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령면 강정리 산57에 있는 누정. 1984년 4월 1일전라북도의 문화재자료제16호로 지정되었으며, 2019년 12월 30일대한민국의 보물제2055호로 승격되었다. 소유자 및 관리자는 연안 송씨 문중이다. 수선루는 월운(月雲)마을 앞으로 흐르는 섬진강을 따라 약 1km 남짓 거슬러 올라간 천변의 암굴(岩窟)에 위치하고 있으며, 숙종 12년(1686)에 연안 송씨(延安宋氏) 4형제 진유(眞儒), 명유(明儒), 철유(哲儒), 서유(瑞儒) 등의 네 형제가 선대의 덕을 추모하고 도의를 연마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수선루’라는 명칭은 목사 최계옹(崔啓翁, 1654년(효종 5)~미상)이 이들 4형제가 갈건포의(葛巾布衣)하며 팔순이 되도록 조석으로 다니며 풍류함이 진나라 말년에 전란을 피하여 협서성의 상산(商山)에 은거한 동원공(東園公), 하황공(夏黃公), 용리선생(用里先生), 기리수(綺里秀) 등의 기상과 같다 하여 명명했다고 전해진다. 고종 21년(1884) 후손 송석노(宋錫魯)가 중수하였고, 고종 25년(1888년)에 재중수한 이래 여러번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자는 자연암굴을 이용하여 2층으로 세워져 있고, 2층 중앙에 ‘睡仙樓’라는 현판이 있으며, 1층의 문을 통하여 오르게 되어 있다. 자연 암반 속에 지은 누정 건물로 2층이다. 맞배 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전통 기와를 사용한 건물이다. 정면은 전통 기와를 사용하였으나 배면의 지붕은 석판을 사용하였고 정면은 겹처마이나 배면은 홑처마 지붕이다. 정면의 향 우측이 출입구이고 가운데 칸이 마루 칸이며 왼쪽에 방을 들였다. 왼쪽 방의 아궁이는 건물 뒤편에 마련되었고 방을 이루는 뒤쪽 기둥은 흰개미 등의 충해를 입었다. 단청은 새롭게 칠해졌으며 연목에는 연화머리초, 연목마구리는 3태극, 부연은 녹화머리초를 사용하였고 주두는 녹화결련금으로 베풀었다. 대들보는 연화머리초에 인휘로 구성되었고 머리초와 머리초 사이의 계풍에는 금문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번안하여 올렸다. 마루와 방이 연결되는 벽면에는 산수화, 화조화, 화병화, 백학, 호랑이 물고기, 매화 등의 민화가 그려졌고 대들보 위쪽의 왼쪽 벽면에는 흰 수염을 가진 선비들이 바둑을 두는 장면이 그려졌다. 그림에는 4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연안 송씨 4형제를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은 80세가 넘도록 아침 저녁으로 정자를 오르내리며 바둑도 두고 시도 읊었는데 그 모습이 옛날 사호(四皓)의 네 신선이 놀았다는 이야기와 비슷하다하여 정자의 이름이 수선루가 되었다. 대들보 위쪽의 오른쪽 벽면에는 이들보다 더 나이 든 노인들이 그려져 있어 세대 간의 어떤 이음을 표현하는 듯하다. 마루는 전통 우물 마루이고 건물 앞쪽의 쪽마루를 내달고 난간을 돌렸다.

