峯) 전병호(全炳浩)

    鳩財積年始起臺 雖喜合心終了役 幾家不肖協同開 惟寃共侍未獻盃
    千嶂翠峀環屛立 疑乎此地眞佳境 一曲淸溪抱棟回 繡轂銀鞍竸續來
    昌原后人 仁松 丁南洙
    여러 해 재물 모아 누대를 짓기 시작하여,
    기쁘게 합심하여 마침내 일을 끝마쳤네.
    몇 집안의 자식들이 협동하여 열었으나,
    함께 모시어 술잔 올리지 못함이 원통하네.
    수많은 산봉우리 병풍처럼 둘러 서 있으니,
    이 곳이 참말로 가경(佳境)인 줄 의심되네.
    한 구비 맑은 시내가 기둥을 껴안아 도니,
    멋지게 장식한 말과 가마가 앞다투어 오네.
    창원후인(昌原后人) 인송(仁松) 정남수(丁南洙)

    天作溟磨水上臺 折柳供吹長短笛 継承先志一亭開 逍風時醉数三盃
    遊魚逐絮潜還躍 境深村遠遊相好 白鳥驚人去復回 春夏全無客不來
    草溪 鄭昌根
    하늘이 물가에 명마대(溟磨臺)를 열었으니,
    버들가지 꺾어 주며 함께 피리를 부노라.
    선대의 뜻을 계승하여 정자를 지었나니,
    바람이 시원할 때 서너 잔 술에 취하노라.
    물고기는 버들개지 따라 잠겼다가 뛰어오르고,
    경치가 으슥하고 마을이 멀어서 놀기에 좋네.
    흰 새는 사람에게 놀라 날아갔다가 다시 오고,
    봄여름엔 오지 않는 길손이 하나도 없구나.
    초계(草溪) 정창근(鄭昌根)

    先人曾愛溟磨臺 溪翁日釣魚三首 風浴題名稧杜開 騷客時傾酒一盃
    僉後會同皆継蹟 今搆小亭無雨苦 兩家離散不知回 偸閒多士願相來
    雲田 全永學
    선친께서 생전에 명마대를 사랑하여,
    계옹이 날마다 물고기 세 마리를 낚았네.
    풍욕이라 이름을 짓고 계모임을 여니,
    시인들이 때때로 술 한잔을 기울였네.
    여러 후손들이 모여서 모두 유적을 계승하고,
    지금 작은 정자 지으니 비가 와도 걱정없네.
    두 집안은 흩어져서 돌아올 줄 모르니,
    한가한 선비들이 서로 와서 즐기시게.
    운전(雲田) 전영학(全永學)

    山臨流水水磨臺 得魚設席供三首 父老餘營續後開 買酒留人勸一盃
    岩下漁郞春夏集 此地更無風雨苦 峽間樵竪暮朝回 何時有意好相來
    磵松 全炳日
    산이 물에 임하고 물이 누대를 문지르니,
    물고기 서너 마리 잡아서 잔치 열었네.
    부로들이 남긴 경영을 후손들이 이어 짓고,
    술 사다가 사람을 머물게 하여 한잔 권하네.
    바위 아래에 어랑이 봄여름에 모여들고,
    이곳에 다시는 풍우의 걱정이 없어졌네.
    산속의 나뭇꾼이 아침 저녁에 돌아오니,
    언제든지 생각나면 서로 와서 즐기시게.
    간송(磵松) 전병일(全炳日)

    【溟磨臺韻】
    天作溟岩地起坮 萬景引人多詠句 題名這處勝區開 千形留客数傾盃
    四圍山勢相應立 曲江古事何專美 一派川流遠抱回 杖履尋眞逐日來
    東隱 崔涫錫
    [명마대운]
    하늘이 명암을 만들고 땅에서 대(坮)가 일어나서,
    온갖 경치가 사람을 끌어 시구(詩句)가 많도다.
    승경인 이곳에 판액(板額)을 걸어,
    온갖 형체에 나그네가 자주 잔을 기울이네.
    사방의 산세가 서로 응하고 섰으니,
    어찌 곡강(曲江)의 고사(古事)만 아름답겠는가.
    한 줄기 냇물이 멀리 돌아 흐르니,
    지팡이 짚고 진경을 찾아 날마다 오도다.
    동은(東隱) 최관석(崔涫錫)

    溪上山前有石臺 長夏洗心風入袖 烟霞洞壑豁然開 良宵酌酒月盈杯
    白鷗下野驚人去 後孫善繼先翁蹟 黃鳥穿林喚友回 千載名聲不朽來
    憂堂 天安人 全鍾廈
    산 앞의 물가에 석대(石臺)가 있어,
    긴 여름 소매 속으로 바람이 불어 마음을 씻어 주네.
    연하(煙霞)의 골짜기 활연(豁然)히 열리고,
    좋은 밤 술을 따르니 잔 속에 달이 가득하네.
    들에 내린 백구(白鷗)는 사람 기척에 놀라 날아가고,
    후손들이 선조의 유적을 잘 계승하였도다.
    황조(黃鳥)가 숲을 가로질러 벗을 부르니,
    천년토록 명성이 이어지리라.
    우당(憂堂) 천안인(天安人) 전종하(全鍾廈)

    畵中山水一岩坮 兒童折柳争吹笛 故友題名稧杜開 士友肴魚不讓盃
    黃鳥穿隂林梩去 今見慕親亭榭立 白鷗度野石頭回 諸君孝思我吟來
    三止堂 梁仁權
    그림 같은 산수 속에 바위 누대 하나,
    아이들은 버들가지 꺾어 다투어 피리를 부네.
    옛 벗이 판액(板額)을 걸어 계사(稧社)를 여니,
    선비들 물고기 안주에 술잔을 사양하지 않네.
    황조(黃鳥)가 어두운 수풀 속을 뚫고 지나가니,
    어버이를 사모하여 지은 우뚝한 정자를 지금 보네.
    백구(白鷗)는 들을 지나 바위를 돌아가고,
    제군(諸君)의 효성을 내가 노래하노라.
    삼지당(三止堂) 양인권(梁仁權)

    故友題名此石臺 風味倍生魚数首 到今恨朱一遙開 詩心暗動酒三盃
    昔年遺蹟千秋在 浮岩背上新亭立 長夏遊情每日回 遠客相聞不絶來
    樵山 密陽人 朴漢祚
    옛 벗이 이 석대(石臺)에 판액(板額)을 거니,
    풍미가 배가 되어 물고기 자주 고개를 내미네.
    지금까지 한 번도 자리를 마련하지 못했지만,
    시심(詩心)이 몰래 일어 술이 석 잔이라네.
    옛날의 유적 천년토록 있을 것이니,
    물가의 바위 위에 새 정자가 섰도다.
    긴 여름 유람하고자 하는 마음 날마다 새롭고,
    소문 듣고 멀리서 오는 나그네 끊이지 않네.
    초산(樵山) 밀양인(密陽人) 박한조(朴漢祚)

    溟磨石上巧成臺 仰瞻高閣華甍棟 十里長川水面開 俯視瓊筵麻姑盃
    春入乾坤鴒頡頑 遊賞漁樵吟咏好 秋當九月鴈徘回 和風無日客相來
    野隠 李漢喆
    명마석 위에 잘 지은 누대(樓臺)가 있으니,
    높은 전각의 화려한 기와와 기둥을 우러러보고.
    십 리를 흐르는 냇물 눈앞에 있으니,
    아름다운 자리의 좋은 술자리를 굽어보네.
    봄이 오면 할미새 위아래로 날아,
    노래하는 초동들 감상하기 좋고.
    가을이면 기러기 배회하여,
    화풍(和風) 속에 나그네들 날마다 찾아오네.
    야은(野隠) 이한철(李漢喆)

    地作溟磨石上坮 停着可吟詩一首 天然的似畵中開 登臨不謝酒三盃
    仰瞻西北山千疊 無邊景物隨時好 俯瞰東南水数回 才子遊人日日來
    志堂 金容哲
    땅이 만든 명마석 위에 누대를 지었으니,
    거기에 머물면서 시 한 수 읊을 만 하구나.
    자연은 완연히 그림 속에 펼쳐지고,
    누대에 올라 석 잔 술을 사양하지 않는다.
    서북쪽 첩첩한 산을 우러러보니,
    끝없는 경치가 때마다 좋고.
    동남쪽 굽이치는 물길을 굽어보니,
    재자(才子)와 유람객이 날마다 오도다.
    지당(志堂) 김용철(金容哲)
  • 백운면 원운1길 29-7[운교리 837-1] 원운마을 당산 중턱에 세워진 정자. 당산안에 살았던 고(故) 전영태 씨가 1977년에 건립하였다. 전면 3칸 측면 3칸에 추녀받침기둥 4개가 있다. 건물 상부와 내부, 천정에까지 단청이 화려하다. 정자에 기문이 하나도 걸려 있지 않아 지은 내력은 잘 알 수 없으나 ‘慕雲亭’이란 현판은 건립자가 손수 쓴 것르 보이는데 좌측에 불초자(不肖子)라고 쓴 것으로 보아 부모나 선조(先祖)를 추모하고자 세운 것으로 짐작된다.
  • 마령면 강정리 산57에 있는 누정. 1984년 4월 1일전라북도의 문화재자료제16호로 지정되었으며, 2019년 12월 30일대한민국의 보물제2055호로 승격되었다. 소유자 및 관리자는 연안 송씨 문중이다. 수선루는 월운(月雲)마을 앞으로 흐르는 섬진강을 따라 약 1km 남짓 거슬러 올라간 천변의 암굴(岩窟)에 위치하고 있으며, 숙종 12년(1686)에 연안 송씨(延安宋氏) 4형제 진유(眞儒), 명유(明儒), 철유(哲儒), 서유(瑞儒) 등의 네 형제가 선대의 덕을 추모하고 도의를 연마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수선루’라는 명칭은 목사 최계옹(崔啓翁, 1654년(효종 5)~미상)이 이들 4형제가 갈건포의(葛巾布衣)하며 팔순이 되도록 조석으로 다니며 풍류함이 진나라 말년에 전란을 피하여 협서성의 상산(商山)에 은거한 동원공(東園公), 하황공(夏黃公), 용리선생(用里先生), 기리수(綺里秀) 등의 기상과 같다 하여 명명했다고 전해진다. 고종 21년(1884) 후손 송석노(宋錫魯)가 중수하였고, 고종 25년(1888년)에 재중수한 이래 여러번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자는 자연암굴을 이용하여 2층으로 세워져 있고, 2층 중앙에 ‘睡仙樓’라는 현판이 있으며, 1층의 문을 통하여 오르게 되어 있다. 자연 암반 속에 지은 누정 건물로 2층이다. 맞배 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전통 기와를 사용한 건물이다. 정면은 전통 기와를 사용하였으나 배면의 지붕은 석판을 사용하였고 정면은 겹처마이나 배면은 홑처마 지붕이다. 정면의 향 우측이 출입구이고 가운데 칸이 마루 칸이며 왼쪽에 방을 들였다. 왼쪽 방의 아궁이는 건물 뒤편에 마련되었고 방을 이루는 뒤쪽 기둥은 흰개미 등의 충해를 입었다. 단청은 새롭게 칠해졌으며 연목에는 연화머리초, 연목마구리는 3태극, 부연은 녹화머리초를 사용하였고 주두는 녹화결련금으로 베풀었다. 대들보는 연화머리초에 인휘로 구성되었고 머리초와 머리초 사이의 계풍에는 금문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번안하여 올렸다. 마루와 방이 연결되는 벽면에는 산수화, 화조화, 화병화, 백학, 호랑이 물고기, 매화 등의 민화가 그려졌고 대들보 위쪽의 왼쪽 벽면에는 흰 수염을 가진 선비들이 바둑을 두는 장면이 그려졌다. 그림에는 4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연안 송씨 4형제를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은 80세가 넘도록 아침 저녁으로 정자를 오르내리며 바둑도 두고 시도 읊었는데 그 모습이 옛날 사호(四皓)의 네 신선이 놀았다는 이야기와 비슷하다하여 정자의 이름이 수선루가 되었다. 대들보 위쪽의 오른쪽 벽면에는 이들보다 더 나이 든 노인들이 그려져 있어 세대 간의 어떤 이음을 표현하는 듯하다. 마루는 전통 우물 마루이고 건물 앞쪽의 쪽마루를 내달고 난간을 돌렸다.

