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운면 노촌리 676, 덕태산 물줄기가 감아도는 천변에 있는 누정. 1984. 4. 1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되었다. 소유자 및 관리자는 거창 신씨 종중이다. 영모정은 백운면 평장리에서 평장초등학교를 지나 약 1km 정도 오르면 원노촌 마을과 하마치 마을로 갈라지는 갈림길 옆에 신의련 효자각(愼義蓮孝子閣)이 있는데, 효자각(孝子閣) 앞 천변에 세워져 있다. 영모정은 효자 신의련의 효행을 기리고 본받기 위해서 고종 6년(1869)에 세워졌으며, 중개수(重改修)의 내력은 자세히 알 수 없다. 2층의 구조이다. 건물은 팔작 지붕의 형식을 갖추고 지붕의 재료는 기와가 아닌 작은 점판암 판돌인 너와로 올렸다. 주초석은 거북이가 밖을 향하여 가고 있는 모습도 있다. 정자 마루의 수평을 맞추기 위해 냇가 쪽의 초층 기둥은 길고 냇가 반대편으로는 기둥이 짧다. 우물 마루를 가설하였고 기둥 밖으로는 4면 모두 난간을 둘렀다. 지붕은 앞뒤에서 볼 때 용마루 적새 아래로 점판암의 너와 돌을 깔았으나 좌우측면은 까치 구멍에 해당되는 부분은 직각으로 내리고 그 아래로 너와를 놓았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로 초석은 가공 초석이 대부분이다. 내지 쪽의 기둥에는 주련을 달았다. 홑처마 지붕의 익공집의 서까래는 주화 머리의 늘휘로 단청을 베풀었고, 서까래 마구리는 태극문을 넣었다. 각 익공은 초가지를 장식하였고 기둥은 반연화 머리초로 장식하였다. 주두는 먹분 긋기로 처리하였다. 마루는 수평이 틀어진 청판이 곳곳에 보이고 기둥의 열극 현상이 심하다.
    정자에는 다음에 기술하는 여러 시운 판액들이 걸려 있다.

    【永慕亭記】 鎭安縣治之南二十里 有所謂美溪村 寔美溪愼先生所鍾生棲息之地 而溪之源 出於德泰山 縈廻于五萬洞 溪之上有岸 起十許丈 上有烏頭赤脚之閭 乃美溪先生之以孝旌扁 而輝暎古今者也 岸腰有盤陀一巨巖 可坐十數人 仍搆數架屋於巖上 是永慕亭也 永慕之意 盖欲先生之世世子孫 無忽其瞻依誦法也 嗚呼 惇德至行 袞褒於天朝 孚及於犬羊 垂之竹帛 被之棹楔 榮寵烜赫 將綿亙百世而不泯矣 後生童觀 安敢贅一辭 而描畵盛蹟哉 窃有隱之於癙憂以痒 而不能自解者 夫醜虜之充斥我邦 視古猶今 而在先生 則推孝而全活流人 多至五萬 今也靡哲靡愚 而民將盡劉矣 且在先生之時 人感依德 如德山賴之 而順保性命 今也顧瞻四方 蹙蹙所聘 而絶無一二人卓然可恃者 豈先生之盛德 不世出 上下數十載之間 不可再見耶 抑時丁百六 大運驅逼 而天戚之舞 不能解平城之圍而然耶 愚不敢妄談氣數 而曠感遺徽 祗令人嘐嘐 有起九原之想也 是亭之役 先生之後孫宗奎甫 寶前蹟而請余爲之記 余以托名爲榮 不欲以不文辭 乃言曰 登斯亭 緬想遺矚 則德山峨峨 美水洋洋 眞詮妙諦 煥爛盈矚 而凡爲先生詵詵雲仍 母徒崇飾亭榭 用資一時觀瞻之美 而必也讀先生所讀之書 行先生所行之德 以至一擧足一出言 而不敢忘先生所崇之孝 不敢廢先生所劬之業 紹述前光 家而爲肖孫 移孝爲忠 國而爲良弼 致使當世之人 罔不知美溪翁之有後 而咸嘖以爲醴有源而芝有本也云爾 則永慕之義 於斯盡矣 而儘可以毖保平泉之花石 世守考亭之琴書矣 諸賢之寓慕斯亭者 盍相率而勗之哉 戶曹參議 李寅龜 撰
