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운면 반송리 359-2 마을 앞 천변에 위치한 정자. 학남정과 나란히 서 있는 개안정은 상량문을 보아 1896년에 건립되었는데, 그 후 여러 번 중수하였다. 건물은 사모 지붕으로 정면2칸, 측면, 2칸의 벽체 없는 무실(無室)정자이다. 홑처마집이며 서까래와 기둥에는 석간주칠을 하였고 마구리는 흰색으로 도채하였다. 지붕의 기와는 전통 기와를 사용하였고 서까래와 기둥, 창방, 중인방, 하인방 등은 석간주로 칠하였다. 또한 서까래 마구리는 흰색으로 칠하였고 양 우주의 주초석은 가공 원형초석을 사용하였고 건물 양 측면의 중앙 기둥은 그대로 기단 위에 놓았다. 배면 쪽에 주초석이 하나 남아 있어서 수리할 당시에 잘못 계산하였거나 여분의 초석을 더 만들어두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루는 전통 우물 마루가 아닌 일본식 장마루로 대체되었고 니스칠이 된 흔적이 여기저기 보인다. 정자 안에는 박연창(朴淵昌)이 쓴 ‘개안정유사’ 판액(板額)과 ‘개안정상량문’ 판액(板額)이 걸려 있다.

    【開眼亭遺事】 鎭安縣治南三十里 有一勝區 乃盤松村也. 村前有溪 溪之源 出於八公山 縈廻于莘岩 岩勢磅磚 或聳或坎 仍作小湖 是乃濟龍江 以蟾津江上流也 江之畔 千年巨木鬱鬱蒼蒼 胸圍六抱 有若神明之威 二柱喬松 如盤如盖 嫗蹇佇立 有若丈夫之像 中有開眼亭 寔以供村叟杖屨之所以仍構者也 而遠呑白馬八公之山色 平揖銀河濟龍之江瀨 窮杜陵吉古平野之目 聞梧井梅山之香 眞可謂 騷人墨客之解 錦囊而吐 瓊琚之處也 時在駬南堂朴先生之 移京歸鄕 潛究性理之丙申年間 以 任 鎭 長 三郡 縣監之 互相存問 馬耳之南 復見君子云 而每期于此 或辯郡治做去觴咏 因爲年例事 板揭上樑文 卽任實倅 趙蕉田之所述也 南遊文章詞客 四時不絶 於是乎 斯亭之繁華 登鶴樓鳳坮矣 一自庚戌國恥後 世降俗弛 君子隱退 偏作村丁避暑之處 而額與文 板卽被島夷之所侵 兼無亭名之考證 而閒散無涯矣 至于庚申年間 村論歸一 而重修一新 然 未揭者 是額字與文板 恒塊于中者 多年就中 最可愛惜者 有二 是巨木喬松也 往年春 喬松一株 胸剖而枝葉凋零 是年六月二十八日午前十時三十分 天無風 地無揚塵而平穩日氣也 喞喞有聲而巨木半身 部折而倒臥 此由何以然歟 松之樹齡 三百年 木之樹齡 一千年 雖曰植物學者之辯 然 此喬松之在世 果三百年 巨木之在世 果一千年歟 噫 古人所謂死不可復生 折不可復續 果天壽 奈何 矧可愛惜也哉 與以村老之一登此避暑休息而坐 舍第淵喆君 四從姪昌燮君 與內戚孫姜君大沃 斂膝而請曰 盤松 卽是吾村名之冠 巨木 卽是吾村設基之原 喬木不可以不敬重 丁戊兩年 俱爲枯折 實吾村氓之率皆 嗟惜事也 不可以泯滅其由 書以本末 幸以補吾村史 而多年未揭之 開眼亭額字及上樑文 俱爲揭板之地 是吾村上下歸一之論 老昏中 悚惶無比 然 以副吾擧村之望云 故 余亦同感 不以不文辭 欣然而諾 以書其槪如右而額字 卽 自書 文 卽 索出於自家藏書中 抄而揭之 以補 後日之考證焉 歲 戊申(1968) 秋 七月 旣望 密陽 朴淵昌 書