    【睡仙樓重修記】 宋氏睡仙樓 在鎭安縣西山水交會之地 淸曠明塏 人之登眺者 爽然若羽化而登仙焉 盖宋氏之先 有四昆季 隱居行義 年皆八耋 而布衣葛巾 日夕逍遙於斯樓 遺世有商皓氣像 樓名以此 不亦宜乎 年久而頹圮 後孫諱錫魯 懼先蹟之泯沒 重修而新之 於是 山益秀水益淸 一區形勝 自成物外之界 微後孫追遠之孝 孰能使四公之遺躅 復明於世也 然景物之勝 皆有以助當日塤箎之樂 則其家風之敦睦 亦可想像矣 後人繼述 豈徒爲一樓之重新而已哉 四公之諱 眞儒明儒哲儒瑞儒 世家延安云爾 崇禎紀元後五戊子季秋下澣 德殷宋秉璿記
    【수선루 중수기】 송씨(宋氏)의 수선루(睡仙樓)는 진안현(鎭安懸) 서쪽 산과 물이 합쳐지는 곳에 있는데, 맑고 넓고 밝고 조촐하여 등조(登祚)하는 사람에게 상쾌함을 주며, 마치 우화등선(羽化登仙)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대체로 송씨의 선대에는 4형제가 있어 숨어 지내면서 의롭게 살았는데, 나이가 모두 팔십 줄이었고, 포의(布衣)와 갈건(葛巾)을 하고 조석으로 이 다락에서 소요(逍遙)하면서 세상을 보내니, 상산 사호(常山四皓)의 기상이 있었다. 다락의 명칭을 수선(睡仙)이라 한 것이 어찌 타당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해가 오래되어 퇴락하였는데, 후손 휘 석로(錫魯)가 선세 사적이 민몰(泯沒)할까 두려워하며 중수하여 새롭게 하였다. 이에 산은 더욱 수려하고 물은 더욱 맑아져 한 지역의 형승(形勝)이 저절로 물외(物外)의 세계를 이루게 되었다. 후손의 추원(追遠)하는 효성이 아니었다면 뉘라서 4공(公)의 유적으로 하여금 다시 세상에 드러나게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경물(景物)의 승개(勝槪)는 모두 당시 훈지(塤篪, 伯氏吹塤, 伸代吹篪. 형제의 화락을 뜻함)의 즐거움을 도왔으니, 가풍(家風)의 돈목(敦睦)을 상상할 수가 있겠다. 후손의 계술(繼述)이 어찌 다만 다락 하나의 중수에 그칠 따름이겠는가? 4공의 휘는 진유(眞儒)·명유(明儒)·철유(哲儒)·서유(瑞儒)이고, 세가(世家)는 연안(延安)이다. 숭정기원후 다섯 번째 무자(戊子, 고종 25. 1888) 계추 하한에 덕은(德殷, 思律고호) 송병선(宋秉璿)이 기술하다.

    【重修睡仙楼記】 於戱尙哉! 惟我七世祖四昆季, 不慕榮利, 素愛水山, 共起此楼者, 数百有載矣. 其間后賢, 種種修理, 而風雨飛揚, 簷瓦觧漏, 樑彩渙渝, 先蹟幾乎泯没也. 後孫致順星煥, 不勝戒懼, 招匠人而補治, 邀畵師而揮灑, 於是乎楼顔如舊, 先蹟復新, 斯非追慕勉述之萬一乎㦲? 詩曰, 靡不有初, 鮮克有終. 恭惟来来之仍, 以古視今, 視今嗣后, 則永先楼之光華夫! 崇禎紀元后嵗在甲戌九月下澣, 七世孫相冕陳情謹誌. 宗孫 俊煥 / 監彩 翼煥, 成濂 / 匠事 教煥 / 有司 致順, 星煥
    【중수 수선루 기】 아, 오래 되었구나. 생각건대 나의 7세조(世祖)인 네 형제분이 영화와 명리를 부러워하지 않고 평소에 산수(山水)를 사랑하여 함께 이 수선루(睡仙樓)를 지은 지 수백 년이나 되었다. 그 동안 후손들이 종종 수리를 하였으나 비와 바람이 불어 닥치면 처마의 기와가 부서져 물이 새고 들보의 채색이 바래고 벗겨져서 선대의 유적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이에 후손 치순(致順)과 성환(星煥)이 두려움과 걱정을 누르지 못하고 장인(匠人)을 불러와 보수하여 다듬고 화사(畫師)를 초청하여 물을 뿌려 씻어 내고 붓칠을 하니 이에 수선루의 모습이 예전과 같아졌고 선대의 사적이 다시 새로워졌다. 이는 추모(追慕)하고 이어가려고 힘쓰는 마음의 만분의 일이라고 본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처음이 있지 않은 사람은 없으나 끝을 제대로 마무리하는 사람은 드물다.’고 하였는데, 삼가 바라건대 후세를 살아갈 자손들이 옛날로써 오늘날을 보고 오늘날을 살펴서 후대를 이어가면 선대 수선루의 광화(光華)가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갑술년(甲戌年) 9월 하순에 7세손 상면(相冕)이 진정(陳情)하여 삼가 쓰다. 종손(宗孫): 준환(俊煥), 감채(監彩): 익환(翼煥)·성렴(成濂), 장사(匠事): 교환(敎煥), 유사(有司): 치순(致順)·성환(星煥)