    【睡仙樓重修記】 宋氏睡仙樓 在鎭安縣西山水交會之地 淸曠明塏 人之登眺者 爽然若羽化而登仙焉 盖宋氏之先 有四昆季 隱居行義 年皆八耋 而布衣葛巾 日夕逍遙於斯樓 遺世有商皓氣像 樓名以此 不亦宜乎 年久而頹圮 後孫諱錫魯 懼先蹟之泯沒 重修而新之 於是 山益秀水益淸 一區形勝 自成物外之界 微後孫追遠之孝 孰能使四公之遺躅 復明於世也 然景物之勝 皆有以助當日塤箎之樂 則其家風之敦睦 亦可想像矣 後人繼述 豈徒爲一樓之重新而已哉 四公之諱 眞儒明儒哲儒瑞儒 世家延安云爾 崇禎紀元後五戊子季秋下澣 德殷宋秉璿記
    【수선루 중수기】 송씨(宋氏)의 수선루(睡仙樓)는 진안현(鎭安懸) 서쪽 산과 물이 합쳐지는 곳에 있는데, 맑고 넓고 밝고 조촐하여 등조(登祚)하는 사람에게 상쾌함을 주며, 마치 우화등선(羽化登仙)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대체로 송씨의 선대에는 4형제가 있어 숨어 지내면서 의롭게 살았는데, 나이가 모두 팔십 줄이었고, 포의(布衣)와 갈건(葛巾)을 하고 조석으로 이 다락에서 소요(逍遙)하면서 세상을 보내니, 상산 사호(常山四皓)의 기상이 있었다. 다락의 명칭을 수선(睡仙)이라 한 것이 어찌 타당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해가 오래되어 퇴락하였는데, 후손 휘 석로(錫魯)가 선세 사적이 민몰(泯沒)할까 두려워하며 중수하여 새롭게 하였다. 이에 산은 더욱 수려하고 물은 더욱 맑아져 한 지역의 형승(形勝)이 저절로 물외(物外)의 세계를 이루게 되었다. 후손의 추원(追遠)하는 효성이 아니었다면 뉘라서 4공(公)의 유적으로 하여금 다시 세상에 드러나게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경물(景物)의 승개(勝槪)는 모두 당시 훈지(塤篪, 伯氏吹塤, 伸代吹篪. 형제의 화락을 뜻함)의 즐거움을 도왔으니, 가풍(家風)의 돈목(敦睦)을 상상할 수가 있겠다. 후손의 계술(繼述)이 어찌 다만 다락 하나의 중수에 그칠 따름이겠는가? 4공의 휘는 진유(眞儒)·명유(明儒)·철유(哲儒)·서유(瑞儒)이고, 세가(世家)는 연안(延安)이다. 숭정기원후 다섯 번째 무자(戊子, 고종 25. 1888) 계추 하한에 덕은(德殷, 思律고호) 송병선(宋秉璿)이 기술하다.

    【重修睡仙楼記】 於戱尙哉! 惟我七世祖四昆季, 不慕榮利, 素愛水山, 共起此楼者, 数百有載矣. 其間后賢, 種種修理, 而風雨飛揚, 簷瓦觧漏, 樑彩渙渝, 先蹟幾乎泯没也. 後孫致順星煥, 不勝戒懼, 招匠人而補治, 邀畵師而揮灑, 於是乎楼顔如舊, 先蹟復新, 斯非追慕勉述之萬一乎㦲? 詩曰, 靡不有初, 鮮克有終. 恭惟来来之仍, 以古視今, 視今嗣后, 則永先楼之光華夫! 崇禎紀元后嵗在甲戌九月下澣, 七世孫相冕陳情謹誌. 宗孫 俊煥 / 監彩 翼煥, 成濂 / 匠事 教煥 / 有司 致順, 星煥
    【중수 수선루 기】 아, 오래 되었구나. 생각건대 나의 7세조(世祖)인 네 형제분이 영화와 명리를 부러워하지 않고 평소에 산수(山水)를 사랑하여 함께 이 수선루(睡仙樓)를 지은 지 수백 년이나 되었다. 그 동안 후손들이 종종 수리를 하였으나 비와 바람이 불어 닥치면 처마의 기와가 부서져 물이 새고 들보의 채색이 바래고 벗겨져서 선대의 유적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이에 후손 치순(致順)과 성환(星煥)이 두려움과 걱정을 누르지 못하고 장인(匠人)을 불러와 보수하여 다듬고 화사(畫師)를 초청하여 물을 뿌려 씻어 내고 붓칠을 하니 이에 수선루의 모습이 예전과 같아졌고 선대의 사적이 다시 새로워졌다. 이는 추모(追慕)하고 이어가려고 힘쓰는 마음의 만분의 일이라고 본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처음이 있지 않은 사람은 없으나 끝을 제대로 마무리하는 사람은 드물다.’고 하였는데, 삼가 바라건대 후세를 살아갈 자손들이 옛날로써 오늘날을 보고 오늘날을 살펴서 후대를 이어가면 선대 수선루의 광화(光華)가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갑술년(甲戌年) 9월 하순에 7세손 상면(相冕)이 진정(陳情)하여 삼가 쓰다. 종손(宗孫): 준환(俊煥), 감채(監彩): 익환(翼煥)·성렴(成濂), 장사(匠事): 교환(敎煥), 유사(有司): 치순(致順)·성환(星煥)

    【睡仙楼重修記】 夫剏業易而守成難, 故人家祖業鮮能傳守久逺, 豈不信然乎㦲? 所以朱夫子甞歎嗣守之難於聚星亭賛者也. 卋苟有傳其靑氊舊物, 久而不失, 壞則修, 廢則興, 恒保當日顔色, 則可見其貽謨之裕, 而承趾之善也. 鎭安之睡仙楼, 乃延安宋氏卋傳別業也. 盖其始剏也, 諱眞儒明儒哲儒瑞儒四昆季, 以葛巾野服, 逍遥於斯, 友愛篤至, 有三公不換之樂, 當時之人, 望之若神仙, 遂名其楼以睡仙焉. 厥後, 名公碩士, 或詩以詠歎, 或文以鋪張, 江山増彩, 樹草生光, 誠所謂地以人顕者也. 且屡有葺理, 我王考淵齋先生, 亦甞記其重修之事, 而稱其家風之美矣. 物換星移, 今又数十年, 則上雨旁風, 不無傾頹者, 於是後孫相善錦煥, 與諸族合謀, 招工修治, 凡朽者敗者, 咸易之新之, 有侖有奐. 使升煥, 要余書其顚末, 卋好之地, 難恝其懇則曰, 詩云, 維桑與梓, 必恭敬止. 桑梓不過祖先手植之物, 猶加敬止, 况肯構之堂而風韻之攸存乎? 宜其傳守不失, 歴屡百年而長存也. 然若非深知守成之道, 則不可能也. 於此可見四公平日燕翼之道, 有大過於人, 而使諸後承承襲不墜也, 詎不韙歟? 従此以後, 宋氏諸人, 亦當遵守先範, 毋敢墜失, 則門戶益昌大, 而斯楼也亦與天壤不壞, 聊以是奉勉焉. 歲甲辰復月之望, 恩津宋在晟謹記
    【수선루 중수기】 대저, 창업(創業)은 쉽고 수성(守成)이 어려운 법이다. 그러므로 인가(人家)의 조업(祖業)을 능히 오랜 후세에까지 전하여 지키는 경우가 드무니, 어찌 정말 그렇지 않으랴. 그래서 주부자(朱夫子 송대(宋代)의 거유(巨儒)인 주자(朱子)를 말함)께서 일찍이 <취성정찬(聚星亭贊)>*이라는 글에서 계승하여 지키는 것이 어려움을 탄식한 것이다. 세상에 참으로 그 청전 구물(靑氈舊物)*을 전해오면서 오래 되어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부서지면 수리하여 폐지되었다가도 다시 흥기(興起)하여 항상 그 당일(當日)의 안색(顔色 색깔을 말함)을 보유하는 이가 있다면 그 후손들에게 끼쳐준 계획이 여유롭고 후손들이 자취를 잘 계승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안(鎭安)의 수선루(睡仙樓)는 곧 연안 송씨(延安宋氏) 집안에 대대로 전해지는 별업(別業)이다. 대체로 그 별업을 맨 처음 지은 사람은 휘(諱) 진유(眞儒)·명유(明儒)·철유(哲儒)·서유(瑞儒) 네 형제들이 갈건(葛巾)과 야복(野服) 차림으로 이곳에서 느긋하게 소일하면서 우애가 독실하여 삼공(三公) 벼슬과도 바꾸지 아니하는 즐거움*이 있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마치 신선을 바라보는 듯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그 누[樓]를 ‘수선(睡仙)’이라고 이름을 지었고, 그 뒤에 유명한 공경과 큰 선비들이 혹은 시(詩)를 지어 영탄(詠嘆)하기도 하고 혹은 글을 지어 포장(鋪張)하기도 하자 강(江)과 산(山)도 때깔이 불어나고 나무와 풀조차 광채가 났으니 참으로 이른바 땅이 사람으로 인하여 환히 알려지게 된 것이다. 또 누차 수리하고 보완한 일이 있었는데 나의 왕고(王考)이신 연재(淵齋)* 선생께서도 또한 일찍이 중수(重修)한 일을 기록하면서 그 가풍(家風)의 훌륭함을 칭찬하셨다. 사물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 또 지금 수십 년이 되었으니 비에 젖고 바람에 시달려서 기울거나 무너진 곳이 없지 않았다. 이에 후손인 상선(相善)과 금환(錦煥)이 여러 족인들과 더불어 상의하여 공장(工匠)을 불러다가 수리하여 무릇 썩은 것과 못쓰게 된 것들을 모두 새것으로 바꾸어 새롭게 단장을 하였고, 승환(升煥)으로 하여금 나에게 그 전말(顚末)을 써달라고 요청하였는데, 대대로 집안 간에 사이좋게 지내온 터여서 그 간절한 요청을 외면하기가 어려웠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뽕나무와 가래나무에 반드시 공경하네.*”라고 하였는데, 뽕나무와 가래나무는 조상께서 손수 심은 물건에 불과한데도 오히려 공경을 하였으니 하물며 선대에 지은 집이고 풍운(風韻)이 깃들어 있는 것이야 어련하겠는가. 대대로 전하여 지키면서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수백 년을 지나도록 길이 보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수성(守成)하는 방도를 깊이 알지 못하면 해낼 수가 없으니, 이에 네 분 공(公)께서 평소에 연익(燕翼, 자손의 미래를 위해 계책을 잘 세우는 것)하신 방도가 일반 사람들보다 크게 뛰어났음을 알 수 있고, 여러 후손으로 하여금 계승하여 추락하지 않도록 하였으니 어찌 훌륭하지 아니한가. 이제부터 이후로 송씨 집안의 여러 사람들이 또한 마땅히 선대의 전범(典範)을 준수(遵守)하고 감히 추락하지 않으면 문호(門戶)가 갈수록 창대할 것이고 이 누각(樓閣)도 또한 천지와 더불어 허물어지지 않으리니 애오라지 이 점을 힘쓰라고 말하노라. 갑진년(甲辰年, 1964) 11월[復月] 보름에 은진(恩津) 송재성(宋在晟)이 쓰다.
    *취성정찬(聚星亭贊) : 원래의 명칭은 〈취성정화병찬(聚星亭畫屛贊)〉이다. 후한(後漢) 말기의 명사(名士)인 진식(陳寔)이 그의 아들 기(紀)와 심(諶)을 대동하고 순숙(荀淑)을 방문하였는데, 이때 팔룡(八龍)이라 불리는 순숙의 여덟 아들인 검(儉)ㆍ곤(緄)ㆍ정(靖)ㆍ도(燾)ㆍ강(江)ㆍ상(爽)ㆍ숙(肅)ㆍ부(敷) 등과 한자리에 어울려 시중든 일이 있었다. 이때 천문(天文)을 관장하는 태사(太史)가 하늘에 덕성(德星)이 한 지점에 모인 것을 보고 500리 떨어진 곳에 현인들이 모였다고 천자에게 아뢰었다. 이로 인해 영천(潁川)에 있는 진씨의 정자를 취성정(聚星亭)이라 불렀는데, 그 위치가 바로 고정(考亭)에 있었다. 송나라 주희(朱熹)가 그 정자를 수리하고 당시의 상황을 그린 병풍을 만들어 거기에 서문과 함께 찬(贊)을 지어 붙였다. 『朱子大全 卷85 聚星亭畫屛贊』
    *청전구물(靑氈舊物) : 집안에 대대로 전해오는 선조(先祖)의 유물(遺物)을 말한다. 『晉書 卷80 王獻之列傳』
    *삼공(三公) 벼슬과도 바꾸지 아니하는 즐거움: 전원에 은거하며 유유자적하게 살아가는 흥치는 본인이 아니면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라는 말.
    *연재(淵齋): 조선 후기~근대의 문인이자 순국지사인 송병선(宋秉璿)을 말함. 본관은 은진(恩津).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다.
    *뽕나무와…공경하네: 상재(桑梓)는 뽕나무와 가래나무를 뜻하는데, 『시경』〈소아(小雅) 소변(小弁)〉에 “어버이가 심어 놓으신 뽕나무와 가래나무도, 반드시 공경해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하물며 우러러 뵐 분으로는 아버지 말고 다른 사람이 없으며, 의지할 분으로는 어머니 말고 다른 사람이 없는 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維桑與梓 必恭敬止 靡瞻匪父 靡依匪母〕”라는 말이 나온다.