    【개안정 유사】 진안 소재지 남쪽 30리에 경치 좋은 곳이 하나 있으니, 반송촌이다. 마을 앞에 시내가 있으니 수원이 팔공산에서 나와 신암에 감도는데 바위형세가 가득하여 혹 솟기도 하고 혹 파이기도 하여 작은 호수를 만들었으니, 이곳이 제룡강이요, 섬진강 상류가 된다. 강가에 천년거목이 울울창창하고 둘레가 여섯 아름이나 되니 신명의 위엄이 있는 듯하고, 두 그루 높은 소나무가 서린 듯 덮은 듯, 할미가 절름거리며 오래 서 있는 듯, 혹은 장부의 형상이 있는 듯 하다. 그 가운데 개안정이 있으니 이는 마을 어른들께서 집을 짓도록 제공한 것이다. 멀리 백마산과 팔공산의 산색을 머금고 평평히 은하 제룡의 강 물결을 굽어보면서 궁두능길(窮杜陵吉, 주변 지명) 옛 평야의 트인 곳에 오정 매산(梧井梅山)의 향기를 들으니, 참으로 문인묵객이 비단 주머니를 풀어 아름다운 옥을 토해 내는 곳이라 할만하다. 이남당(駬南堂) 박 선생이 서울을 떠나 귀향하여 성리학을 잠구(潛究)하던 병신(丙申, 1896)년간에 때맞춰 임실·진안·장수의 3군 현감이 서로 문안을 드렸다. 마이산 남쪽에서 다시 군자를 보겠다고 하면서 매양 이곳에 모여 혹 군정을 변론하기도 하고 술잔을 들고 시 읊는 것을 실행하여 연례사를 삼아 상량문을 판갈하니, 곧 임실 원 조초전(趙蕉田, 당시 임실군수 趙奎夏의 아호)이 지은 것이다. 남으로 노니는 문장사객이 사계절 끊이지 않아 이에 정자의 번화함이 황학루와 봉황대 만큼 되더니, 경술국치 이후로 세태는 타락하고, 풍속은 해이해져 군자들은 숨어버리고, 마을 청년들의 피서하는 곳으로 되어 버렸다. 이에 판액(板額)과 문판은 곧 일제가 침탈하니 정자 이름의 고증도 없어져 스산하기 이를 데 없다. 경신년간에 이르러 마을 의논이 하나로 돌아가 중수하여 일신하였으나, 액자와 문판을 걸지 못하여 항시 가슴에 뭉클한지 여러 해가 되는 가운데에도 가장 애석한 것이 둘 있으니 거목과 반송이다. 지난해 봄, 반송 한 주의 가슴이 쪼개지고 지엽이 말라 떨어지더니, 그 해 6월 28일 오전 10시 30분에 하늘에 바람도 없고 땅에 먼지도 일지 않았는데 찍-찍 소리가 나면서 거목 반신이 쪼개져 꺾어졌으니 이 무슨 이유인가? 송의 수령이 5백년이고 목의 수령이 1천년이라 한 것은 식물학자의 이야기라 하지만, 이 반송이 과연 삼 백년을 살았으며 거목이 과연 일천 년을 살았는가? 아! 옛사람이 이르기를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 못하고 꺾어지면 다시 이을 수 없는 것이라 했으니, 과연 천수에 어찌하리오! 애석한 일이로다. 촌로와 더불어 한번 여기에 올라 피서하면서 쉬고 앉았는데, 사제(舍第) 연철(淵喆)과 사종질(四從姪) 창섭(昌燮)이 내숙손(內戚孫) 강대옥(姜大沃)과 더불어 무릎 꿇고 청하기를, “반송은 곧 우리 동네 이름의 머리요, 거목은 곧 우리 동네 터를 열게된 근원이니, 경중(敬重)히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무(丁戊, 1967-1968) 양년에 함께 마르고 꺾어졌으니, 실로 우리 동민이 다 함께 슬퍼하는 일입니다. 그 사유를 빠뜨릴 수 없으니 본말을 써서 우리 동네 역사를 보존해야 하는데, 여러 해를 걸지 못했으니 개안정 액자와 상량문을 함께 게판하는 것이 우리 동네 상하의 한 뜻입니다. 노혼 중에 황송하기 그지없지만 우리 온 동네의 바라는 바를 들어주시오” 하기 때문에 나 또한 동감이라 글 못함을 사양치 못하고 기쁘게 허락하여 그 줄거리를 우와 같이 쓰니, 액자는 곧 내가 썼고 글은 내 집 장서 중에서 찾아내어 써서 걸어, 후일의 고증에 도움을 주고자 하노라. 무신년(1968) 7월 16일에 밀양 박연창이 쓰다.