    【睡仙楼重修記】 夫剏業易而守成難, 故人家祖業鮮能傳守久逺, 豈不信然乎㦲? 所以朱夫子甞歎嗣守之難於聚星亭賛者也. 卋苟有傳其靑氊舊物, 久而不失, 壞則修, 廢則興, 恒保當日顔色, 則可見其貽謨之裕, 而承趾之善也. 鎭安之睡仙楼, 乃延安宋氏卋傳別業也. 盖其始剏也, 諱眞儒明儒哲儒瑞儒四昆季, 以葛巾野服, 逍遥於斯, 友愛篤至, 有三公不換之樂, 當時之人, 望之若神仙, 遂名其楼以睡仙焉. 厥後, 名公碩士, 或詩以詠歎, 或文以鋪張, 江山増彩, 樹草生光, 誠所謂地以人顕者也. 且屡有葺理, 我王考淵齋先生, 亦甞記其重修之事, 而稱其家風之美矣. 物換星移, 今又数十年, 則上雨旁風, 不無傾頹者, 於是後孫相善錦煥, 與諸族合謀, 招工修治, 凡朽者敗者, 咸易之新之, 有侖有奐. 使升煥, 要余書其顚末, 卋好之地, 難恝其懇則曰, 詩云, 維桑與梓, 必恭敬止. 桑梓不過祖先手植之物, 猶加敬止, 况肯構之堂而風韻之攸存乎? 宜其傳守不失, 歴屡百年而長存也. 然若非深知守成之道, 則不可能也. 於此可見四公平日燕翼之道, 有大過於人, 而使諸後承承襲不墜也, 詎不韙歟? 従此以後, 宋氏諸人, 亦當遵守先範, 毋敢墜失, 則門戶益昌大, 而斯楼也亦與天壤不壞, 聊以是奉勉焉. 歲甲辰復月之望, 恩津宋在晟謹記
    【수선루 중수기】 대저, 창업(創業)은 쉽고 수성(守成)이 어려운 법이다. 그러므로 인가(人家)의 조업(祖業)을 능히 오랜 후세에까지 전하여 지키는 경우가 드무니, 어찌 정말 그렇지 않으랴. 그래서 주부자(朱夫子 송대(宋代)의 거유(巨儒)인 주자(朱子)를 말함)께서 일찍이 <취성정찬(聚星亭贊)>*이라는 글에서 계승하여 지키는 것이 어려움을 탄식한 것이다. 세상에 참으로 그 청전 구물(靑氈舊物)*을 전해오면서 오래 되어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부서지면 수리하여 폐지되었다가도 다시 흥기(興起)하여 항상 그 당일(當日)의 안색(顔色 색깔을 말함)을 보유하는 이가 있다면 그 후손들에게 끼쳐준 계획이 여유롭고 후손들이 자취를 잘 계승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안(鎭安)의 수선루(睡仙樓)는 곧 연안 송씨(延安宋氏) 집안에 대대로 전해지는 별업(別業)이다. 대체로 그 별업을 맨 처음 지은 사람은 휘(諱) 진유(眞儒)·명유(明儒)·철유(哲儒)·서유(瑞儒) 네 형제들이 갈건(葛巾)과 야복(野服) 차림으로 이곳에서 느긋하게 소일하면서 우애가 독실하여 삼공(三公) 벼슬과도 바꾸지 아니하는 즐거움*이 있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마치 신선을 바라보는 듯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그 누[樓]를 ‘수선(睡仙)’이라고 이름을 지었고, 그 뒤에 유명한 공경과 큰 선비들이 혹은 시(詩)를 지어 영탄(詠嘆)하기도 하고 혹은 글을 지어 포장(鋪張)하기도 하자 강(江)과 산(山)도 때깔이 불어나고 나무와 풀조차 광채가 났으니 참으로 이른바 땅이 사람으로 인하여 환히 알려지게 된 것이다. 또 누차 수리하고 보완한 일이 있었는데 나의 왕고(王考)이신 연재(淵齋)* 선생께서도 또한 일찍이 중수(重修)한 일을 기록하면서 그 가풍(家風)의 훌륭함을 칭찬하셨다. 사물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 또 지금 수십 년이 되었으니 비에 젖고 바람에 시달려서 기울거나 무너진 곳이 없지 않았다. 