    【睡仙樓重修元韻】
    癯鶴拪簾喚睡生 白雲千載夢三淸 泉源壺瀉丁丁漏 山勢棋圍點點枰
    春晝方濃魂蝶影 秋風忽覺老蟬聲 幸敎微裔嗣而葺 庶可欽先杖屨名*
    辛未仲夏下澣 主翁龜巖 謹稿
    【수선루 중수원운】
    여윈 학 주렴에 옮겨와 잠든 서생을 깨우니,
    흰구름 천년 동안 삼청(三淸)을 꿈꾸었네.*
    샘물은 병에서 쏟아지듯 콸콸 흐르고,
    산세는 바둑판처럼 점점이 평평하네.
    봄날에는 나비꿈*의 영상이 눈앞에 가득하고,
    가을 바람 불면 홀연히 때 늦은 매미 소리 들리도다.
    미천한 후손들이 이어서 지어 가기를 바라며,
    공경히 먼저 노닐며 이름부터 지어 두네.
    신미년 중하 하순에 주인옹(主翁) 구암(龜巖)이 짓다.
    *흰구름 천년 동안 三淸을 꿈꾸었네 : 白雲千載는 사실 황학이 떠난 뒤, 즉 선경이 사라진 뒤 오랜 세월을 의미하고 이제 수선루를 짓고 학이 다시 날아와 이곳이 선경이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행간의 의미는 ‘학이 떠난 천년 동안 선경을 꿈꾸기만 하였다’는 의미이다. 삼청은 三淸境의 준말로 仙境을 뜻한다.
    *나비꿈 : 莊周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다가 깨어 “내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지금 장주가 된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르겠다.”한 고사를 말하는 것이다.
    *杖屨名 : 杖屨라는 말은 ‘왕래하다’, ‘노닐다’의 뜻도 있지만 ‘죽은 자의 유품’을 뜻하기도 한다.
  • 마령면 평지리 산3-3, 원평지마을에서 백운 방향 1km지점 모롱이에서 냇가쪽으로 100m 내려간 지점에 있는 정자. 2016. 12. 28 진안군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덕태산 아래 백운동마을에서 발원한 백운천과 평장리 솥내마을에서 남으로 흐르는 내가 합류하는 지점에 건립된 까닭에 ‘雙溪亭’ 또는 ‘雙磎亭’으로 불린다. 1886년 오도한(吳道漢), 이우흠(李禹欽) 등이 발의 출연하여 건립한 누정으로 전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 지붕 양식이다. 누정 후벽에는 고운 최치원의 ‘雙磎石門’ 4자를 모방한 큰 글씨가 새겨져 있고, 오도한 등이 조직한 ‘쌍계동천 현현계’의 계원 36여 명의 명단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 정자 안에는 진사 오도한(吳道漢)이 기술한 쌍계정기(雙溪亭記)와 이원효(李元孝)의 쌍계석문서(雙磎石門序) 판액(板額)이 걸려있다.

    【雙溪亭記】 亭乎 不以丹雘之侈爲美 專以水石之奇爲勝 越州之東 白雲仙閣巍然居望 而雲之一枝 西走爲甑山 甑之北 石壁斗立 古怪哉 鬼斤神斧 剜削出別樣造化跡 眞可謂白雲之孫 馬耳之弟也 壁之下 凹而爲門 可容百多人 門之側 石平而磐 天作一亭 其磐之下 有雙溪 一自雲洞發源 一自鼎川橫流 合注成潭 廣纔容舫 深可餘丈 溪於亭上 一高唾可及 懸崖而磯出 百尺藋竿風絲 近似桐江 引流而田灌千頃 香稻瓊粒 何羨杭州 粤赤龍歲 一鄕多士中 有志於山水者 愛惜其勝地之僻在遐陬而無名焉 遂題縣宰之啣 次刻鄕員之名 又模來方丈孤雲先生雙溪石門四字 鐫之者 盖示結亭之意也 成毁 眞個關數之事 拖三十餘載未就 至于丙戌 余與沁判李秀殷氏 語及此事 同有厭紛就閒之意 乃以創營 因其天作 址而結構 偶合龜疇之九宮 可集蘭亭之群賢 要以爲暮年登臨之娛 後生風浴之所矣 其工匠材瓦所入 摠一千二百金 而李友禹欽甫所惠金三百 題名僉員中所惠金七十 其餘八百零 吾取諸吾帑 而用之斯亭云爾 居停主人 喜其落成而秉管 歲在丙戌九月日 進士吳道漢記
    【쌍계정기】 정자란 단청(丹靑)의 호사스러움으로 미(美)를 삼지 말고, 수석(水石)의 기특함으로 훌륭함을 삼아야 한다. 월주(越州, 진안의 고호. 월랑[越浪]에서 유래함)의 동쪽에는 백운산(白雲山)과 선각산(仙閣山)이 높다랗게 으뜸을 차지하고 있다. 백운산의 한 가지가 서쪽으로 달려 증산(甑山)이 되고, 증산의 북쪽에는 석벽(石壁)이 우뚝 섰는데, 극히 고괴(古怪)하여 귀신이 자귀와 도끼로 깎고 찍어낸 듯 별스런 조화(造化)의 형적을 나타내고 있다. 참으로 백운산의 손자요 마이산의 아우라 할 만하다. 석벽의 아래는 오목하게 문을 이루어 많은 사람을 수용할 만하고, 문의 곁의 돌은 평평한 반석(盤石)이어서 하늘이 정자의 터를 만들어 주었다. 반석 아래에는 쌍계(雙溪)가 있는데, 하나는 백운동(白雲洞)에서 발원(發源)하고, 하나는 정천(鼎川)에서 옆으로 흘러 이곳에서 만나 못을 이루었다. 넓기로는 배 한 척을 용납할 만하고, 깊이는 한 길(丈) 남짓한데, 시내는 정자 위에서 침 한 번 크게 뱉으면 닿을 만하다. 깎아지른 절벽에 낚시터는 백 척(尺)이나 튀어나와 쭉 뻗은 낚싯대와 흔들거리는 낚싯줄은 동강(桐江, 엄자릉[嚴子陵]이 낚시하던 강)의 모습과 흡사하다. 또 물줄기를 끌어들여 논 1천 경(頃)에 대는데, 향긋한 벼와 구슬 같은 쌀은 어찌 항주(杭州, 중국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지명)를 부러워하랴? 지난 병진년(丙辰年), 이 고을 선비 중에서 산수(山水)에 뜻이 있는 사람들이, 그러한 승지(勝地)가 두메 산골에 궁벽하게 위치하여 이름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음을 애석히 여겨, 마침내 군수의 명함부터 각하고 다음으로 향원(鄕員)들의 이름을 각하였으며, 또 지리산에 있는 고운 선생(孤雲先生)의 쌍계석문(雙溪石門) 네 글자를 따다가 새겼는데, 대체로 정자를 세우겠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성패(成敗)는 참으로 명수(命數)에 관한 일이라 미루어온 지 30여 년이 되었다. 병술년(丙戌年)에 이르러 나와 심연(心淵) 이수은(李秀慇)이 이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 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조용하게 이루자는 데 합의를 보았다. 이에 일을 시작하여 천작(天作)으로 된 그 터에 지으니, 귀주(龜疇)의 구궁(九宮, 모든 법수[法數]를 말한 듯)과 우연히 합치되고, 난정(蘭亭, 주현상[柱見上])의 군현(郡賢)을 모을 만하였다. 요컨대 모년(暮年)에 등림(登臨)의 즐거움을 갖고 후생들이 바람 쏘이고 목욕하고 하는 처소를 마련하고자 함이다. 그 공장(工匠)과 재와(材瓦)로 들어간 돈이 모두 1천 2백금(金)인데, 이우(李友) 우흠보(禹欽甫, 甫는 애칭[愛稱])가 낸 돈이 3백이고, 이름을 각한 인원 중에서 낸 것이 70금이며, 나머지 8백여 금은 내가 내 호주머니에서 털어서 이 정자에 썼다. 거정주인(居停主人, 나그네가 자칭하는 말이다)은 낙성(落成)을 기뻐하며 붓을 드는 바이다. 세재 병술(歲在 丙戌, 1886) 9월 일 진사 오도한(吳道漢)이 기술하다.

    【雙磎石門序】 余嘗遊方丈山 山之南 有雙磎石門 書曰 雙磎石門者 孤雲崔先生 筆跡也 其筆勢巉嚴正直 仰之若掎拓北斗也 歸而觀吾鄕之東林 水作雙溪 而其旁石壁 堪爲門於雙磎也 噫孤雲己仙矣 縦未蹑孤雲之蹤 而嘗有探 孤雲之蹟 則在世而不泯者 雙磎石門也 於是焉 遣人於方丈 描歸孤雲筆帖 而仍刻于斯地 非方丈而磎一石門也 人無孤雲 而筆是孤雲也 且聞孤雲得道者也 馬耳山出沒 隠若之中 安知無 或者徃来而遊 此石門也㦲 是以其門壁刊 以吾儕 七十餘人記以示之 崇禎四庚申 四月 日 崇政大夫 李元孝 序.
    【쌍계석문 서】 내 일찍이 방장산(지리산)을 구경할 때 산의 남쪽에 雙磎石門이 있는데 쓰이기를 雙磎石門은 고운 최치원 선생의 필적이라 한다. 그 필세가 가파르고 바르다. 우러르니 마치 북두칠성을 끌어온 듯 하다. 내 고향 동림(백운면 평장리 솥내 부근)으로 돌아와 보니 냇물이 쌍계를 이루었는데 그 옆 석벽이 쌍계문처럼 생겼다. 희라! 고운은 이미 신선이 되어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는데 고운의 흔적은 찾을 수 있으니 살아 있을 때 남긴 쌍계석문(이란 글씨)이다. 그래서 사람을 방장산에 보내 고운의 필적을 모사(摹寫)하여 이곳에 각자하였으니 방장산이 아닌 쌍계석문인 셈이다. 고운은 없지만 이 글씨는 고운 것이다. 또 듣기를 고운은 신선이 되었다는데 마이산에 숨어 출몰하는지 어찌 알랴. 혹은 오가며 이 석문에서 놀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석벽 사이에 우리들 70여 인을 (연명하여) 기록해 둔다. 崇禎 四庚申(1860) 4월 일 숭정대부(崇政大夫) 이원효(李元孝) 서(序)
    *이원효(李元孝, 1784[정조 8]~1870[고종 7]) : 자는 순경(舜卿), 호는 석정(石亭). 본관은 진안으로 보문각 직학사(寶文閣直學士) 교(校)의 후손이며, 증한성부 좌윤(左尹) 수삼(受森)의 아들이다. 재예가 뛰어났으며 고종 초년에 행의로 사림의 천거를 받았다. 규당 정상범(葵堂 鄭相範)이 전라도를 살피려고 내려와서 특제를 내렸는데 ‘백리수풍망려필식(百里樹風望閭必式)’ 8자로 글을 지으매, 당시의 사람들이 서로 전하여 암송하였다고 한다. 수직(壽職)으로 숭정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묘는 서주동(鼠走洞) 선영(先塋) 아래에 있으며, 최병심(崔秉心)이 찬한 묘갈명이 있다.
  • 마령면 강정리 산21-1, 강정마을에서 월운마을 쪽 모롱이 오른쪽 암벽에 있는 누정. 2016. 12. 28 진안군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1942년 참봉 전영선(全永鮮)이 건립한 누정으로, 정면 3칸, 특면 2칸의 팔작 지붕 건물이다. 팔작 건물만 있는 충량이 대들보 위에 걸렸는데 건물 좌우측의 중앙칸 기둥에서 뻗어나와 용머리를 대들보에 걸쳐 놓은 형상이다. 용머리는 청룡과 황룡이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중앙 어칸 천정은 우물 천정, 그 외의 부분은 연등 천정으로 마련하였다. 추녀 쪽으로는 선자연으로 결구하였다. 창방은 온주화 머리초[끝 부분에만 넣는 무늬]에 늘휘[띠 모양으로 휘돌린 오색 무늬]로 단청을 베풀었고 계풍[에는 여러 가지 도안적인 문양을 놓았다. 도리 장여는 반연화 머리초에 인휘[비능 모양의 색깔 띠]를 베풀었고 계풍에는 연꽃과 매화 등으로 장식하였다. 도리와 대들보 마구리는 태평초로 장식하였고 대들보는 연화와 주화의 병머리초로 장식하였다. 기둥 밖으로는 난간을 둘렀는데 계자 난간으로 결구하였고 주초석은 항아리형이며 추녀는 활주가 받들었다. 또 건물 중앙에 설송 최규상이 쓴 편액이 있다.
    쌍벽루 서쪽 암벽에 “강정대(江亭臺)”, “도은선생장구지대(都隱先生杖屨之臺) / 규암선생고반지대(葵庵先生考槃之臺)…”등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 백운면 노촌리 676, 덕태산 물줄기가 감아도는 천변에 있는 누정. 1984. 4. 1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되었다. 소유자 및 관리자는 거창 신씨 종중이다. 영모정은 백운면 평장리에서 평장초등학교를 지나 약 1km 정도 오르면 원노촌 마을과 하마치 마을로 갈라지는 갈림길 옆에 신의련 효자각(愼義蓮孝子閣)이 있는데, 효자각(孝子閣) 앞 천변에 세워져 있다. 영모정은 효자 신의련의 효행을 기리고 본받기 위해서 고종 6년(1869)에 세워졌으며, 중개수(重改修)의 내력은 자세히 알 수 없다. 2층의 구조이다. 건물은 팔작 지붕의 형식을 갖추고 지붕의 재료는 기와가 아닌 작은 점판암 판돌인 너와로 올렸다. 주초석은 거북이가 밖을 향하여 가고 있는 모습도 있다. 정자 마루의 수평을 맞추기 위해 냇가 쪽의 초층 기둥은 길고 냇가 반대편으로는 기둥이 짧다. 우물 마루를 가설하였고 기둥 밖으로는 4면 모두 난간을 둘렀다. 지붕은 앞뒤에서 볼 때 용마루 적새 아래로 점판암의 너와 돌을 깔았으나 좌우측면은 까치 구멍에 해당되는 부분은 직각으로 내리고 그 아래로 너와를 놓았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로 초석은 가공 초석이 대부분이다. 내지 쪽의 기둥에는 주련을 달았다. 홑처마 지붕의 익공집의 서까래는 주화 머리의 늘휘로 단청을 베풀었고, 서까래 마구리는 태극문을 넣었다. 각 익공은 초가지를 장식하였고 기둥은 반연화 머리초로 장식하였다. 주두는 먹분 긋기로 처리하였다. 마루는 수평이 틀어진 청판이 곳곳에 보이고 기둥의 열극 현상이 심하다.
    정자에는 다음에 기술하는 여러 시운 판액들이 걸려 있다.