    【開眼亭上樑文】 (□□은 판독불능 자) 簿書叢裡抽身出 欲察畝□□*艱難 雲水光中洗眼來 忽有亭□□蕭灑 翼然駿矚 足以暢情 念邑基處四塞深□之區 而民居無一片爽□之所 八公之螺鬟 隐若烟嵐 聳萬古之觀瞻 雙尖之馬耳 屹如風景 作一縣之形勝 奈旱澇項背之相継 而接濟鼻眼之莫開 受重瞳分憂之貴 寧忽自我民視也 顧四面被荒之處 莫如於吾身見之 於焉二東面行尋 不覺一隻眼驚拭 幾千疂雲屏好萊峰峨峨 六七里水聲聞莘谿 灾分三等之列 行遍一邑之中 嗟溢目之有憂 歎暢懷之無暇 蔀屋之疾苦方切若癏在躳 草堂之顔色忽生如瞽得目 心勞政拙惱爾銅章之虛縻 眼忽氣舒完如金箆之自刮 喜名區之獨擅 問主人兮爲誰 山居之耕鑿入眸禾麻菽麥 村秀之誦讀洋耳禮樂詩書 夫何濟龍之肇名 宜有模象之新號 脑襟爽豁那禁長在目之思 體勢淸閒允爲可捿身之地 思蒿目而幾惱 睇翠眉而忽凝 土肥泉甘地得人而尤美 峰迴路轉天教我而遍看 爰改二字 用助六郞. 兒郞偉抛樑東 眼底村閭東復東 骨秀神淸如夢覺 遅遅紅日照牎東. 兒郞偉抛樑西 黃雲滿眼大田西 華山灝氣如藍碧 遥望長安日下西. 兒郞偉抛樑南 蒼蒼上耳面其南 源頭活水淸如許 瀉出两峰杜苑南. 兒郞偉抛樑北 睡僊遥對山之北 石温處士今何居 悵望水南與水北. 兒郞偉抛樑上 榱角逈臨飛鳥上 髙處騁眸神忽驚. 依然身人瓊楼上 兒郞偉抛樑下 餙躳捿息於其下 欄頭百尺闢林霏 垤穴岈洼袵席下. 伏願上樑之後 亭額載新 石齒不老 對此云胡不樂吾心亦凉 望之蔚然而深子居何陋 名焉兹而志喜泉石居然 觀者慘兮忘歸水竹據了 歲 丙申(1896) 趙蕉田.