이에 후손인 상선(相善)과 금환(錦煥)이 여러 족인들과 더불어 상의하여 공장(工匠)을 불러다가 수리하여 무릇 썩은 것과 못쓰게 된 것들을 모두 새것으로 바꾸어 새롭게 단장을 하였고, 승환(升煥)으로 하여금 나에게 그 전말(顚末)을 써달라고 요청하였는데, 대대로 집안 간에 사이좋게 지내온 터여서 그 간절한 요청을 외면하기가 어려웠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뽕나무와 가래나무에 반드시 공경하네.*”라고 하였는데, 뽕나무와 가래나무는 조상께서 손수 심은 물건에 불과한데도 오히려 공경을 하였으니 하물며 선대에 지은 집이고 풍운(風韻)이 깃들어 있는 것이야 어련하겠는가. 대대로 전하여 지키면서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수백 년을 지나도록 길이 보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수성(守成)하는 방도를 깊이 알지 못하면 해낼 수가 없으니, 이에 네 분 공(公)께서 평소에 연익(燕翼, 자손의 미래를 위해 계책을 잘 세우는 것)하신 방도가 일반 사람들보다 크게 뛰어났음을 알 수 있고, 여러 후손으로 하여금 계승하여 추락하지 않도록 하였으니 어찌 훌륭하지 아니한가. 이제부터 이후로 송씨 집안의 여러 사람들이 또한 마땅히 선대의 전범(典範)을 준수(遵守)하고 감히 추락하지 않으면 문호(門戶)가 갈수록 창대할 것이고 이 누각(樓閣)도 또한 천지와 더불어 허물어지지 않으리니 애오라지 이 점을 힘쓰라고 말하노라. 갑진년(甲辰年, 1964) 11월[復月] 보름에 은진(恩津) 송재성(宋在晟)이 쓰다.
    *취성정찬(聚星亭贊) : 원래의 명칭은 〈취성정화병찬(聚星亭畫屛贊)〉이다. 후한(後漢) 말기의 명사(名士)인 진식(陳寔)이 그의 아들 기(紀)와 심(諶)을 대동하고 순숙(荀淑)을 방문하였는데, 이때 팔룡(八龍)이라 불리는 순숙의 여덟 아들인 검(儉)ㆍ곤(緄)ㆍ정(靖)ㆍ도(燾)ㆍ강(江)ㆍ상(爽)ㆍ숙(肅)ㆍ부(敷) 등과 한자리에 어울려 시중든 일이 있었다. 이때 천문(天文)을 관장하는 태사(太史)가 하늘에 덕성(德星)이 한 지점에 모인 것을 보고 500리 떨어진 곳에 현인들이 모였다고 천자에게 아뢰었다. 이로 인해 영천(潁川)에 있는 진씨의 정자를 취성정(聚星亭)이라 불렀는데, 그 위치가 바로 고정(考亭)에 있었다. 송나라 주희(朱熹)가 그 정자를 수리하고 당시의 상황을 그린 병풍을 만들어 거기에 서문과 함께 찬(贊)을 지어 붙였다. 『朱子大全 卷85 聚星亭畫屛贊』
    *청전구물(靑氈舊物) : 집안에 대대로 전해오는 선조(先祖)의 유물(遺物)을 말한다. 『晉書 卷80 王獻之列傳』
    *삼공(三公) 벼슬과도 바꾸지 아니하는 즐거움: 전원에 은거하며 유유자적하게 살아가는 흥치는 본인이 아니면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라는 말.
    *연재(淵齋): 조선 후기~근대의 문인이자 순국지사인 송병선(宋秉璿)을 말함. 본관은 은진(恩津).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다.
    *뽕나무와…공경하네: 상재(桑梓)는 뽕나무와 가래나무를 뜻하는데, 『시경』〈소아(小雅) 소변(小弁)〉에 “어버이가 심어 놓으신 뽕나무와 가래나무도, 반드시 공경해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하물며 우러러 뵐 분으로는 아버지 말고 다른 사람이 없으며, 의지할 분으로는 어머니 말고 다른 사람이 없는 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維桑與梓 必恭敬止 靡瞻匪父 靡依匪母〕”라는 말이 나온다.