    【永慕亭記】 鎭安縣治之南二十里 有所謂美溪村 寔美溪愼先生所鍾生棲息之地 而溪之源 出於德泰山 縈廻于五萬洞 溪之上有岸 起十許丈 上有烏頭赤脚之閭 乃美溪先生之以孝旌扁 而輝暎古今者也 岸腰有盤陀一巨巖 可坐十數人 仍搆數架屋於巖上 是永慕亭也 永慕之意 盖欲先生之世世子孫 無忽其瞻依誦法也 嗚呼 惇德至行 袞褒於天朝 孚及於犬羊 垂之竹帛 被之棹楔 榮寵烜赫 將綿亙百世而不泯矣 後生童觀 安敢贅一辭 而描畵盛蹟哉 窃有隱之於癙憂以痒 而不能自解者 夫醜虜之充斥我邦 視古猶今 而在先生 則推孝而全活流人 多至五萬 今也靡哲靡愚 而民將盡劉矣 且在先生之時 人感依德 如德山賴之 而順保性命 今也顧瞻四方 蹙蹙所聘 而絶無一二人卓然可恃者 豈先生之盛德 不世出 上下數十載之間 不可再見耶 抑時丁百六 大運驅逼 而天戚之舞 不能解平城之圍而然耶 愚不敢妄談氣數 而曠感遺徽 祗令人嘐嘐 有起九原之想也 是亭之役 先生之後孫宗奎甫 寶前蹟而請余爲之記 余以托名爲榮 不欲以不文辭 乃言曰 登斯亭 緬想遺矚 則德山峨峨 美水洋洋 眞詮妙諦 煥爛盈矚 而凡爲先生詵詵雲仍 母徒崇飾亭榭 用資一時觀瞻之美 而必也讀先生所讀之書 行先生所行之德 以至一擧足一出言 而不敢忘先生所崇之孝 不敢廢先生所劬之業 紹述前光 家而爲肖孫 移孝爲忠 國而爲良弼 致使當世之人 罔不知美溪翁之有後 而咸嘖以爲醴有源而芝有本也云爾 則永慕之義 於斯盡矣 而儘可以毖保平泉之花石 世守考亭之琴書矣 諸賢之寓慕斯亭者 盍相率而勗之哉 戶曹參議 李寅龜 撰
    【영모정기】 진안(鎭安) 현치(縣治)의 남쪽 20리, 이른바 미계촌(美溪村)이 있으니, 바로 미계(美溪) 신 선생(愼先生)이 태어나서 은거하신 곳이다. 시내의 근원은 덕태산(德泰山)에서 발원하여 오만동(五萬洞)을 굽이도는데, 시내 위에는 10여 길이나 되는 언덕이 있고, 언덕 위에는 오두적각(烏頭赤脚, 비석은 검고 비각은 붉음)의 정려(旌閭)가 있으니, 미계 선생의 효자 정려로 고금에 빛을 발하는 곳이다. 언덕의 허리에는 반반한 큰 바위가 있어 10여 인이 앉아서 놀 만한데, 그 위에 몇 칸 집을 지었으니, 이것이 영모정(永慕亭)이다. 영모의 뜻은 대대로 선생의 자손되는 사람들이 첨앙(瞻仰)하고 계술(繼述)하는 도리를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오호라! 선생의 두터운 덕과 지극한 행의는 명(明)나라 조정에서 포장(襃獎)하니, 그 영향이 이적(夷狄)에게까지 올라 빛나는 영총(榮寵)은 앞으로 백세(百世)가 지난다 해도 묻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후생의 천견(淺見)으로 어찌 감히 한 마디나마 덧붙여서 훌륭한 사적을 묘사하려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저윽이 속을 끓여서 생긴 병을 숨기고 스스로 풀지 못한 바가 있으니, 무릇 오랑캐가 우리나라에 꽉 차 있는 현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일반이지만, 선생에 있어서는 지극한 효성으로 말미암아 피난민을 온전히 살린 것이 많게도 5만 인에 이르렀으나, 지금은 현우(賢愚)를 가릴 것 없이 백성은 다 속절없이 죽어가게 되었다. 또 선생의 시대에는 사람들이 모두 덕을 의지하는 것이, 마치 덕이 있는 산을 의지하듯 하여 목숨을 부지하였건만, 지금은 사방을 둘러보아야 애처롭도록 제 살길만 찾고 있어 한 두 사람도 뚜렷이 의지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 어쩌면 선생같은 성덕(盛德)은 시대마다 태어나는 것이 아니어서 상하(上下) 수 천년 동안 다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나 아닐는지? 아니면 시대가 백육(百六, 액회[厄會])의 액운을 만나 대운(大運, 국운[國運])마저 구박(驅迫)을 받아 간척(干戚)의 춤으로 평성(平城)의 포위를 풀 수 없어서 그러한 것일까? 나는 감히 망녕되이 기수(氣數)를 말할 수는 없으나 남기신 훌륭한 점을 추상(追想)할 때, 다만 사람으로 하여금 효효(嘐嘐, 뜻이 크고 말도 큰 소리를 치다)하여 황천(黃泉)에서 다시 일으키고 싶은 생각만 들게 한다. 이 정자의 공사가 끝날 무렵에, 선생의 후손인 종규보(宗奎甫, 甫는 존칭)가 선대의 사적을 간추려서 나에게 기(記)를 써 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이름 내걸기를 좋아하는 터이라 글을 못한다고 사양하지 아니하고 말을 잇기를, 정자에 올라서 조상이 구경하던 바를 추상해 보면, 덕태산은 높다랗고 미계(美溪)의 물은 넓다란데, 진전(眞詮)과 묘체(妙諦)는 찬란하게 눈앞에 다가오니, 모든 선생의 자손되는 많은 분들은 그저 정자나 훌륭하게 꾸며서 한 때의 훌륭한 볼거리로 삼으려 하지말고, 반드시 선생께서 읽었던 책을 읽고 선생께서 숭상했던 효도를 잊지 말고, 선생께서 힘쓰시던 학문을 자파하지 말고 전대(前代)의 광영을 계승하여, 집안에서는 초손(肖孫)이 되어 효도를 미루어 충성하고, 나라에 있어서는 훌륭한 보필자가 되어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미계옹(美溪翁)에게 훌륭한 자손이 있음을 모르는 이가 없게 하여, 모두가 혀를 차면서 동감하기를, “예천(醴泉)은 근원이 있고 영지(靈芝)는 근본이 있다더니 사실이구나!”하게 한다면, 길이 사모하는 뜻을 다 바친 것이 된다 하겠다. 이는 진실로 평천(平泉)의 화석(花石)을 잘 보존하고 대대로 고정(考亭)의 금서(琴書)를 잘 계승하는 길이 되는 것이니, 이 정자에 사모하는 뜻을 부치고 있는 모든 분들은 어떻게 서로 권면하고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호조참의 이인구(李寅龜)가 찬하다.

    【판액(板額)1】
    鎭安之山有 美溪愼公義連舊址也 公隠居 力學以孝間 壬辰之亂 虜至逼其親 公以身蔽之泣曰 寜殺我母害吾親 虜問其姓名 書而投諸火不㷊 驚曰 天孝也 傍其衆環山不入 賴而得活者數萬人事 聞旌閭仍構 修義副尉 溪之上岸 高千尺 㟁腰有巨巖 公之後人作亭 其頂名曰 永慕 有來徵詩者 用 原韻應之
    千尺岸頭活水源 碩人薖軸此中存 至誠終得神明佑 異類寧無父母恩
    往蹟曽聞環畫邑 居民共說避泰村 百年遺址風聲遠 堂構如今有子孫
    大匡輔國崇祿大夫判中樞府事 慶州 金弘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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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안의 산에 아름다운 시내가 있으니 愼義連 공의 舊址이다. 공은 은거하며 학문에 힘쓰고 효성으로 소문이 났다. 임진왜란 때 오랑캐가 와서 그 어버이를 핍박하자 공이 몸으로 어버이를 가리고 울며 말하기를, “차라리 나를 죽이고 우리 어버이를 해치지 말라.” 하였다. 오랑캐가 그 성명을 묻고 성명을 종이에 써서 불에 던졌으나 타지 않았다. 오랑캐가 놀라 말하기를, “하늘이 낸 효자이다.” 하고는 그 무리에게 榜文을 보내 산을 둘러싸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살아난 자가 수만 인이었다. 이 일이 조정에 보고되어 정려(旌閭)와 증(贈) 수의부위(修義副尉)의 첩지를 내렸다. 시내의 기슭 언덕은 높은데 허리에 거암(巨巖)이 있어 공의 후손이 정자를 짓고 영모정이라고 판액(板額)을 달았다. 그리고는 나를 찾아와 시를 부탁하는 자가 있어 원운(原韻)으로 부응한다.
    천 길 강안(江岸)에 끊임없는 물,
    석인(碩人)이 이곳에 은거하였네.
    지극한 효성 마침내 신명(神明)의 도움을 얻었으니,
    오랑캐라고 어찌 부모의 은혜를 모를쏘냐.
    지난 일 들으니 고을을 둘러쌌다고 하는데,
    주민들이 다같이 말하기를 난을 피한 태평촌이라 하네.
    백년이 지난 유지(遺趾) 소문은 멀리 들리고,
    부자간에 계승하여 지금의 자손이 있구나.
    대광보국숭록대부판중추부사(大匡輔國崇祿大夫判中樞府事) 경주(慶州) 김홍집(金弘集)*
    *김홍집(金弘集, 1842년~ 1896년) : 개화기의 정치인. 초명은 굉집(宏集), 호는 도원, 시호는 충헌(忠獻). 온건개화파이며 갑오개혁 추진자들의 우두머리였다. 또한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기도 하다.