    【개안정 상량문】 바쁜 고을 업무에서 빠져 나와 농사의 상황을 살피려 하였는데, 빼어난 풍광을 보며 눈을 씻고 왔더니 홀연히 시원한 정자가 있구나. 나는 듯이 우뚝한 모습, 가슴을 씻어 내는구나. 이곳은 사방이 막힌 궁벽한 고을이어서, 어떤 마을에도 시원스레 터진 곳이 없다. 이내 속에 우뚝 늘어선 팔공산은 만고의 자랑이고, 풍경처럼 뽀족한 두 봉우리 마이산은 온 고을의 승경이지만, 가뭄과 장마가 이어져서, 눈코 뜰 새 없이 구제하기 바쁘니, 임금님과 수령처럼 존귀한 사람이라도 하늘은 백성들이 보는 대로 본다는 것을 어찌 소홀히 하겠는가. 사방의 재해를 당한 곳을 돌보는 것은 내가 몸소 보는 것이 제일이다. 이에 이동면(二東面, 지금의 백운면 일부지역)을 순행하다가, 나도 모르게 놀라 눈을 비비고 바라보네. 수천 겹의 구름 병풍에 싸인 내동산의 높은 모습, 6, 7리까지 물소리 들리는 신암리 계곡의 시내물, 재해(災害)는 3등급으로 하고, 온 고을을 다 순행해 보니, 눈에 근심이 가득한 것을 탄식하고, 회포를 풀 여가 없음을 슬퍼하게 되도다. 내 몸에 병이 있는 듯이 백성들의 고통을 절실히 느껴야, 소경이 눈을 뜨듯이 초당(草堂)의 안색이 활짝 펴지는 법이다. 마음으로는 애를 썼으나 정사(政事)가 졸렬하여 군수 자리 헛되이 차지한 것이 괴로웠는데, 갑자기 눈에 총기가 퍼지며 금빗[金篦]으로 눈곱을 긁어내는 듯하다. 명승을 독차지한 것을 기뻐하며, 주인이 누구인지 물어 보네. 산촌에 일군 전답에는 벼, 삼(麻), 콩, 보리 등이 보이고, 시골 수재가 글을 읽으니 예악(禮樂) 시서(詩書)가 귀에 가득하다. 제룡(濟龍)이란 명칭이 어찌하여 유래했나, 마땅히 이것저것 참조하여 새 이름을 지어야겠다.* 흉금이 상쾌하니 길이 음미하고픈 마음 어찌 하겠나. 체세(體勢)가 청한(淸閒)하니 충분히 깃들 만한 곳이로다. 세상의 환란 생각하면 근심이 쌓여, 눈썹을 찌푸리게 된다. 물 좋고 기름진 땅 적임자가 있어야 더욱 아름답고, 봉우리들 사이로 굽은 길 하늘이 다 보게 해 준다네. 이에 두 글자를 고쳐서* 대들보 세우는 사람들을 돕는다.
    어기영차! 대들보 동쪽에 던지자![兒郞偉抛樑東]* 눈 아래 시골 마을 동쪽의 동쪽, 빼어난 모습 맑은 정신 꿈에서 깬 듯, 더디 뜨는 붉은 해 동창을 비추네. / 어기영차! 대들보 서쪽에 던지자! 황운(黃雲)에 서쪽 대전(大田, 동창들)이 눈에 가득하여라. 화산(華山, 내동산을 가리키는 듯)의 넓은 기운이 푸르고, 멀리 보이는 長安에 해가 서쪽으로 지도다. / 어기영차! 대들보 남쪽에 던지자! 푸르디 푸른 상이암(上耳庵)이 남쪽으로 향했구나. 지극히 맑은 샘물이 솟아 나오고, 두원(杜苑, 반송리의 마을)의 남쪽에 두 봉우리(성수산)를 뿜어내었구나. / 어기영차! 대들보 북쪽에 던지자! 수선루(睡僊樓)가 멀리 산의 북쪽에서 마주보고, 석온처사(石温處士, 미상)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나, 물길 따라 여기저기 창망히 바라보네. / 어기영차! 대들보 위쪽에 던지자! 서까래 쭉 뻗은 곳에 새가 날아들고, 높은 곳으로 눈을 돌리니 정신이 번쩍 드는데, 의연(依然)히 이 내 몸은 경루(瓊樓) 위에 있구나. / 어기영차! 대들보 아래쪽에 던지자! 몸을 단장하고 그 아래 들어가니, 백 척의 난간 앞에 이내 서린 숲이 열리네, 임석 아래에 개밋둑이 우묵하도다. / 삼가 바라건대 상량을 한 뒤에 정자의 판액(板額)이 산뜻해져서 돌처럼 늙지 않아라. 이 정자를 대하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내 마음도 시원하고, 바라보니 우뚝하고 빼어나니 그대 거처 어찌 누추하랴. 이름을 짓고 나니 마음이 기쁘고 천석(泉石)이 반짝반짝하고, 바라보는 이는 날이 어둡도록 돌아가지 못하고 수죽(水竹)에 묻히기를 바라노라. 歲 丙申(1896) 조초전(趙蕉田, 당시 임실군수 趙奎夏의 아호)
    *제룡(濟龍)이란 천(川) 이름의 유래가 모호(模糊)한 것에 대한 자문(自問)인 듯.
