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담댐 수몰 이전 용담면 옥거리 상거마을 서북쪽 수성천변 절벽위에 있다가 용담면 수천리 13-15 용담 망향의 동산에 이건된 누정. 1984. 4. 1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102호로 지정되었다. 도리 기둥에 난간을 갖춘 전면 3칸, 측면 2칸, 팔작 기와지붕의 정자이다. 용담댐 수몰로 1998년 현재의 자리로 이건(移建)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본디 태고정이 있는 자리에는 15세기 말 경에 현령 조정(趙鼎)이 지은 이락정(二樂亭)이라는 작은 정자가 있었다. 그 뒤 현종 7년(1666) 당시의 현령 홍석(洪錫 1604~1680)이 새로 고쳐 짓고, 이름도 태고정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홍석은 1665년 용담향교를 개축하고, 1668년 삼천서원을 창건한 사람이다.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이 쓴 ‘태고정(太古亭)’의 현판과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쓴 ‘용담현 태고정기(龍潭縣太古亭記)’의 현판이 있는데, 홍석은 삼학사의 하나인 김상헌(金尙憲)의 문인으로 성품이 맑고 곧아 병자호란이 굴욕적인 화의로 끝을 맺자 벼슬을 단념하고 태백산 춘양(春陽)에 은거하며 학문을 닦아 ‘태백산오현(太白山五賢)’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 뒤 송시열 등에게 추천되어 벼슬에 나아갔다가 60세에 이르러 용담현령에 제수(除授)되었던 바, 조정에도 그의 인품을 존경하는 사람이 많았던 듯 하다. 송시열이 지은 기문으로 보면, 본래 그 자리에는 만송정(萬松亭)이 있었는데 퇴락하여 버리고, 그 자리에 집 한 채를 짓고 온돌방을 마주보도록 꾸며 남쪽은 와선실(臥仙室, 신선이 누워있음)이라 명명(命名)하고, 북쪽은 이은실(吏隱室, 벼슬자리를 떠나고 싶음)이라 하였으며, 이은실의 북쪽에 또 작은 헌(軒)을 하나 지어 주홀(株笏, 벼슬아치가 지니는 홀을 꽂아버리다)이라 하였고 한다. 모두 홍석 자신이 명명하고 자기(송시열)에게 이 사실을 기술해 달라기에 “세 가지 이름이 좋기는 하나 모든 것은 하나로 귀결하는 만큼 태고정(太古亭)이라 합해서 불렀으면 좋겠다”라고 권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로 보면 당시의 태고정은 지금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태고정의 원형이던 이락정(二樂亭)은 주자천이 반석과 바위사이를 스치고 흐르는 천변 옆에 몇 장 높이의 절벽이 있고, 그 위에 소나무가 무성한 절경에 세워진 정자였다. 이락정(二樂亭)은 ‘군자는 산과 물을 좋아한다(樂山樂水)’는 뜻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름은 오래 가지 못하고 소나무가 많다 하여 만송정(萬松亭)이라 불렸는데,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태고정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1911년 봄 조선총독부에서 국가에 헌납케 한 후 국고수입을 올린다는 구실로 공매처분하게 되었다. 그 때 수천리(壽川里) 송림마을의 임소환(林昭煥)이 조선총독부에서 당시 화폐로 250원에 매수한 후 용담현(龍潭縣)의 공유물로 기증하였다. 그 뒤 용담댐으로 터가 수몰되는 바람에 지금의 남산마루에 이건하게 된 것이다. 태고정은 용담현 제1루인만큼 본시 많은 판액(板額)이 걸려 있었을 것이나 세월이 지나고 이건(移建)을 거치면서 남아있는 게 거의 없으나 다행히 송시열기(宋時烈記)는 판액이 남아있고, 이경석 기(李景奭記)는 원문이 『진안지(1925)』에 실려있어 그 전말(顚末)을 알 수 있다.