    【판액(板額)2】
    德山美水長根源 俯仰之間道所存 海寇投鋒驚異感 天朝命爵降殊恩
    居人尙說壬辰事 福地無如孝子村 埜雉飛鳴松梓老 至今瞻慕泣■孫
    九世孫 宗奎
    덕태산은 기틀이 넓고 미계천은 근원이 깊어서,
    우러러보고 굽어보니 도를 보존할 만하다.
    바다 오랑캐 칼을 버리고 기적에 놀라니,
    조정에서 官爵과 특별한 은혜를 내리셨네.
    주민들이 아직도 임진년의 일을 말하니,
    효자촌보다 복받은 땅은 어디에도 없으리라.
    수풀의 꿩은 울며 날고 소나무 가래나무 늙었으니,
    사모하는 후손이 바라보며 지금 눈물 흘리네.
    구세손(九世孫) 종규(宗奎)


    【판액(板額)3】
    [謹次永慕亭韻]
    山有朝宗水有源 萬波一脉各相存 追先意篤猶多感 裕後功深豈忘恩
    松柏交柯連古道 雲林生色接芳村 崢嶸高閣如斯立 永保遺模継后孫
    后孫 愼哲晟
    [삼가 영모정에 차운하다]
    산에는 조종(祖宗)이 있고 물에는 근원이 있어서,
    수많은 갈래 하나의 맥락으로 서로 통하네.
    선조를 추모하는 마음 돈독할수록 느끼는 점 많아,
    복이 후손에게 미치고 공이 깊으니 어찌 은혜를 잊으리.
    소나무 잣나무 얽힌 가지 옛 길에 이어졌고,
    구름 낀 단풍숲이 향기로운 마을에 이어졌네.
    가파른 고각(高閣)이 새로 지은 듯하니,
    남기신 뜻 길이 보존하여 후손들이 이어 가리.
    후손(后孫) 신철성(愼哲晟)


    【판액(板額)4】
    山髙峰也水長源 先生已去道尙存 雖冦寕無誓異佑 惟廷終有降殊恩
    居民共誦知天孝 往老相請避禍村 遠樹風聲花遺趾 爲今增感表愚孫
    外后孫 梁仁權
    산 봉우리 높고 물길이 기니,
    선생은 이미 떠났으나 도는 아직도 남았네.
    오랑캐라 하더라도 하늘의 보우(保佑)에 놀라지 않을 수 없고,
    조정은 마침내 특별한 은혜를 내리셨네.
    주민들은 하늘이 알아준 효성을 칭송하고,
    노인들은 화를 피한 일을 전해 주네.
    멀리 나무들 바람소리 꽃다운 유지(遺趾),
    지금 더욱 훌륭하여 못난 후손의 사표(師表)가 되네.
    외후손(外后孫) 양인권(梁仁權)

    【판액(板額)5】
    一曲淸溪百行源 先生雖去道常存 蘆花十里風霜氣 松栢千年雨露恩
    王蠋舊聞環畫地 商容自有式閭村 小亭成處增追慕 堂搆遺謨付後孫
    嘉善大夫 吏曺叅判 完山 李應夏
    한 굽이 맑은 시내 온갖 지류의 근원이 되니,
    선생은 떠났으나 도는 아직 남아 있네.
    갈대꽃 십 리에 서리 바람 기운이고,
    소나무 잣나무 천 년 동안 우로(雨露)의 은혜로다.
    왕촉(王蠋)의 무덤을 봉해 주듯 고을을 보호해 주었고,
    상용(商容)의 마을에는 절로 경의를 표하였네.
    작은 정자 이룬 곳에 추모하는 마음 더해지고,
    대를 이어 계승해 온 뜻 후손에게 맡기네.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曺叅判) 완산(完山) 이응하(李應夏)
  • 마령면 평지리 1137-9, 원평지마을 국도 30호선 건너편 공지에 있는 정자. 원평지 주민들의 휴게처이다. 정자에 걸려 있는 이규형(李圭衡)이 찬한 영풍정기(迎豊亭記)에 의하면 본디 있었던 정자가 1970년 폭풍으로 허물어져 1971년에 주민 전태주(全泰周) 씨의 특지와 동민들의 합력으로 1972년에 다시 세웠다고 한다. 전면 2칸, 측면 2칸의 기와 팔작지붕이다.

    【영풍정기(迎豊亭記)】 本鄕 平地里는 山髙水長한 鎭安髙原中에서도 보기드문 名區인바 上古의 文化的 遺産인 数基의 支石이 있고 麗朝에는 馬靈縣의 官衛가 있었던 由緖깊은 宿鄕이라. 馬耳靈峯이 特立한 湖南寶土中에서도 蟾津江의 源流인 白馬川이 沃野를 貫流하고 있으니 恒心을 지닐 恒産이 없지 않을 天惠立地가 山好 水好 人亦好라는 古人의 名言이 決코 虚辭가 아닐지어다. 이같은仙庄에 長幹密葉의 巨槐가 滿地淸隂을 이루고있어 每年盛夏에 隣近洞員의 滌暑之所가 되어 本鄕聚落의 悠久한 歷史를 代辯하고 있던바 지난 庚戌(1970)歲에 暴風의 被害를 입어 倒壞되고 말았으니 鄕里를 아끼는 衆人의 失望이 어떠했으리요. 이에 有志諸賢이 桑海之嘆을 머금고 한 亭子를 얽고저 한 바 里仁全泰周甫의 盡力周旋과 监役委員 諸位의 盡心勤勞로 翼然히 辛亥暮에 一亭을 特立하니 換舊迎新의 새로운 氣像이 이루어졌다. 噫라, 掛陽山下 一川流는 晝宵不息 帰大海라. 洞里諸彦이 亭名을 請함에 迎豊이라 號하고 다시 記文을 請함에 敢히 몇 字를 적는 바이며 이어 돋는 興을 참지 못하여 境內八景을 略記하노니 惟我 鄕里諸位는可不貶哉며 可不貶哉아. 八景者는 一曰 東臺吐月이요, 二曰南溪細雨요, 三曰西山落照요, 四曰北峀曉鍾이요, 五曰亀山深淵이요, 六曰馬耳帰雲이요, 七曰平沙洛雁이요, 八曰南溪淸風이라. 雙溪睡仙의太古淸風이 豊年을 謳歌하고 晩趣暮雲이 古情을 불러 일으키니 이아니 名區仙庄이 아닌가. 光復後 辛亥(1971) 六月 日 전의후인(全義後人) 이규형(李圭衡) 근찬(謹撰)
  • 진안읍 우화1길 4-16[군상리350-1], 우화산 북쪽, 진안천변 암벽위 버덩에 있는 정자. 본래 우화정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편찬)』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최소 500년은 된 정자이다. 본디는 지금의 자리에서 서쪽으로 100여 미터 떨어진 등성이 너머 암벽아래에 위치하였는데, 언제인가 퇴락하여 없어졌으나 1921년 지역 인사들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 중창(重創)하였고, 1963년 지역인사들이 다시 중수(重修)하였으며, 그 뒤 1998년 진안군에서 다시 중건(重建)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정 건축이다. 구조는 낮은 기단위에 가공된 고복형 주초를 놓고 두리 기둥을 세운다음 창방과 결구하고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양식으로 기와지붕이다. 누정 주변에는 계자난간을 돌려 설치하고 있다. 공포는 익공양식이고 가구는 5량집으로 대들보 위에 대공을 대고 다시 종보를 댄 다음 그 위에 대공을 세우고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2단의 대들보 사이에 충량을 대고 기둥 주두위에 걸치고 있다. 우화정이 위치한 우화산은 주위 경관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전망이 뛰어나 이곳에 오르면 마이쌍봉 등 소위 월랑팔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경승지이다. 정자에는 지역인사들의 차운(次韻)을 담은 판액(板額)이 즐비하다. 이곳은 진안읍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진안읍민의 휴식공간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곳이 우화산이란 이름이 붙여진 연유는 예전에 이곳에서 신선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우화등선(羽化登仙)의 전설이 전해오기 때문이다. 우화정에는 다수의 판액(板額)이 걸려 있다. 다음은 1921년 중창하면서 진안읍의 전민탁(全玟鐸)이 쓴 기문인데 판액(板額)은 없어지고 글만 『진안지(1925)』에 전한다. 이 글로 1921년 정자의 중창(重創) 전말을 알 수 있다.

    【羽化亭記】 夫物之廢而興 衰而盛 卽理之常也 羽化一亭 在縣之案南者 爲幾百年前云 而胡爲乎失葺 但遺礎者 未知幾經星霜 此亭參居月浪八景之一 其所勝槩 遙想一郡翹楚 而今我後進 只憑古老相傳 瞻望舊墟而已 於是乎同志諸人 有感古之懷 謀新築之論 隨力捐金 不違劃筭 可謂廢而興者此歟 前日竪亭之處 乃玉流泉上駕鶴臺下 其幽邃景狀 非爲不佳 欲營別團而置之 乃隔一巒 更卜于此 翬飛碧榭 胸衿豁然 亦豈非地人相遇哉 前臨石壁 涵流水百年之聲 後擁松墩 毓靑山千古之色 東開牛蹄之野 濛濛也細雨 南隱馬耳之峰 悠悠也白雲 簷頭明月 欄外淸風 非但吾人之暢叙 足爲才子之觴咏 美哉仙鄕之流華 不愧隣境也 是亭也 豈憂竹樓之易朽乎 後必有如我同志之嗣葺云 歲在辛酉夏四月下澣 全玟鐸謹識
    【우화정기】 무릇 사물이 없어졌다 생기고, 쇠했다가 성한 것은 이치의 떳떳함이다. 우화정(羽化亭)이 고을의 안산 남쪽에 있었던 것은 몇 백 년 전의 일이라고 하나, 어쩌다가 중수(重修)하지 못했는지 모르나, 주초(柱礎)만 남게 된 것도 몇 년이 지났는지 모를 일이다. 이 정자는 월랑팔경(月浪八景)의 하나에 들어 있고, 그 좋은 경치는 한 고을에서 으뜸이었을 것이나, 지금 우리 후생들은 다만 어른들이 전하는 말만 듣고 빈터만 바라볼 따름이다. 이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옛날을 회상하는 마음이 있어 새로 짓자는 논의를 하고, 힘닿는 대로 돈을 내놓고 계획에 차질이 없었으니, 이른바 없어졌다가 도로 생긴다는 것이 이런 경우일 것이다. 전일 정자를 세웠던 곳은 옥류천(玉流泉) 위이고 가학대(駕鶴臺) 아래로 그윽한 경개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아니나, 달리 지어보려고 그 자리는 버리고 산등성이 하나를 격(隔)하여 이곳에 다시 터를 잡으니, 날아갈 듯한 푸른 정자는 가슴이 툭 트인다. 이 어찌 땅과 사람이 서로 때를 만남이 아니겠는가? 앞으로 석벽(石壁)에 임하여 유수(流水)의 백년성(百年聲)을 머금었고, 뒤로는 송돈(松墩)에 기대어 청산(靑山)의 천고색(千古色)을 띠었다. 동으로 우제(牛蹄)의 들 열렸는데, 컴컴한 것은 가랑비이다. 남으로 마이(馬耳)의 봉우리 가리웠는데 유유(悠悠)한 것은 백운(白雲)이다. 처마 끝 명월(明月)과 난간 밖 청풍(淸風)은 비단 우리만이 창서(暢敍)하는 것이 아니라, 족히 재자(才子)들의 상영(觴詠)도 됨직하니 아름답도다. 선향(仙鄕)의 유광(流光)은 이웃 고을에 부끄러움이 없다. 이 정자는 어찌 죽루(竹樓)*의 쉬이 썩음을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 이 뒤로 필시 우리와 같은 동지자(同志者)가 있어 보수(補修)하게 될 것이다. 신유(辛酉, 1921) 하4월 하한(下澣) 전민탁(全玟鐸)이 삼가 기록하다.
    *당[唐]나라 때 왕우칭[王禹偁]이 황주죽루기[黃州竹樓記]를 지었는데, 그 말미에 대나무로 기와처럼 집을 덮으면 10년이 가니 다시 또 덮어도 20년밖에 못 가지만,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 뒤를 이어 보수하면 쉬이 썩는 것을 걱정할 것이 없다 하였는데, 그 뜻을 인용한 것이다.