    *당시 주변에서 정자이름을 제룡정(濟龍亭)으로 정했던 모양인데 개안정(開眼亭)으로 바꾼 사실을 말하는 듯 하다.
    *아랑위(阿郎偉)는 여럿이 힘을 모을 때 쓰는 감탄사 ‘어기영차’를 한문으로 표현한 글이고 포량동(抛樑東)은 ‘대들보 동쪽에 던지다’이다. 상량식을 할 때 만두나 떡 같은 음식을 사방으로 던지는 관습에서 유래한 말이다.
  • 백운면 임진로 1080[남계리 234]에 있는 정자. 국도 30호선 백운교 옆에 자리한 정자로 단기 4300(1967년)년 정미년 5월 3일 상량하였다. 백운면에 거주하는 경술생(1910년생) 동갑계원 25명이 건립하였다. 당시 계쌀 100가마를 들였으며 25명 계원의 명단이 경우정에 판액으로 걸려있다. 계원들은 모두 별세하고 그 자녀들이 계를 잇고 있다. 현재 백운에 10여명의 계원들이 거주한다. 정자에는 정귀영(鄭貴泳)이 쓴 기문과 계원들의 성명을 기재한 판액(板額)이 걸려있다.

    【庚友亭記】 鎭安之南, 南溪德峴之間, 有一小崗而其後大路, 直通全州市. 客車貨轍, 晝宵連續, 譁然有城府之物態. 前有淸溪, 流出十餘里, 有沼有淵, 浴斯可宜, 比若曾點之詠歸. 論之四圍, 仙閣仙人两峰, 逺近在東, 可占神仙之窟宅. 萊東山岳, 嶄嶄在西, 彷髴蓬萊仙遊徃來之跡. 地接雲水, 群山羅列南方, 如見錦繡奇花之妙. 馬耳筆峰, 屹然北立, 宛若文明之氣像. 崗之畔, 翼然有佇立者, 庚友亭也. 世皆楼亭之淸香淸趣而爲稱者, 不爲不多, 奚獨曰庚友也? 惟我庚戍同庚, 每佳節良辰, 會集崗山片, 致酒賦詩, 歡然談笑, 盡日暮歸, 仍成契案, 名之曰庚友契. 友也者, 友其德也. 千善萬行, 莫非以德爲最, 而外何他求? 亭亦契中所以建, 而揭楣顔庚友亭者, 以其然也.亭旣成, 同庚諸君子, 願有其記於貴泳, 顧此拙工, 累辭大匠之手, 而終是不獲, 恐未免覧者之嘲笑也. 噫! 方此世道彜倫掃地, 而朋友有信, 亦五倫之一也. 固守友誼者, 盛莫盛焉. 非徒會友遊亭, 呼酒賦詩爲能事, 足以責善輔仁之道, 爲法於當時, 則石交之情, 斯亭之名, 將流芳之無限矣. 以契以亭, 善始善終, 雖是契中僉彦之力, 特梁德隐在炯, 崔溪隐龍日, 崔雲岡峻泰, 林隐樵永春, 尸其事者也. 大韓光復後戊申端午節, 東萊鄭貴泳記.