    【宋時烈記】 萬松亭在龍潭衙舍之西偏 雖有蒼翠蔟立 而蓁莽蓊鬱勝致埋沒焉 歲甲辰洪侯錫君敍來莅 縣事公餘登覽而樂之 卽輦燔疏剔 先搆一屋 而對置燠室 南曰臥仙 北曰吏隱 又吏隱之北 構一小軒曰柱笏 皆侯之所名也 旣成 侯以書來 請記其事 余謂三者之名則美矣 然凡物會之歸一 請以太古之亭 合而名之可乎 盖侯之爲政 撲素醇質 絶去俗吏之習尙 故其按使閔公維重 書其考曰 一境太古 斯不可無傳 傳之不可不揭之斯亭 使後之登斯亭者 有所觀慕焉 或曰舊名萬松亭 據其實也 今易之以此 無乃爽其實 而近於誇乎 余曰斯亦其實也 夫縣境深僻 民稀俗厖 侯因而撫之 不事外飾 斯非今世之所尙也 盖侯以簪纓世家 隱於深山之中 淸陰先生 嘗欲隱居求志 薦於朝 孝考朝 竟蒙獎拔 侯旣不色喜 又不索高 去就眞率 無心咎譽 及來此縣 日與山氓 問桑說麻 抛棄敲扑 時以布衣葛巾 仰而見山 俯而聽泉 兀然無朱墨之累 則吏隱之趣 在是矣 時寄軒窓 悠然有出塵之想 而升沈得失 不入於心境之間 則臥仙之興不小矣 巖峀秀拔 雲烟開歛 獨立騁眺 朝暮不厭 則拄笏之意可知矣 然則其人也 甚宜於其境其民矣 宜其按使之以是書其考也 此皆其實事也 以實而易其實 斯乃所以以不易 易之矣 何實之爽 而誇之爲近耶 然侯之意 以爲吏隱 不如眞隱 臥閣之仙 不如臥雲之仙 拄笏看山 不如捨笏而看 將有謝紱歸來之計 早晩北窓之下 陶然若羲皇上人 則是乃眞太古矣 然則斯亭之名 益抵於實 而傳之無愧矣 其扁額及溪壑八字 同春宋浚吉之筆云
    【풀이】 송시열 기(宋時烈記)
    만송정(萬松亭)은 용담(龍潭) 관아(官衙)의 서쪽에 있는데, 비록 푸른 뫼뿌리가 죽순처럼 솟아있으나 잡초가 무성하여 승개(勝槪)를 엿볼 수 없었다. 갑진년(甲辰年)에 홍후 석(洪侯 錫) 군서(君叙, 자인 듯)가 이 고을을 맡아 왔다. 공무의 여가를 이용하여 이곳에 등림하여 즐기고 즉시 연번(輦燔)*하고 개척하였다. 홍후는 먼저 집 한 채를 짓고 온돌방을 마주보도록 꾸몄는데, 남쪽은 와선실(臥仙室)이라 명명(命名)하고, 북쪽은 이은실(夷隱室)이라 하였다. 이은실의 북쪽에 또 작은 헌(軒)을 하나 지어 주홀(株笏)이라 하였는데, 모두 홍후(洪侯)가 명명한 것이다. 집이 낙성되자 홍후가 서신을 보내서 이 사실을 기술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리하여 내가 이르기를 “세 가지 이름이 좋기는 하나, 모든 것은 하나로 귀결하는 만큼 태고정(太古亭)이라 합해서 불렀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대체로 홍후의 정사(政事)는 박소(樸素)하고 순질(醇質)하여 속리(俗吏)의 습상(習尙)을 떨쳐버렸기 때문에, 그 곳 관찰사 민공(閔公) 유중(維重)이 고과(考課)를 매기기를 “일경(一境)이 태고(太古)스러우니 이는 전하지 않을 수 없고, 전한다면 정자에 내걸어 후일 정자에 오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보고 사모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혹자는 이르기를 “옛 이름인 만송정은 사실에 입각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지금 이 명칭으로 고친다면 이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 되고 과장에 가까운 것이 되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 역시 사실에 입각한 것이다. 무릇 이 고을은 경지가 깊고 궁벽하여 백성은 드물고 풍속이 순박하다.”고 하였다. 홍후는 이에 순응하여 안무(安撫)하고 외식(外飾)을 일삼지 않으니, 이는 지금 세상에서 숭상한 바가 아니다. 홍후는 잠영(簪纓)의 세가(世家)로 깊은 산 속에 숨어 지냈는데, 청음선생(淸陰先生)이 일찍이 은거하며 뜻을 기르다 조정에 천거하여 효종조에 마침내 발탁이 되었다. 