    【睡仙樓重修元韻】
    癯鶴拪簾喚睡生 白雲千載夢三淸 泉源壺瀉丁丁漏 山勢棋圍點點枰
    春晝方濃魂蝶影 秋風忽覺老蟬聲 幸敎微裔嗣而葺 庶可欽先杖屨名*
    辛未仲夏下澣 主翁龜巖 謹稿
    【수선루 중수원운】
    여윈 학 주렴에 옮겨와 잠든 서생을 깨우니,
    흰구름 천년 동안 삼청(三淸)을 꿈꾸었네.*
    샘물은 병에서 쏟아지듯 콸콸 흐르고,
    산세는 바둑판처럼 점점이 평평하네.
    봄날에는 나비꿈*의 영상이 눈앞에 가득하고,
    가을 바람 불면 홀연히 때 늦은 매미 소리 들리도다.
    미천한 후손들이 이어서 지어 가기를 바라며,
    공경히 먼저 노닐며 이름부터 지어 두네.
    신미년 중하 하순에 주인옹(主翁) 구암(龜巖)이 짓다.
    *흰구름 천년 동안 三淸을 꿈꾸었네 : 白雲千載는 사실 황학이 떠난 뒤, 즉 선경이 사라진 뒤 오랜 세월을 의미하고 이제 수선루를 짓고 학이 다시 날아와 이곳이 선경이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행간의 의미는 ‘학이 떠난 천년 동안 선경을 꿈꾸기만 하였다’는 의미이다. 삼청은 三淸境의 준말로 仙境을 뜻한다.
    *나비꿈 : 莊周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다가 깨어 “내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지금 장주가 된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르겠다.”한 고사를 말하는 것이다.
    *杖屨名 : 杖屨라는 말은 ‘왕래하다’, ‘노닐다’의 뜻도 있지만 ‘죽은 자의 유품’을 뜻하기도 한다.
  • 마령면 평지리 산3-3, 원평지마을에서 백운 방향 1km지점 모롱이에서 냇가쪽으로 100m 내려간 지점에 있는 정자. 2016. 12. 28 진안군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덕태산 아래 백운동마을에서 발원한 백운천과 평장리 솥내마을에서 남으로 흐르는 내가 합류하는 지점에 건립된 까닭에 ‘雙溪亭’ 또는 ‘雙磎亭’으로 불린다. 1886년 오도한(吳道漢), 이우흠(李禹欽) 등이 발의 출연하여 건립한 누정으로 전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 지붕 양식이다. 누정 후벽에는 고운 최치원의 ‘雙磎石門’ 4자를 모방한 큰 글씨가 새겨져 있고, 오도한 등이 조직한 ‘쌍계동천 현현계’의 계원 36여 명의 명단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 정자 안에는 진사 오도한(吳道漢)이 기술한 쌍계정기(雙溪亭記)와 이원효(李元孝)의 쌍계석문서(雙磎石門序) 판액(板額)이 걸려있다.

    【雙溪亭記】 亭乎 不以丹雘之侈爲美 專以水石之奇爲勝 越州之東 白雲仙閣巍然居望 而雲之一枝 西走爲甑山 甑之北 石壁斗立 古怪哉 鬼斤神斧 剜削出別樣造化跡 眞可謂白雲之孫 馬耳之弟也 壁之下 凹而爲門 可容百多人 門之側 石平而磐 天作一亭 其磐之下 有雙溪 一自雲洞發源 一自鼎川橫流 合注成潭 廣纔容舫 深可餘丈 溪於亭上 一高唾可及 懸崖而磯出 百尺藋竿風絲 近似桐江 引流而田灌千頃 香稻瓊粒 何羨杭州 粤赤龍歲 一鄕多士中 有志於山水者 愛惜其勝地之僻在遐陬而無名焉 遂題縣宰之啣 次刻鄕員之名 又模來方丈孤雲先生雙溪石門四字 鐫之者 盖示結亭之意也 成毁 眞個關數之事 拖三十餘載未就 至于丙戌 余與沁判李秀殷氏 語及此事 同有厭紛就閒之意 乃以創營 因其天作 址而結構 偶合龜疇之九宮 可集蘭亭之群賢 要以爲暮年登臨之娛 後生風浴之所矣 其工匠材瓦所入 摠一千二百金 而李友禹欽甫所惠金三百 題名僉員中所惠金七十 其餘八百零 吾取諸吾帑 而用之斯亭云爾 居停主人 喜其落成而秉管 歲在丙戌九月日 進士吳道漢記