    【풀이】 진안(鎭安)의 남쪽 남계(南溪)와 덕현(德峴) 사이에 작은 산등성이가 하나 있는데 그 뒤쪽의 큰 길은 전주시(全州市)와 직통(直通)하므로 객차와 화물차가 밤낮으로 계속 이어져서 떠들썩하게 성부(城府)의 물태(物態)가 있다. 그 앞에 맑은 시냇물이 있어 10여 리(里)를 흘러 나오는데 소(沼)도 있고 연(淵)도 있어 목욕을 하기에도 좋으니, 비교하자면 증점(曾點)이 시를 읊으며 집에 돌아가던 곳*과 같다고 하겠다. 사방 주위를 말하자면, 선각봉(仙閣峰)과 선인봉(仙人峰) 두 봉우리가 동쪽의 원근(遠近)에 있어서 신선(神仙)의 굴택(窟宅)을 점유할 수 있고 내동(萊東) 산악(山岳)이 서쪽에 뾰족하게 있어서 봉래산(蓬萊山)의 선유(仙遊)를 방불하게 한다. 왕래하는 자취는 땅이 운수(雲水 임실(任實)을 말함)와 접하였고 여러 산들이 벌여 있다. 남쪽은 마치 수놓은 비단과 기묘한 꽃들을 보는 듯하고 마이산(馬耳山)의 필봉(筆峰)이 우뚝하게 북쪽에 서있어서 영락없이 문명(文明)의 기상(氣像)과 같다. 산등성이 옆에 날아갈 듯이 우두커니 서있는 것이 경우정(庚友亭)이다. 세상의 모든 누정(樓亭)이 청향(淸香)이나 청취(淸趣)를 호칭으로 삼은 것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니로되, 어째서 유독 ‘경우(庚友)’라고 하였을까. 생각건대 우리 경술년(庚戌年) 동갑 친구들이 아름다운 계절의 날씨가 좋은 때에 산등성이 한쪽에 모여서 술도 마시고 시도 읊으면서 즐겁게 담소(談笑)하다가 해가 다하면 저물녘에 돌아오곤 하였는데 그대로 계안(契案)을 만들어 이름을 경우계(庚友契)라고 하였으니 벗이라는 것은 그 덕(德)을 벗하는 것이다. 천만 가지의 선행(善行)이 덕을 가장 높은 것으로 삼지 않는 것이 없으니 그 밖에 무엇을 구하겠는가. 정자 역시 계중(契中)이 건립해서 현판에 계우정이라고 내걸은 것은 그러한 까닭인 것이다. 정자를 만들고 나자 나이가 같은 여러 군자들이 나에게 기문(記文)을 쓰기를 원하였는데, 나를 돌아보매 솜씨가 변변찮아서 글을 잘 짓는 사람에게 누차 사양하였으나 끝내 그렇게 되지 못하였으니 보는 사람들이 비웃는 것을 면하지 못할 듯하다. 아, 바야흐로 지금은 세상 도덕과 인륜이 땅바닥을 쓸어 없앤 듯이 모조리 사라졌는데 붕우유신(朋友有信)도 또한 오륜(五倫)의 하나이니, 우의(友誼)를 굳게 지키는 것은 참으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일이다. 한갓 벗들을 모아 정자에서 놀면서 술을 부르고 시를 읊는 것만 능사로 삼지 아니하고 족히 책선(責善)하고 보인(輔仁)하는 도리로써 당시에 본보기가 되고 있으니 돌처럼 단단한 우정과 이 정자의 이름이 장차 무한토록 아름다운 향기를 전하게 될 것이다. 계(契)를 보거나 정자를 봐서는 선(善)하게 시작하고 선하게 마무리한 것이 비록 계중의 여러 선비들의 힘으로 만들어졌으나 특별히 덕은(德隱) 양재형(梁在炯), 계은(溪隱) 최용일(崔龍日), 운강(雲崗) 최준태(崔峻泰), 은초(隱樵) 임영춘(林永春)이 그 일을 주관한 사람들이다. 대한(大韓)이 광복(光復)한 뒤 무신년(戊申年, 1968) 단오절(端午節)에 동래(東萊) 정귀영(鄭貴泳)이 기문을 쓰다.
    *증점(曾點)이……돌아가던 곳 : 공자(孔子) 앞에서 여러 제자들이 각기 제 뜻을 말할 때 증점(曾點)이 남다르게 술회(述懷)하여 공자의 동감(同感)을 얻은 말. 『논어』〈선진(先進)〉편에 의하면, “늦은 봄에 봄철 옷이 만들어지면 어린애 6-7명을 데리고 함께 기수에 가서 목욕하고 무에 가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며 돌아오리라.”고 하였다고 한다.