홍후는 색(色)을 좋아하지 않았을 뿐더러 고답적인 것도 좋아하지 않았고, 거취가 진솔(眞率)하여 훼예(毁譽)에 관심이 없었다. 그리하여 이 고을에 와서는 날마다 산골 백성들과 어울려 농상(農桑)에 관한 이야기만 주고받으며 고복(敲扑)*은 포기한 채 때때로 포의(布衣)와 갈건(葛巾)으로 우러러 산을 보고 굽어 시냇물을 들으면서 올연(兀然, 고답적인 모양)히 문부(文簿)에 구속됨이 없었으니, 이은(夷隱, 관리가 되어 은거하다)의 지취(志趣)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또 때때로 헌창(軒窓)에 기대어 유연(悠然)히 진세(塵世)를 떠난 상념(想念)이 있었고, 승침(升沈)과 득실(得失)이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았으니, 와선(臥仙)의 흥취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곳에 있으면 암수(巖岫)는 수발(秀拔)하고 운연(雲煙)은 개합(開闔)한데, 홀로 서서 조망(眺望)하면 아침저녁으로 싫은 생각이 없었을 터이니, 주홀(柱笏, 홀을 꽂음)의 취미를 알 만하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그 지경과 그 백성들에게 매우 적절한 사람이니, 관찰사가 고과에 그렇게 적은 것이 마땅하다 하겠다. 이것들은 모두 실사(實事)이다. 실사를 가지고 실사를 바꾸니 이는 바뀌지 않은(변함이 없는)것으로 바꾼 것이다. 무엇이 실실(失實)이고 과장에 가까운 것이 있는가? 그러나 홍후의 생각은 이은(夷隱)이 참으로 숨은 것만 못하고, 관각(館閣)에 누웠던 신선처럼 운림(雲林)에 누웠던 신선만 못하며, 홀(笏)을 꽂아놓고 산을 구경하는 것이 홀을 버리고 산을 구경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이제 곧 인수(印綬)를 버리고 돌아올 생각을 하고 있어 조만간에 도연(陶然, 마음에 흐뭇해 하는 모양)히 북창(北窓) 아래에 누워 희황상인(羲皇上人)*처럼 될 것이니, 이야말로 참다운 태고(太古)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정자의 이름은 더욱 실(實)에 가까움이 되니, 전해짐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그 판액(板額)(扁額)과 계학(谿壑) 여덟 글자는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의 글씨이다.
    * 연[輦]은 도끼 톱 따위의 연장을 실어 올린다는 뜻이고, 번[燔]은 불사른다는 뜻.
    * 관장이 백성에게 교령[敎令]을 가르치는 도구. 긴 것이 고[敲]이고, 짧은 것이 복[扑]이다.
    * 복희씨[伏羲氏]이전 사람, 즉 태고시설 사람이라는 뜻. 高臥北窓下, 自謂羲皇上人[陶潛]

    【李景奭記】 余自暮春 抱情鐘之慘 不事文字矣 今者玉川洪使君 抵書爲其新構之閣 願得二十八字 以輝楣壁 拙詞何足以副其望 而其意勤矣 亦何可孤 詩不暇焉 應之以無韻之文 夫吏上者 子赤子急 而宣鬱豁襟 臨莅之所 不可缺 民社之暇 捐俸鳩財 營得亭榭 不亦善乎 吾素聞玉川 如歐陽之滁 環邑皆山 峰攢水複 境絶路險 莫有稱一勝槩者 故會贐知縣之行云 行穿虎豹千重嶺 坐壓蛟龍萬丈潭 以爲實際語 今據使君之揭示而述之 盖別有洞宇 爲富媼所秘 而使君宜探發之 其猶燕喜亭之丘荒 輦且燔而突然者 亦猶訾家洲之莽蒼伐惡 制奧而條見者乎 雖天作地勝 得人乃著 而勝益奇 不其然乎 堂之扁以吏隱者 冠百丈奇巖之上 高松古檜 連雲切霄 下有淸川 如龍之掉尾 長鏡新磨 素練平鋪 白沙彌望 點塵不到 不秋而霜 未冬而雪 三伏倚欞 爽氣來襲 左壓邑里 朝暮炊烟 如赤城之霞氣 右俯郊坰 襏襫攸集 綠鍼抽水 黃雲擺隴 俱可觀也 至於蒼巒合畓 泓峭交映 紫綠萬像 嵐靄千變 此則几案之所可收 非圖畵之所可輸也 亭名臥仙者 與吏隱堂相連 其曰柱笏軒者 當前楹 