    다음은 1963년 중수하면서 마령면의 정귀영(鄭貴泳)이 쓴 기문 판액이다.
    【羽化亭重修記】 鎭安郡治之南數武許 崗巒突兀 絶壁奇異 樹木㭗蒼 百鳥咸集 甘露湧出石間而爲泉 淸溪不息長流而爲沼 瞻望一隅 馬耳雙峰 屹立中天于彼 古寺暮鐘 攩聲日聞不絶 此眞可謂神仙道師會遊消塵之勝區 而有亭翼然者 乃羽化亭也 文章才士 詩人墨客 詠於斯題於斯 揭之于板上 亭之可觀備在前者老儒之述矣 姑置之 而盖天下事 初創雖云難 守補亦難 如非後人之承述嗣葺 則若將難保者 理所固然 矧修理有年 土木傾頹 瓦覆滲漏 有志諸君子 慨然於斯 捐金鳩財 命匠不數月 而告工重新之 環顧宇內 慾浪滔滔 致禮義之不暇 而範俗世道 無論可想 花朝月夕 會友觴詠 炎天曝陽 棲息渴飮 不聞可知爲不忘僉君子之德矣 不佞以匪德不文 豈敢敍述也 僉尊之固請 重且大 不揆妄拙 擧其槩而爲之記 捐金與尸事之芳名 當次其後矣. 檀君紀元四二九六年 癸卯 窉月 日. 東萊 鄭貴泳 記.
    【풀이】 진안(鎭安)의 군치(郡治) 남쪽 몇 발자욱되는 거리에 뫼뿌리가 우뚝 솟아 절벽이 기이하고 수목이 울창하여 온갖 새가 다 모여들며 감로(甘露)가 돌사이에서 샘솟아 우물이 되고 맑은 물은 쉬지 않고 흘러 못이 되었는데 한쪽 모퉁이를 쳐다보면 마이(馬耳)의 두 봉우리가 중천(中天)에 드높이 솟아있고 절간의 저녁 종소리 끊임없이 들려오니 이는 참으로 이른바 신선(神仙)과 도사(道師)가 만나 노닐면서 진세(塵世)를 잊는 승구(勝區)라 할 만한데 날렵한 정자 하나가 있으니 바로 우화정(羽化亭)이다. 문장(文章), 재사(才士), 시인(詩人), 묵객(墨客)이 여기에서 읊조리고 여기에서 써서 판상(板上)에 걸어놓았으니 정자로서의 볼거리는 다 갖추어져 있다. 지난날 노유(老儒)들이 계술(繼述)한 것은 그만두고서라도 대체로 천하의 일은 비록 초창(初創)이 어렵다고 하지만 수보(守補)도 또한 어렵다. 후인(後人)의 끊임없는 보수(補修)가 없으면 보전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하물며 수리한지 여러 해가 되어 목재(木材)는 기울어지고 기와는 비가 샘에 있어서랴. 뜻이 있는 제군자(諸君子)가 이를 개연히 여겨 돈을 내놓고 재목을 거두어 공장(工匠)을 불러 몇 달이 채 되지 않아 일을 마쳐 일신(一新) 하였다. 지금 세상을 두루 돌아보면 탐욕(貪慾)의 물결이 넘쳐흘러 예의(禮義)를 이룰 겨를도 없으니 세도(世道)에 모범이 되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그런데 꽃피는 아침, 달이 뜨는 저녁에 벗을 모아 시를 읊고 더운 철 땡볕이 내려 쪼일 때에 이곳에서 쉬면서 목이 말라 우물을 마시면 듣지 않아도 제군자의 덕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덕도 없고 글도 못하니 어찌 감히 서술(敍述)할 수 있겠는가마는 여러 어른의 간청이 중한 바라서 망녕됨을 헤아리지 않고 그 줄거리를 들어 기(記)로 삼는 바이다. 돈을 내놓은 사람과 일을 맡아본 사람의 방명(芳名)은 응당 부차(副次)로 있을 것이다. 단군기원(檀君紀元) 4296(1963)년 계묘(癸卯) 3월(窉月) 일 동래(東萊) 정귀영(鄭貴泳) 기(記)

    다음은 1963년 중수하면서 진안읍의 김종관(金鍾寬)이 쓴 기문으로 중수내역을 국한문 병용으로 기재한 글이다.
    【鎭安羽化亭重修記】 月浪城南 數武許에 一見 仙娥가 邑을 향하여 춤을 추는 듯한 자세를 올리고 있는 산을 일러 羽化山이라 한다. 이 山 分野內에 있는 羽化橋의 風致와 玉流泉의 淡味와 忠魂塔의 偉容과 駕鶴坮의 神祕와 羽化江의 返景 등 許多 風光은 곧 登臨客을 陶醉케 하며 本郡 遊覽地로서 이름이 높은 저 馬耳雙峯과 雲半兩岩으로 더불어 優劣을 다투는 터이다. 이와 같은 勝地에 어찌 亭榭가 없을소냐 槪使 羽化山을 仙娥 舞體로 본다면 右舞袖에 該當한 位置에 서 翼然中天에 드높이 나타나고 있는 건물이 곧 羽化亭이다. 眼界가 廣闊하여 所謂 月浪八景이 一目之下에 展開되어 있고 地帶가 迢遞하여 浮埃가 끊어지고 淸風만이 徐來하는지라 와서 앉으면 胸襟이 灑落하여 곧 神仙에 오른듯하다. 春風秋月境을 찾아 詩人墨客이 接踵하고 있는 이 羽化亭의 存在야말로 郡寶로서 자랑함에 遜色이 없을 것이다. 烏號라! 건물의 修不修는 管理 如何에 따라 左右됨은 再言을 要치 않는바 從來 우화정의 管理가 너무나 疎忽하였으므로 그로 因하여 建物이 日頹月落 將次 顚覆의 危險前夜에 있었다. 이를 憂慮한 地方同志가 相謀下에 우화정 修理期成會를 組織하고 積極 推進한 結果 郡에서 修理費 三萬원의 下達을 받고 會員으로부터 應分의 誠金을 收合하여 計劃대로 付屬建物까지 完全修理의 業績을 거두었다. 玆에 今般 우화정을 修理하게된 顚末과 此 修理工事에 積極 協力하신 會員諸氏의 名單을 登梓하여서 길이 紀念코자 하노라. 檀紀四二九六(1963)年 癸卯 仲秋 下澣 金海 金鍾寬 記

    다음은 우화정 안에 걸려 있는 한시 판액(板額)들이다.
    [謹次]
    崖懸巖疊水聲長 羽化亭高此片岡 臺影沈江兼鶴靜 樹陰如海帶鶯凉
    百登不厭眞佳境 一寓難辭亦故鄕 仙跡渺茫無處問 只留瑤草向人香
    丁酉初夏中澣 寓人 秋圃 金鍾管
    삼가 차운하다
    첩첩한 바위 절벽 물소리 유장한데,
    이 언덕에 우화정이 높다랗게 섰도다.
    정자의 그림자는 물속에서 학과 함께 고요하고,
    수풀의 그늘은 바다처럼 꾀꼬리와 함께 서늘하다.
    백 번을 올라도 염증이 나지 않아 참으로 가경(佳境)인데,
    한 번 보고는 말하기 어려우니 역시 고향으로 삼을 만하다.
    신선의 자취는 묘연(渺然)하여 어디 있는지 물을 길 없고,
    다만 기화요초(琪花瑤草)만 남아 사람에게 향기를 보내네.
    정유 초하 중한 우인(寓人) 추포(秋圃) 김종관(金鍾管)

    [謹次]
    仙翁以去歲華長 此地空餘羽化岡 駕鶴坮前山月白 釼岩沼上水風凉
    名亭幻出三淸界 物色由來太古鄕 遠近遊人常不絶 日團詩社酒樽香
    東隱 金圭泰
    삼가 차(次)하다.
    신선이 가버린 지 세월이 오래인데,
    이곳엔 공연스레 우화정만이 왔네.
    가학대(駕鶴臺) 앞엔 달빛이 희고,
    검암소(劒巖沼) 위엔 바람 서늘하다.
    이름난 정자 삼청계(三淸界)*에 솟아있는데,
    물색(物色)*은 자래로 태고향(太古鄕)*이었네.
    원근의 유인(遊人)들 항상 떨어지지 않아,
    날마다 시사(詩社)* 얼려 술기운 향긋하다.
    동은(東隱) 김규태(金圭泰)
    *삼청계(三淸界): 신선이 사는 하늘 나라. 즉 옥청(玉淸) 상청(上淸) 태청(太淸)의 총칭임.
    *물색(物色): 어떤 풍경과 모양의 종합적인 상징(象徵).
    *태고향(太古鄕): 태고적의 순후한 고장
    *시사(詩社): 시로써 모이는 동아리.

    一谷淸川翠帶長 枕流巖石疊成岡 山花滿地春風暖 水氣通簾夏日凉
    歲月重來明月也 神仙不返醉仙鄕 後人修葺多生色 聯揚新詩墨潤香
    檀陰 金圭彦
    한 굽이 맑은 시내 띠처럼 기다란데,
    베고 누은 바윗돌 쌓여서 산을 이뤘네.
    산화(山花)는 땅에 가득하여 봄바람 따스한데,
    수기(水氣)는 주렴에 스며 여름에도 서늘하다.
    세월은 명월야(明月夜) 다시 돌아왔건만,
    신선은 취선향(醉仙鄕)에 돌아오지 않누나.
    후인들 보수하여 화사한 맵시 많이 나는데,
    새로운 시 나란히 걸어 먹 향기 그윽하다.
    단은(檀隱) 김규언(金圭彦)

    勝地名亭共特長 月浪佳境在斯岡 高臺隔水紅塵遠 老樹叅天白日凉
    羽化仙翁去何處 風流士子訪吾鄕 逍遙擬到三山境 瑤草琪花分外香
    陽圃 鄭京朝
    승지(勝地) 명정(名亭)의 특장(特長) 겸했으니,
    월랑(月浪)의 가경(佳景) 이 산에 있구려.
    높은 누대 물에 막혀 홍진(紅塵)은 먼데,
    늙은 수림 하늘을 가려 한낮에도 서늘하다.
    우화(羽化)한 신선은 어데로 가버렸는지,
    풍류(風流)의 선비맛이 이 고장 찾아드네.
    삼산(三山)*의 지계(地界)에서 바람을 쏘이는 듯,
    요초(瑤草)와 기화(琪花) 생각밖에 향기롭다.
    양포(陽圃) 정경조(鄭京朝)
    *삼산(三山): 삼신산(三神山) 즉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를 말함.

    [謹次]
    一榭亭亭鳴世長 鎭中秀氣鐘南岡 懸簷霽月終霄白 滿座光風盡日凉
    眼際皆無非別界 人誰不道是仙鄕 忘俗憑欄如化羽 仃伶暫醉九煎香
    蓮史 姜信永
    삼가 차하다
    한 정자 청정하여 세상에 울린지 오래이니,
    진안의 수려한 기상 남강(南岡)에 모였네.
    처마에 매달린 제월(霽月)은 밤새도록 밝고,
    자리에 가득한 광풍(光風)은 종일토록 서늘하다.
    눈 앞엔 모두가 별계(別界) 아님이 없나니,
    사람이 뉘라서 선향(仙鄕) 아니리 이르는가.
    세상 잊고 난간에 비기니 날개가 돋치는 듯,
    나 홀로 잠시 구전향(九煎香)*에 취해 보네.
    연사(蓮史) 강신영(姜信永)
    *구전향(九煎香): 신선이 되는 약인 금단(金丹)은 수은(水銀)을 아홉 번 달여서 만들기 때문에 붙여진 용어임.

    [謹次]
    羽化亭下一溪長 山勢南來聳此岡 危欄半枕釼巖碧 畵棟高撑玉宇凉
    絶壁籠雲超俗界 靈泉釀酒醉仙鄕 鍊道醒心幾多客 煎丹遺煙至今香
    慕軒 李圭衡
    삼가 차하다
    우화정 아래 시냇물 하나 길게 흐르는데,
    산세는 남으로 내려와 이곳에서 솟았네.
    위태로운 난간은 반쯤 검암(劒巖)에 기대었고,
    붉은 기둥 높다랗게 옥우(玉宇)* 받치고 있네.
    절벽은 구름에 감싸여 속계(俗界)를 벗어났는데,
    영천(靈泉)으로 술을 빚어 선향(仙鄕)에서 취하네.
    도를 닦고 마음 깨친 나그네 얼마나 되는가,
    단(丹)을 달여 전해진 약 지금도 향긋하다.
    모헌(慕軒) 이규형(李圭衡)
    *옥우(玉宇): 하늘을 말함

    [次羽化亭韻]
    羽化翁歸天日長 而今只有古亭岡 杜宇曉岑殘月白 寒蟬紅樹夕陽凉
    幻身一旦期離俗 駕鶴千年不返鄕 聊識世間都是夢 惟存芳草帶春香
    石亭 全鍾烈
    우화정 운을 차하다
    우화옹(羽化翁) 돌아가고 햇끝만 긴데,
    지금은 다만 옛 정자만이 남아 있구려.
    두견새 새벽 뫼뿌리에 잔월(殘月)은 희고,
    매미 소리 붉은 숲엔 저녁 노을 서늘하다.
    환신(幻身)한 그 날에 세속 떠나려고 작심했는지,
    가학(駕鶴)한 천년동안 고향엔 돌아오지 않네.
    양괘라 인간 세상 모두가 꿈인지라,
    방초(芳草)만 봄의 향기 띠고 있구려.
    석정(石庭) 전종렬(全鍾烈)

    [又]
    駕鶴一飛歲月長 只存重疊白雲岡 叅差城樹空中碧 灑落林泉石上凉
    千家桃竹武夷谷 七里山川滁水鄕 如逢記似羲之筆 不使蘭亭獨擅香
    石川 金鍾寬
    우(又)
    학 타고 떠난 뒤로 세월이 많이 흘러,
    겹겹이 쌓인 백운강(白雲岡)만이 남았네.
    들쭉 날쭉 성수(城樹)는 공중에 푸르르고,
    깔끔한 임천(林泉)은 돌 위에 서늘하다.
    얼천 집 도죽(桃竹)은 무이(武夷)*의 골짜기요,
    칠리(七里)의 산천은 저수(滁水)*의 고을일세.
    글 잘 지은 왕희지(王羲之)의 솜씨 만난다면,
    난정(蘭亭)*이 그 이름 독차지하게 않았으련만.
    석천(石川) 전종관(全鍾寬)
    *무이(武夷): 중국 복건성(福建省) 숭안현(崇安縣)에 있는 산 이름. 그곳에 있는 골짜기 구곡(九曲)은 경치가 좋아 주희(朱熹)의 구곡가(九曲歌)가 있다.
    *저수(滁水): 중국 안휘성(安徽省)에 있는 물 이름. 송(宋)의 문장가 구양수(歐陽脩)가 이곳 지방관이 되어 취옹정(醉翁亭)을 짓고 기(記)를 지었음
    *난정(蘭亭): 중국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정자 이름. 동진(東晋) 때에 명사(名士) 42인이 이곳에 모여 주연(酒宴)을 베풀었는데 그 기(記)를 왕희지(王羲之)가 대를 있고 쓰고 하였음.