  • 동향면 신송리 774-1, 고무정마을 큰길가 건너편에 있는 정자. 2016. 12. 28 진안군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마을사람들이 1966년(丙午) 고무정 마을 앞에 건립하였고, 1987년에 중수하였다가 다시 2016년에 중수하였다. 고무정이란 이름은 이 정자의 동쪽에 선인봉(仙人峰), 남쪽에 옥녀봉(玉女峰)이 있고, 두 봉우리 사이에 고봉(鼓峰)이 위치해 있고, 북쪽에 무봉(舞峰)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곳에 정자가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 한다. 마을 이름도 이 정자 이름에서 유래하여 붙여지게 되었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정자 건축이다. 평평한 대지에 자연석 덤벙주초를 놓은 다음 두리기둥을 세우고 창방으로 결구한 다음 지붕을 얹었다. 기둥 상부는 주두를 얹었으며 곡이진 대들보를 단변 방향으로 걸치고 그 위에서 충량을 직각 방향으로 맞대어 걸었다. 기둥 상부 두공은 끝부분을 직각으로 자른 직절 초익공 양식으로 특별한 조각 없이 소박하게 꾸몄다. 추녀 쪽 서까래는 평연에 가까운 말굽 서까래형으로 걸고 있으며 기와는 암수 일체식 시멘트 기와로 올렸다. 내부 바닥은 우물 마루를 깔았으나 근래에 개량한 것으로 보이고, 난간은 후대에 중수하면서 기대어 앉을 수 있도록 2단으로 설치하였다. 상부 천정은 대들보 위에 양 방향으로 충량을 걸고 대들보 위에 대공을 세운 다음 충량과 접하여 중앙부를 우물 천장으로 마무리하였다. 부재는 가칠 단청으로 마감하였다. 정자 안에는 성두봉(成斗奉)의 고무정기(鼓舞亭記)와 창립계원 23인의 명단과 1987년 중수계원 29명의 판액(板額)이 걸려 있다.

    【鼓舞亭記】 歲在丙午暮春 鼓舞亭居住諸賢 欲效蘭亭之遊 仍竪亭於仙人峰下 鼓峰之前 可謂 遠近勝景 獨占此亭也 仙人在東 玉女在南 鼓峰居中 舞峰在北 明山麗水 四面相照 玉女貴人左右端整 令人一見 不覺 鼓之舞之樂也 噫 謀成韻致之事業者 若非特志之士 不可也 晉陽人 姜鎬映 獨擔此役而晝宵靡懈 二個月餘乃告竣工 寔罕有之功也 洛城之日 余亦以請賓 參在座中 不勝欣感而妄擧蕪筆 以表鎬映之特志焉 丙午 四月 一日 逸雲 成斗奉 記
    【고무정 기】 병오년 늦은 봄에 고무정마을에 사는 제현(諸賢)이 정자를 지어 노닐고 싶어 선인봉 아래 고봉(鼓峯) 앞에 정자를 세웠으니 원근의 경치를 이곳에서 독점하고 있다 할 것이다. 선인(仙人)은 동쪽에 있고, 옥녀(玉女)는 남쪽에 있고, 고봉은 그 가운데, 무봉(舞峯)은 북쪽에 있어, 명산(明山) 여수(麗水)가 사면에서 마주하고 옥녀(玉女) 귀인(貴人)이 좌우(左右)에 단정(端正)하니 사람으로 하여금 얼핏 봐서는 고무(鼓舞)의 즐거움을 깨닫지 못하게 한다. 희(噫)라! 이런 운치 있는 일을 도모함에는 특지(特志)를 가진 사람이 없으면 못할 일이라, 진양인(晉陽人) 강호영(姜鎬映)이 이 역사(役事)를 홀로 맡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여 2개월 여만에 준공하게 되니 참으로 드문 공로라 할 것이다. 낙성일에 나 역시 초청해주어 좌중에 참석하였다가 즐거운 기분을 누르지 못하여 망령되이 거친 붓을 놀려 강호영의 특지를 드러내고자 한다. 병오(丙午, 1966)년 4월 1일에 일운(逸雲) 성두봉(成斗奉)은 기하노라.
  • 백운면 신암리 777 섬진강 상류 천변에 있는 정자. 전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지붕으로 백운면 출신 기사생(1929년) 계원들에 의해 1982년 건립되었다. 정자에는 ‘기우정기’와 ‘계원방명’이 동일한 판액에 기록되어 걸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