卽一區而異其額 其得之庭戶之間者 略同焉 使君辟地於嶠南太白山之下 可謂隱矣 得此巖洞捷息焉 其亦爲隱谷而盤旋者歟 夫隱於隱者 隱而不能爲隱 隱於不隱者 不隱而能爲隱 隱於吏者是也 是以古者 以城市之隱 爲大隱 使君之取以爲名者 孰不曰名副其實也 其曰柱笏者 亦豈無鸞情鳳想之極雲霄者乎 竊所獨怪者 三島十洲 渺乎茫然 鞭龍駕鶴 孰能覩之 而人或慕之者 取其飛昇也 而今稱臥仙何也 此亦可見其不憑虛也 柳子曰 無事爲閒 不死爲仙 夫呑金餌玉 久視長生 非儒者所可感 惟其閑靜高臥 自在烟霞爲衛 雲月爲朋 殆仙與隱 無甚別焉 使君之意 其在斯乎 顧吾不能無訝於使君者 洞天勝地之水雲光景 何獨占之專 而不與之分乎 如有意取溪藤之如白雲如白雪者數百張 或寫以長篇短詠 或以松檜間漫錄 或以川石上濯纓之所述 付之風便 則千里爲跬步 萬景來吾左右矣 此則亦不可隱也 使君以爲何如使君名錫吾 一見而莫逆者也 遂爲之記 又以此答之云
    【풀이】 나는 모춘(暮春)에 정종(情鍾, 유자[幼子])의 참변을 당하고부터는 문자(文字)에 관한 일에 손을 대지 않았는데, 이번에 옥천(玉川, 용담의 고호)의 홍사군(洪使君)이 서신을 보내서 그가 새로 지은 전각(亭閣)에 이십팔 자(二十八字, 절귀[絶句]를 뜻함)를 얻어서 문미(門楣)를 빛내고 싶다 하였다. 그러나 졸시(拙詩)가 어떻게 그의 소망에 부응할 수 있겠는가? 또한 그의 간청이 절실하니 어떻게 저버리겠는가? 시는 지을 겨를이 없으니 운자(韻字)가 없는 글로 부응하겠다. 무릇 관리로 으뜸이 되는 것은 백성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으나, 답답함을 풀고 흉금(胸襟)을 펴는 것도 재임(在任)에 없어서는 안 되므로, 백성과 농사의 겨를에 녹봉(祿俸)을 덜고 재력을 모아 정사(亭榭)를 짓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평소에 들으니, 옥천은 구양수(歐陽修)의 저주(滁州)*와 같아 고을의 주위는 모두 산이어서 봉우리는 모이고 물은 겹쳤으며, 지경은 외떨어지고 길은 험하여 하나도 좋은 경치가 없다고 하였다. 일찍이 지현(知縣, 수령의 뜻)의 행차에 지어 주기를 “걸음은 호표의 천중 고개를 뚫고, 앉으면 교룡의 만장 못을 내려다본다.(行穿虎豹千重嶺, 坐壓蛟龍萬丈潭)”라 하였는데, 이는 실제를 그린 말이다. 이제 사군(使君)이 계시한 바에 의거하여 기술하자면, 대체로 별천지의 동우(洞宇)가 부온(富媼)*의 숨긴 바 되었으니, 사군은 의당 개발하여야 하고, 이는 그대로 연희정(燕喜亭)*이 황폐된 것은 연번(輦燔)하여 우뚝하게 한 것보다 낫고, 또 자가주(訾家洲, 미상)의 무성한 잡목을 베고 터서 잠깐 보는 것보다는 나은 것이 아니겠는가? 비록 하늘이 만든 승지(勝地)라 하더라도 사람을 얻어야만 드러나고 경치도 더욱 아름다워지는 것이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當)으로 이은(夷隱)이라 명명한 것은 백장(百丈)의 기암(奇巖)을 이고 있는데, 위에는 고송(高松)과 고회(古檜)가 구름과 연하여 하늘을 찌르고, 아래는 맑은 시내가 있어 용이 꼬리를 흔드는 듯하다. 기다란 거울을 새로 닦아놓은 듯, 흰 비단을 반듯이 펴놓은 듯, 하얀 모래는 한 점의 티끌도 없으며, 가을이 아니라도 서리가 내린 듯 하고, 겨울이 아니라도 눈이 내린 듯 하니 삼복(三伏)에 기둥에 기대어 섰으면 서늘한 기운이 엄습한다. 왼쪽으로 읍내(邑內)가 내려다보이는데, 조석으로 밥짓는 연기는 마치 적성(赤城, 중국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산 이름인데, 산이 붉은 빛의 토산[土山]어서 먼데서 보면 노을이 피어오른 듯하고 표기[標旗]를 세워놓은 듯하다고 함)의 노을과 같다. 오른쪽으로는 들판이 굽어보이는데, 도롱이들이 모이고 푸른 싹이 물위에 솟아나며, 누런 구름이 언덕 사이에 피어오르는 듯한 광경들은 모두 볼 만한 정경이다. 