    [次羽化亭]
    羽亭日上放懷長 駕鶴千秋露此岡 一輪明月當樽白 萬斛淸風入座凉
    玉削芙蓉挺馬耳 天圍地軸闢仙鄕 最好登臨無限景 每唫花鳥幾番香
    春岡 全承國
    우화정 운을 차하다.
    해 돋는 우화정에서 길게 회포를 푸는데,
    신선은 가버리고 천추토록 이 언덕만 남았네.
    일륜(一輪)의 명월은 술동이 비추어 희고,
    만곡(萬斛)*의 청풍 자리에 들어 서늘하다.
    옥으로 각각은 연꽃인 듯 마이(馬耳)는 솟았고,
    하늘은 땅의 테를 둘러 신선 고장 이루었네.
    가장 좋은 건 등림에 끝없는 경치 있음이라,
    매양 화조(花鳥) 읊조리며 몇 번이나 놀았던가.
    춘포(春圃) 전승국(全承國)
    *만곡(萬斛): 일만 섬(石). 아주 많음을 뜻함

    [又]
    百尺臺高一水長 擁城屹立畵中岡 森羅萬象乾坤大 蘊蓄千年木石凉
    湖山表裏玲瓏界 吳楚東南壯麗鄕 詩友棋朋仍共樂 灑然巾屐襲天香
    晴溪 薛洙奉
    우(又)
    대(臺)는 백척(尺)이나 높고 시냇물 길게 흐르는데,
    성(城을) 끼고 우뚝 솟은 그림 속의 뫼뿌리일세.
    만상(萬象)은 삼라(森羅)하여 건곤(乾坤)은 크고,
    천년(千年)을 온축(蘊蓄)*하여 목석(木石)도 서늘하다.
    호산(湖山)은 안팍으로 영롱(玲瓏)한 세계이고,
    오초(吳楚)*는 동남으로 장려(壯麗)한 고장일세.
    시우(詩友) 기붕(棋朋) 함께 모여 즐기니,
    쇄연(灑然)한 건극(巾屐) 천향(天香)*에 젖네.
    청계(晴溪) 설수봉(薛洙奉)
    *온축(蘊蓄): 어떤 기운이나 학문 품위 따위가 오래 쌓이는 것
    *오초(吳楚): 오(吳)나라와 초(楚)나라. 두보(杜甫)의 악양루(岳陽樓)시에 오초는 동남으로 펼쳐졌다[吳楚東南坼]는 시귀가 있는데 그 사의(辭意)를 취해서 쓴 것임
    *천향(天香): 하늘 멀리에서 은은히 풍겨오는 향기

    [次羽化亭韻]
    孤亭特立歲年長 月浪城过一小岡 門掛白雲常隱僻 窓臨流水饒淸凉
    絶勝溪山開別界 煥然文物非凡鄕 邨俗亦知烟景好 隨時筆筆自題香
    玉雲 宋瑢憲
    우화정 운을 차하다
    외딴 정자 우뚝 솟아 세월이 흘렀는데,
    월랑성(月浪城)변의 작은 뫼뿌리일세.
    문에는 백운(白雲)이 걸려 항상 그윽하고,
    창은 유수(流水)에 다달아 서늘함 풍족하다.
    절승(絶勝)의 계산(溪山)에 별천지 열렸는데,
    빛나는 문물(文物)은 범향(凡鄕)이 아니로세.
    나라 풍속 역시 연경(煙景)이 좋음을 알아,
    때때로 이 붓 저 붓 멋대로 향기를 적네.
    옥운(玉雲) 송용헌(宋瑢憲)

    一上名亭興味長 郡城秀色盡南岡 千里溪山依旧碧 百年松檜帶新凉
    畵棟鶴鳴明月夜 玉簫仙降彩雲鄕 幾多騷客登臨處 聯壁圖書漆墨香
    春岡 房鎭洪
    이름난 정자 성큼 오르니 흥미로움 많은데,
    한 고을 뛰어난 경치 이 언덕에 다했구려.
    천리의 산천은 옛 모습 그대로 푸르르고,
    백년의 송백(松栢)은 서늘함 가져오네.
    화동(畵棟)엔 달이 밝은데 학이 울고,
    옥소(玉簫)로 신선 구름타고 내리네.
    허구많은 시인들 등림(登臨)하던 곳엔,
    벽을 둘러 시와 글 먹 향기에 젖었네.
    춘강(春岡) 방진홍(房鎭洪)

    [次]
    駕鶴坮傳歷史長 羽亭生色擅奇岡 江風拂檻詩心快 山月當簷酒氣凉
    自古湖南多勝地 鎭安名實太平鄕 湯來掬飮靈泉水 頓覺凡夫口腹香
    守軒 吳在東
    차하다
    가학대(駕鶴臺)는 전해진 지 오래인데,
    우화정의 생색은 이 뫼뿌리 독차지했네.
    강풍이 난간 흔드니 시심(詩心) 울렁이고,
    산월(山月)이 창살 마주하니 술기운 서늘하다.
    자고로 호남에는 승지(勝地)가 많으나,
    진안은 명실이 태평향(太平鄕)이었도다.
    목이 말라 영천수(靈泉水) 움켜 마셨더니,
    범부(凡夫)도 뱃속 향긋함 완연히 깨닫겠네.
    수헌(守軒) 오재동(吳在東)

    亭故築今一羽長 南湖形勝此東岡 白晝樹林情欲斷 黃餘石礎座還凉
    日鶯歌非俗洞 霽天月色是仙鄕 名遊不晩前人後 後我千年亦有香
    辛酉五月二十日 晩圃 文榮一
    오랜 정자 지금 중건하니 깃 하나 자랐는데,
    남호(南湖)의 형승(形勝)이 언덕에 있구려.
    백주(白晝)의 정취(情趣)는 애간장을 끊는데,
    석초(石礎)*에 황화(黃花) 있으니 자리 되려 서늘하다.
    따스한 날 꾀꼬리 소리는 속계(俗界)가 아닌데,
    개인 하늘 달빛은 이곳이 바로 선향(仙鄕)이구려.
    이름난 놀이 전인(前人) 뒤 따르는 것 늦지 않나니,
    이로부터 천년 뒤일지언정 남은 향기 있으리라.
    신유(辛酉) 5월 20일
    만포(晩圃) 문영일(文榮一)
    *석초(石礎): 주춧돌을 말한 것은 분명하나 황(黃)은 단청(丹靑)을 말함인지 국화인지 알 수 없음.
  • 주천면 신양리 금평2길 25에 있는 정자. 1960년 건립된 전면 3칸, 측면 2칸, 함석지붕의 건물이다. 금평마을 은진 송씨의 누정으로 정자 앞에는 ‘호은 송공 유적비(湖隱宋公遺蹟碑)’가 있다. 정자 안에는 금재(錦齋) 이손(李巽)이 찬(撰)한 추양정명 병인(秋陽亭銘幷引) 판액(板額)이 걸려있어 추양정(秋陽亭)이란 정자 이름의 유래를 밝혀 주고 있다. 또한 의헌(毅軒) 양성래(梁星來)가 지은 시액(詩額)도 걸려있다.

    【秋陽亭銘 幷引】 築小亭於朱川上金谷巖下 而牓之曰秋陽者 友人宋君成璨炳用讀書之所 蓋取曾子賛孔子 曰秋陽以曝之之義也 善哉信哉 若人可見學而爲已之不出目今斯道絶塞亦莫我敢都 所謂前聖後師文不在玆誰能障百川而東之回狂瀾於旣倒者也 噫 君能不隨世之浮沈 而孤往獨邁 子史以樂其志 風俗而適其趣 豈亦尙古之人古之人也歟 予乃爲之銘 銘曰, 有亭高出 朱川之陽 孔子之道 敬直義方 秋陽以曝 曾子讚揚 猗歟宋友 謹揭㮁旁 出入餘力 講磨之場 私淑于高 遠䎹其香 曷不益勉 闇然日章 爲仁由己 何患文喪 水長弗廢 地久弗荒. 又係之以詩, 金谷逶迤巖石蒼 亭名取義揭秋陽 截然後嶽嵬嵬立 逝者前川滾滾長 視聽箴辭無甚物 攀躋努力有其方 君居不在風光役 用是書中玩味詳 疆圉大淵獻(丁亥) 維夏 丙寅 錦齋病夫 李巽 撰.
    【추양정명 병인】 주천 시냇가 금곡암(金谷巖) 아래에 작은 정자를 짓고 ‘추양(秋陽)’이라고 현판을 달았는데 우인(友人) 송성찬(宋成璨) 송병용(宋炳用)군이 독서하는 곳이다. 이 이름은 증자(曾子)께서 공자(孔子)를 찬양하면서 ‘가을볕에 말려 이보다 더 깨끗할 수 없다.’라고 말한 뜻을 취한 것이다. 멋지구나. 틀림없이 사람들이 수신(修身)을 위한 학문은 ‘오늘날 이 도(道)가 끊어졌다는 말을 나는 감히 찬성할 수 없다.’는 주자(朱子)의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것이니, 이는 이른바 ‘옛 성인과 후대의 스승이 이어져서 그들의 글이 여기에 있지 않은가.’라는 것이고 ‘모든 물을 동쪽으로 흐르게 하여 이미 광란에 이른 상황을 되돌려 놓았다.’는 것이다. 아, 송군이 세상의 부침(浮沈)을 따라가지 않고 홀로 매진하여 제자(諸子)의 책과 역사책을 공부하며 즐겨 자신의 뜻을 기르고 주위의 풍속을 자신의 풍취에 맞게 할 수 있다면 어찌 옛 것을 숭상하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옛 사람일 것이다. 내가 이에 그를 위해 명을 지으니 명은 다음과 같다. 우뚝 솟은 정자는 주천의 북쪽에 있고 / 공자의 도는 경직의방(敬直義方)이도다. / 가을볕에 말린 듯이 깨끗하여 증자께서 찬양하셨으니 / 훌륭하도다 송군이 치자나무 곁에 삼가 이 말을 게양하였구나 / 틈나는 대로 드나들며 강마(講磨)하는 장소이니 / 옛 사람에게 사숙(私塾)하여 멀리 들리는 명성이 향기롭도다 / 더욱 힘쓰면 시나브로 날마다 드러나지 않겠는가 / 仁의 실천은 자기에게 달렸으니 어찌 사문(斯文)이 망할 것을 걱정하겠는가 / 물처럼 장구하여 사라지지 않고 땅처럼 유구하여 황폐해지지 않으리라 / 또 이어서 시를 짓는다. 금곡은 구불구불 바위는 창연한데 / 정자의 이름은 증자의 말씀에서 뜻을 취해 추양이라 하였네
    깎아지른 뒷산은 우뚝히 섰고 / 흘러가는 앞내는 길이 흐르도다. / 보고 들으며 잠언(箴言)으로 삼을 물건이 없더라도 / 더위잡고 오르는 노력을 한다면 방법은 있을 것이니
    그대는 풍광에만 매달리지 말고 / 이 글을 상세히 음미하게나. 정해(丁亥, 1947)년 유하(維夏, 음4월) 병석(病席)에서 금재(錦齋) 이손(李巽) 찬하다.