    【쌍계정기】 정자란 단청(丹靑)의 호사스러움으로 미(美)를 삼지 말고, 수석(水石)의 기특함으로 훌륭함을 삼아야 한다. 월주(越州, 진안의 고호. 월랑[越浪]에서 유래함)의 동쪽에는 백운산(白雲山)과 선각산(仙閣山)이 높다랗게 으뜸을 차지하고 있다. 백운산의 한 가지가 서쪽으로 달려 증산(甑山)이 되고, 증산의 북쪽에는 석벽(石壁)이 우뚝 섰는데, 극히 고괴(古怪)하여 귀신이 자귀와 도끼로 깎고 찍어낸 듯 별스런 조화(造化)의 형적을 나타내고 있다. 참으로 백운산의 손자요 마이산의 아우라 할 만하다. 석벽의 아래는 오목하게 문을 이루어 많은 사람을 수용할 만하고, 문의 곁의 돌은 평평한 반석(盤石)이어서 하늘이 정자의 터를 만들어 주었다. 반석 아래에는 쌍계(雙溪)가 있는데, 하나는 백운동(白雲洞)에서 발원(發源)하고, 하나는 정천(鼎川)에서 옆으로 흘러 이곳에서 만나 못을 이루었다. 넓기로는 배 한 척을 용납할 만하고, 깊이는 한 길(丈) 남짓한데, 시내는 정자 위에서 침 한 번 크게 뱉으면 닿을 만하다. 깎아지른 절벽에 낚시터는 백 척(尺)이나 튀어나와 쭉 뻗은 낚싯대와 흔들거리는 낚싯줄은 동강(桐江, 엄자릉[嚴子陵]이 낚시하던 강)의 모습과 흡사하다. 또 물줄기를 끌어들여 논 1천 경(頃)에 대는데, 향긋한 벼와 구슬 같은 쌀은 어찌 항주(杭州, 중국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지명)를 부러워하랴? 지난 병진년(丙辰年), 이 고을 선비 중에서 산수(山水)에 뜻이 있는 사람들이, 그러한 승지(勝地)가 두메 산골에 궁벽하게 위치하여 이름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음을 애석히 여겨, 마침내 군수의 명함부터 각하고 다음으로 향원(鄕員)들의 이름을 각하였으며, 또 지리산에 있는 고운 선생(孤雲先生)의 쌍계석문(雙溪石門) 네 글자를 따다가 새겼는데, 대체로 정자를 세우겠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성패(成敗)는 참으로 명수(命數)에 관한 일이라 미루어온 지 30여 년이 되었다. 병술년(丙戌年)에 이르러 나와 심연(心淵) 이수은(李秀慇)이 이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 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조용하게 이루자는 데 합의를 보았다. 이에 일을 시작하여 천작(天作)으로 된 그 터에 지으니, 귀주(龜疇)의 구궁(九宮, 모든 법수[法數]를 말한 듯)과 우연히 합치되고, 난정(蘭亭, 주현상[柱見上])의 군현(郡賢)을 모을 만하였다. 요컨대 모년(暮年)에 등림(登臨)의 즐거움을 갖고 후생들이 바람 쏘이고 목욕하고 하는 처소를 마련하고자 함이다. 그 공장(工匠)과 재와(材瓦)로 들어간 돈이 모두 1천 2백금(金)인데, 이우(李友) 우흠보(禹欽甫, 甫는 애칭[愛稱])가 낸 돈이 3백이고, 이름을 각한 인원 중에서 낸 것이 70금이며, 나머지 8백여 금은 내가 내 호주머니에서 털어서 이 정자에 썼다. 거정주인(居停主人, 나그네가 자칭하는 말이다)은 낙성(落成)을 기뻐하며 붓을 드는 바이다. 세재 병술(歲在 丙戌, 1886) 9월 일 진사 오도한(吳道漢)이 기술하다.