창만(蒼巒)이 전답과 합해지고 물과 산이 어울려 비치며, 자록(紫綠)이 만상(萬像)이고, 남애(嵐靄)가 천변(千變)함에 이르러서는 문자(文字)로 수습할 수 있지 그림으로는 형용할 수가 없다 하겠다. 와선(臥仙)이란 정자는 이은당(夷隱當)과 연해 있고 주홀헌(柱笏軒)은 앞에 있어 같은 구역이지만, 이름은 달리하고 있는데 호정간(庭戶間)에 있는 것만은 대충 같다. 사군은 영남의 태백산(太白山) 아래에 땅을 개척하였으니 가위 숨었다 할 수 있는데, 이 골짜기를 얻어 살고 있으니 이 역시 은거하여 반선(盤旋)할 곳이란 말인가? 무릇 숨어야 할 처지에 숨는 것은 숨어도 숨는 것이 아니며, 숨지 못할 처지에서 숨는 것은 숨지 않아도 능히 숨는 것이니 관리로 숨는 것이 바로 이 경우이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에는 성시(城市)에서 숨는 것을 대은(大隱)이라 하였는데, 사군이 따다가 이름으로 삼았으니, 뉘라서 명실(名實)이 상부(相副)한다 하지 않겠는가? 또 주홀헌(柱笏軒)이라 이름한 바는 어찌 난봉(鸞鳳)의 정취(情趣)가 운소(雲宵)에 극한 바가 없겠는가? 유독 저으기 괴이하게 여기는 바는 삼도(三島)와 십주(十州, 모두 신선이 사는 곳)는 아득하고 감감하여 용(龍)을 채찍질하고, 학(鶴)을 몬다 해도 누가 능히 눈으로 볼 수 있겠는가마는 사람들이 혹 선망하는 것은 날아서 오르는 뜻을 취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와선(臥仙)이라 칭한 것은 무슨 뜻인가? 이 역시 그의 생각이 빙허(憑虛, 가공[架空])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유자(柳子)*가 말하기를 “일이 없는 것이 한가한 것이고, 죽지 않은 것이 신선이다”고 하였다. 무릇 금단(金丹)을 삼키고 옥설(玉屑)을 마신다 해도 오래 보고 오래 사는 것은 유자(儒者)로서는 생각해 보지 못한 바이고, 오직 한정(閑靜)을 취하고 높이 누웠으면 저절로 연하(煙霞)가 호위를 하고 운월(雲月)이 벗이 되어주나니, 신선과 은자(隱者)는 자못 큰 차이가 없는 것인데 사군의 취지가 혹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는지. 그러나 돌이켜보면 나는 사군에게 석연치 않은 바가 있으니, 동천(洞天) 승지(勝地)의 산수(山水)와 연운(煙雲)의 경치를 어찌 독점하고 함께 나누어 가지지 않는지 모르는 일이다. 만일 사군이 뜻이 있다면 계등(溪籐)이 백운(白雲)과 같고, 백설(白雪)과 같은 것을 수백 장 그리든지, 혹은 장편(長篇)과 단영(短詠)으로 읊든지, 혹은 송회(松檜) 사이에서 만록(謾錄)한 것이든지, 혹은 천석(川石) 위에서 탁영(濯纓)한 기술을 풍편(風便)에 부쳐준다면, 천리(千里)를 반걸음으로 달려와 일만 경치가 나의 좌우에 있게 될 터인데, 이 역시 숨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가? 사군은 어찌 생각하는가? 사군의 이름은 석(錫)이니 내가 한 번 보고 막역(莫逆)으로 여긴 분이다. 이로써 기(記)를 삼고 아울러 이로써 답하는 바이다.
    * 중국 안휘성[安徽省]에 있는 지명인데 송나라 때 구양수[駒陽修]가 이곳에 있는 취옹정[醉翁亭]에 기[記]를 쓰면서 “온 주위는 모두 산이다.[環除, 皆山也]”라고 하였는데, 그 뜻을 인용한 말이다.
    * 지신[地神]의 별칭. 땅은 풍부한 자원을 갖고 있기 때문에 부쳐진 이름이다.
    * 중국 광주부[廣州府] 연주성[連州城]에 있는 정자 이름인데 당[唐]나라 한유[韓愈]가 기[記]를 지었다.
    * 당[唐]의 유종원[柳宗元]을 가리키는 말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