    [敬次]
    金坪洞口採蘭亭 叢竹垂楊入檻靑 道德雙峯高後帳 武夷九曲潔流汀
    自來明月詩魂爽 時至淸風酒力醒 子繼寅翁遺述志 構成隣接古碑銘
    毅軒 梁星來
    [공경히 차운하다]
    금평동 입구의 채란정
    대나무 버들가지 난간에 푸르구나
    뒤에는 높은 명도, 명덕 두 봉우리 휘장이 되고
    무이구곡(武夷九曲) 맑게 흐르는 물가로다
    절로 뜨는 밝은 달에 시심(詩心)이 상쾌하고
    때마침 부는 청풍(淸風)에 술이 깨도다
    자손이 선조의 남긴 뜻을 이어서
    옛 비명(碑銘) 곁에 집을 지었네
    의헌(毅軒) 양성래(梁星來)
  • 성수면 구신리 1213 상염북 마을회관 앞 마을숲에 있는 정자.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진안지(鎭安誌, 1925)』에 기재되어 있는 황운룡의 「충목정기(忠木亭記)」에 의하면, 대략 1910년 이후로 추정된다. 본디 충목정은 정자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이곳의 정자나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정자나무가 경술국치(庚戌國恥)인 1910년 8월 29일 북쪽을 향해서 쓰러져 수년간 살아날 기약이 없었으니, 나무마저도 임금을 사모하는 염북(念北)의 마음을 가졌다고 하여 ‘염북’이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뒤 이 충목을 기리기 위해 그 밑에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기문은 문리(文理)에 모순이 있다. 이 기문이 쓰인 시기가 1910년인데 경술국치를 당하자 나무가 쓰러져 “……북을 향하여 비스듬히 누운 형상이 되어 있었다. 그 후 수년 동안은 시들어서 살아날 기약이 없었으니……”라는 부분은 글을 쓴 때와 그 뒤의 일이 뒤섞여 시제(時制)가 맞지 않는다. 또 충목정 때문에 마을 이름이 ‘염북’이 되었다는 설은 『호구총수(戶口總數,1789년편책)』에 염북리(念北里)가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타당하지 않다.
    충목정은 본디 전면 2칸, 측면 1칸의 너와 우진각지붕 양식이었는데 2005년 홍수 때 유실되고 2008년에 도비, 군비보조금으로 신축되었는데 현재는 시멘트 블럭 위에 초석을 놓고 원주형의 기둥을 세운 육모정이다. 창방이 각각 기둥 위에서 결구되었고 익공으로 장식하였다. 창방 위와 도리장여 아래에 소로를 끼운 소로수장집이다. 연목과 부연을 짠 겹처마 지붕이다. 마루 쪽의 기둥과 기둥 사이는 계자 난간을 둘렀다.

    【忠木亭記】 或有問於余曰 忠木亭何爲而作也 願聞其義 余於是焉應之曰 雲水之東 月浪之高 接壤之地 有一巨山 名曰萊東山 山下有一村 名曰念北里 里之設 不知其幾百年矣 民俗熙皥 質儉淳朴 構木爲巢 玆食木實 有巢氏之民歟 鑿井而飮 耕田而食 日出而作 日入而息 堯舜氏之民歟 以憂國奉公爲心主 而盡忠盡誠 但願年豊惟希道泰 村號念北 果非虛也 杜甫詩 每依北斗望京華 蘇軾歌曰 望美人兮天一方 是亦憂國奉公之義也 則念北爲號者 有所據 而村之左右兩水合襟處 有一亭木 設村之時所樹之物也 生此王國 老此王國 體大數十圍 而高數十丈 下可以坐數百人 方圓體乾坤之儀 養成涵雨露之澤 其枝葉之駿茂兮 繽陰翳之蔽芾 無恙東風健長身 貞貞獨立蔭四方 當此盛炎 野夫山童 揮汗而憩 李謫仙之大扇 忽焉無功 騷人學士 滌暑而唱咏 嚴先生之羊裘 怳然似看于斯時也 人皆愛惜 仰之若喬松 敬之如桑梓 寔殿玆土 呵噤不祥 俾此村民 安而綬之 不可以尋常凡木視也 然則以忠爲名何也 木亦有忠乎 天地之間 人與物而同胞 故人之所誠 物亦有感焉 王祥之奈 風中不落 孟宗之筍 雪裏有生 乃是誠感所致也 天運不幸 去庚戌年七月某日某時 日色無光 愁雲慘淡 悲風悽切 有似乎地動之樣 而亭木宛然有顚覆之像 其下村人遊者二三子 驚懼疾走 遠立而視之 則果有向北偃臥之儀 其後數年凋殘 若無生存之期 此靈神之所感而然也 人亦念北 木亦念北 人與物而同符 念北之義 豈不重且斐歟 昔者伯夷之死也 西山之薇 曲拳不伸 田橫之沒也 東島之樹 同日有枯 是則兩人之節義 徹天透地也 故所感發者 於斯見矣 山薇與島樹 爲節云乎哉 爲義云乎哉 蕩蕩乎無能名焉 至於此木 則爲國爲君 而同日同時 向北有偃臥之像 數年有凋殘之像 則以忠爲名 不亦可乎 問者唯唯而去 余亦慽慽馬有所感 而因悉次是語以記之 又從而歌之曰 木兮木兮 可以人而如之 樹木亦然 怳乎人而不知 嗚呼此木 邦國禎幹 曰爾村童 勿剪勿折 歲在 上章閹茂仲秋下浣 晩翠長水黃雲龍記
    【충목정 기】 혹자가 나에게 묻기를 “충목정(忠木亭)은 어찌하여 지었습니까? 그 까닭을 알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운수(雲水, 임실[任實]의 고호)의 동쪽과 월랑(月浪) 서쪽의 지경이 맞닿은 곳에 큰 산이 하나 있어 내동산(萊東山)이고, 산 아래에 마을이 있어 염북리(念北里)인데, 마을이 생긴 지는 몇 백 년이나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풍속이 순진하고 검박하여 나무를 얽어서 집을 짓고, 나무 열매를 따먹고 사니 유소씨(有巢氏, 상고의 임금으로 처음으로 집을 짓는 법을 가르친 임금)의 백성이던가?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밥을 먹으면서 해가 뜨면 나가서 일을 하고, 해가 지면 들어와서 쉬니 요순씨(堯舜氏)의 백성이던가? 나라를 걱정하고 공가(公家)에 봉사함으로 심주(心柱)를 삼고 충성을 다하면서 다만 풍년이 들기만을 빌고 태평하기만을 바라니, 마을 이름이 염북(念北, 임금님을 생각한다는 뜻)임이 과연 빈말이 아니다. 두보(杜甫, 당대[唐代]의 시인)의 시에 ‘매양 북두에 의지하여 서울을 바라본다. [每依北斗望京華]’고 하였고, 소식(蘇軾, 송대의 문장가)의 노래에 이르기를 ‘미인(임금을 지칭함)을 바라보니 하늘 끝에 있구려! [望美人兮天一方]’라 하였는데, 이 역시 나라를 걱정하고 공가에 봉사하는 뜻인즉, 염북이라 이름한 것도 근거가 있다 하겠다. 이 마을의 왼쪽과 오른쪽의 두 물이 합쳐진 곳에 정자나무 한 그루가 있으니, 마을이 생길 때 심은 것이다. 이 나라에서 태어나 이 나라에서 늙어 몸통의 크기는 몇 아름이나 되고 높이는 몇 십 길이나 되며, 그 아래에는 수백 인이 앉을 만하다. 방원(方圓)은 건곤(乾坤) 양의(兩儀, 음[陰]과 양[陽])를 본받았고, 성장(成長)은 우로(雨露)의 덕택을 입어 지엽(枝葉)이 무성하기는 어두컴컴하게 뒤얽히고 탈없는 동풍에 건장한 몸체는 정정하게 홀로 서서 사방에 그늘을 드리운다. 한여름 불꽃더위에 야부(野夫)와 산동(山童)이 땀방울을 뿌리고 쉬어 있노라면 이적선(李謫仙, 당[唐]의 시인 이백[李白]의 별호)의 큰 부채가 소용이 없게 되고, 문인(文人)과 학사(學士)가 더위를 씻고 읊조리면 엄선생(嚴先生, 후한[後漢]의 엄자릉[嚴子陵]을 높혀서 부른 말)의 양구(羊裘, 양피로 만든 갓옷. 엄자릉은 양구를 입고 낚시질을 하였다)를 흡사 이 때에 입은 듯하다. 사람들이 모두 아끼고 사랑하여 우러르기를 마치 교송(喬松, 큰 소나무)과 같이 하고, 공경하기를 상재(桑梓, 고향집의 울안에 있는 뽕나무와 가래나무)와 같이 하는데, 이 나무는 이 땅을 맡아 재앙을 물리치고 이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편안하게 유지하게 하니, 예사로운 나무로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충(忠)자로 이름을 붙인 것은 무슨 까닭인가? 나무에도 충성이 있다는 말인가? 하늘과 땅 사이에는 사람과 사물이 같은 품안에서 자라기 때문에 사람이 정성을 바치면 사물도 느끼는 바가 있게 되는 것이므로 왕상(王祥, 동진[東晋] 사람. 자는 휴징[休徵]으로 태보[太保]를 지냈다. 계모를 지성으로 섬겨 얼음 속에서 잉어가 튀어나오고, 새가 저절로 장막 안으로 들어오는 등 이변이 많았다. 특히 계모가 능금을 좋아하는데 바람이 세게 불어 능금이 다 떨어질 것 같아 능금나무를 껴안고 통곡을 하니 강풍 속에서도 능금이 하나도 떨어지지 않았다고 함)의 능금나무(柰)는 바람에도 떨어지지 않았고, 맹종(孟宗, 삼국시대 오[吳]나라 사람. 자는 공무[恭武]로 사공[司空]을 지냈다. 어머니가 병이 나서 겨울철에 죽순이 먹고 싶다 하여 눈 속의 대밭에 들어가서 통곡을 하니, 죽순이 솟아나서 올렸다 함)의 죽순은 눈 속에서도 솟아났으니 이것이 바로 정성의 감화에서 이루어진 것들이다. 천운이 불행하여 지난 경술년(庚戌年, 1910) 7월 모일(某日) 모시(某時)에 태양이 빛을 잃자 수운(愁雲)은 암담하고 비풍(悲風)은 처절하여 흡사 땅이 꺼지는 듯하였는데, 정자나무도 완연히 기우는 듯한 형상을 하였다. 마을의 한유한 사람 몇이 놀라서 달려가 먼 발치에서 서서 보니, 과연 북을 향하여 비스듬히 누운 형상이 되어 있었다. 그 후 수년 동안은 시들어서 살아날 기약이 없었으니, 이는 영신(靈神)이 감동하여서 그렇게 된 것이다. 사람도 북쪽을 생각하고 나무도 북쪽을 생각하여 사람과 사물이 염북(念北)의 의의가 같으니 어찌 소중하고 대견한 일이 아니겠는가? 옛날 백이(伯夷)가 죽으니 서산(西山)의 고사리가 주먹처럼 오그라지고 펴지지 않았으며, 전횡(田橫, 전국시대 제[齊]의 마지막 군주)이 죽으매 동해(東海) 섬(전횡이 무리를 이끌고 섬으로 퇴각했음)의 나무가 같은 날 말라죽었으니, 이는 두 사람의 절의가 하늘과 땅에 통달하였기 때문이며, 사물에까지 감동하게 한 바를 여기에서 보게 되는 것이다. 산의 고사리와 섬의 나무가 절조가 있다 할 것인지? 의리가 있다고 할 것인지? 너무나 탕탕(蕩蕩, 광대한 모양)하여 형언(形言)할 수가 없다. 이 정자나무에 있어서는 나라를 위하고 임금을 위하여 한 날 한 시에 북을 향하여 비스듬히 눕는 형상이 일어났고, 수년 동안 말라 시들은 현상이 있게 되었으니, 충(忠)이라 이름을 붙여도 옳지 않겠는가?”라고 하니, 묻던 사람이 네네 하고 가버렸다. 나 역시 마음 속에 뭉클한 바가 있어 이 말을 모두 조리 있게 적어 기(記)에 가름하기로 하였다. 이어 노래를 달기를 “나무여, 나무여! 사람이 사람답게 행하면 나무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사람이 사람답지 못할 수 있겠느냐? 오호라! 이 나무는 나라의 기둥이로다. 너희들 촌동(村童)들은 분지르지도 말고 꺾지도 말지어다!”라고 하였다. 경술(庚戌, 1910) 중추(仲秋) 하순 만취(晩翠) 장수(長水) 황운룡(黃雲龍)이 기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