    【雙磎石門序】 余嘗遊方丈山 山之南 有雙磎石門 書曰 雙磎石門者 孤雲崔先生 筆跡也 其筆勢巉嚴正直 仰之若掎拓北斗也 歸而觀吾鄕之東林 水作雙溪 而其旁石壁 堪爲門於雙磎也 噫孤雲己仙矣 縦未蹑孤雲之蹤 而嘗有探 孤雲之蹟 則在世而不泯者 雙磎石門也 於是焉 遣人於方丈 描歸孤雲筆帖 而仍刻于斯地 非方丈而磎一石門也 人無孤雲 而筆是孤雲也 且聞孤雲得道者也 馬耳山出沒 隠若之中 安知無 或者徃来而遊 此石門也㦲 是以其門壁刊 以吾儕 七十餘人記以示之 崇禎四庚申 四月 日 崇政大夫 李元孝 序.
    【쌍계석문 서】 내 일찍이 방장산(지리산)을 구경할 때 산의 남쪽에 雙磎石門이 있는데 쓰이기를 雙磎石門은 고운 최치원 선생의 필적이라 한다. 그 필세가 가파르고 바르다. 우러르니 마치 북두칠성을 끌어온 듯 하다. 내 고향 동림(백운면 평장리 솥내 부근)으로 돌아와 보니 냇물이 쌍계를 이루었는데 그 옆 석벽이 쌍계문처럼 생겼다. 희라! 고운은 이미 신선이 되어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는데 고운의 흔적은 찾을 수 있으니 살아 있을 때 남긴 쌍계석문(이란 글씨)이다. 그래서 사람을 방장산에 보내 고운의 필적을 모사(摹寫)하여 이곳에 각자하였으니 방장산이 아닌 쌍계석문인 셈이다. 고운은 없지만 이 글씨는 고운 것이다. 또 듣기를 고운은 신선이 되었다는데 마이산에 숨어 출몰하는지 어찌 알랴. 혹은 오가며 이 석문에서 놀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석벽 사이에 우리들 70여 인을 (연명하여) 기록해 둔다. 崇禎 四庚申(1860) 4월 일 숭정대부(崇政大夫) 이원효(李元孝) 서(序)
    *이원효(李元孝, 1784[정조 8]~1870[고종 7]) : 자는 순경(舜卿), 호는 석정(石亭). 본관은 진안으로 보문각 직학사(寶文閣直學士) 교(校)의 후손이며, 증한성부 좌윤(左尹) 수삼(受森)의 아들이다. 재예가 뛰어났으며 고종 초년에 행의로 사림의 천거를 받았다. 규당 정상범(葵堂 鄭相範)이 전라도를 살피려고 내려와서 특제를 내렸는데 ‘백리수풍망려필식(百里樹風望閭必式)’ 8자로 글을 지으매, 당시의 사람들이 서로 전하여 암송하였다고 한다. 수직(壽職)으로 숭정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묘는 서주동(鼠走洞) 선영(先塋) 아래에 있으며, 최병심(崔秉心)이 찬한 묘갈명이 있다.
  • 마령면 강정리 산21-1, 강정마을에서 월운마을 쪽 모롱이 오른쪽 암벽에 있는 누정. 2016. 12. 28 진안군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1942년 참봉 전영선(全永鮮)이 건립한 누정으로, 정면 3칸, 특면 2칸의 팔작 지붕 건물이다. 팔작 건물만 있는 충량이 대들보 위에 걸렸는데 건물 좌우측의 중앙칸 기둥에서 뻗어나와 용머리를 대들보에 걸쳐 놓은 형상이다. 용머리는 청룡과 황룡이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중앙 어칸 천정은 우물 천정, 그 외의 부분은 연등 천정으로 마련하였다. 추녀 쪽으로는 선자연으로 결구하였다. 창방은 온주화 머리초[끝 부분에만 넣는 무늬]에 늘휘[띠 모양으로 휘돌린 오색 무늬]로 단청을 베풀었고 계풍[에는 여러 가지 도안적인 문양을 놓았다. 도리 장여는 반연화 머리초에 인휘[비능 모양의 색깔 띠]를 베풀었고 계풍에는 연꽃과 매화 등으로 장식하였다. 도리와 대들보 마구리는 태평초로 장식하였고 대들보는 연화와 주화의 병머리초로 장식하였다. 기둥 밖으로는 난간을 둘렀는데 계자 난간으로 결구하였고 주초석은 항아리형이며 추녀는 활주가 받들었다. 또 건물 중앙에 설송 최규상이 쓴 편액이 있다.
    쌍벽루 서쪽 암벽에 “강정대(江亭臺)”, “도은선생장구지대(都隱先生杖屨之臺) / 규암선생고반지대(葵庵先生考槃之臺)…”등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