    【영모정기】 진안(鎭安) 현치(縣治)의 남쪽 20리, 이른바 미계촌(美溪村)이 있으니, 바로 미계(美溪) 신 선생(愼先生)이 태어나서 은거하신 곳이다. 시내의 근원은 덕태산(德泰山)에서 발원하여 오만동(五萬洞)을 굽이도는데, 시내 위에는 10여 길이나 되는 언덕이 있고, 언덕 위에는 오두적각(烏頭赤脚, 비석은 검고 비각은 붉음)의 정려(旌閭)가 있으니, 미계 선생의 효자 정려로 고금에 빛을 발하는 곳이다. 언덕의 허리에는 반반한 큰 바위가 있어 10여 인이 앉아서 놀 만한데, 그 위에 몇 칸 집을 지었으니, 이것이 영모정(永慕亭)이다. 영모의 뜻은 대대로 선생의 자손되는 사람들이 첨앙(瞻仰)하고 계술(繼述)하는 도리를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오호라! 선생의 두터운 덕과 지극한 행의는 명(明)나라 조정에서 포장(襃獎)하니, 그 영향이 이적(夷狄)에게까지 올라 빛나는 영총(榮寵)은 앞으로 백세(百世)가 지난다 해도 묻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후생의 천견(淺見)으로 어찌 감히 한 마디나마 덧붙여서 훌륭한 사적을 묘사하려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저윽이 속을 끓여서 생긴 병을 숨기고 스스로 풀지 못한 바가 있으니, 무릇 오랑캐가 우리나라에 꽉 차 있는 현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일반이지만, 선생에 있어서는 지극한 효성으로 말미암아 피난민을 온전히 살린 것이 많게도 5만 인에 이르렀으나, 지금은 현우(賢愚)를 가릴 것 없이 백성은 다 속절없이 죽어가게 되었다. 또 선생의 시대에는 사람들이 모두 덕을 의지하는 것이, 마치 덕이 있는 산을 의지하듯 하여 목숨을 부지하였건만, 지금은 사방을 둘러보아야 애처롭도록 제 살길만 찾고 있어 한 두 사람도 뚜렷이 의지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 어쩌면 선생같은 성덕(盛德)은 시대마다 태어나는 것이 아니어서 상하(上下) 수 천년 동안 다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나 아닐는지? 아니면 시대가 백육(百六, 액회[厄會])의 액운을 만나 대운(大運, 국운[國運])마저 구박(驅迫)을 받아 간척(干戚)의 춤으로 평성(平城)의 포위를 풀 수 없어서 그러한 것일까? 나는 감히 망녕되이 기수(氣數)를 말할 수는 없으나 남기신 훌륭한 점을 추상(追想)할 때, 다만 사람으로 하여금 효효(嘐嘐, 뜻이 크고 말도 큰 소리를 치다)하여 황천(黃泉)에서 다시 일으키고 싶은 생각만 들게 한다. 이 정자의 공사가 끝날 무렵에, 선생의 후손인 종규보(宗奎甫, 甫는 존칭)가 선대의 사적을 간추려서 나에게 기(記)를 써 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이름 내걸기를 좋아하는 터이라 글을 못한다고 사양하지 아니하고 말을 잇기를, 정자에 올라서 조상이 구경하던 바를 추상해 보면, 덕태산은 높다랗고 미계(美溪)의 물은 넓다란데, 진전(眞詮)과 묘체(妙諦)는 찬란하게 눈앞에 다가오니, 모든 선생의 자손되는 많은 분들은 그저 정자나 훌륭하게 꾸며서 한 때의 훌륭한 볼거리로 삼으려 하지말고, 반드시 선생께서 읽었던 책을 읽고 선생께서 숭상했던 효도를 잊지 말고, 선생께서 힘쓰시던 학문을 자파하지 말고 전대(前代)의 광영을 계승하여, 집안에서는 초손(肖孫)이 되어 효도를 미루어 충성하고, 나라에 있어서는 훌륭한 보필자가 되어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미계옹(美溪翁)에게 훌륭한 자손이 있음을 모르는 이가 없게 하여, 모두가 혀를 차면서 동감하기를, “예천(醴泉)은 근원이 있고 영지(靈芝)는 근본이 있다더니 사실이구나!”하게 한다면, 길이 사모하는 뜻을 다 바친 것이 된다 하겠다. 이는 진실로 평천(平泉)의 화석(花石)을 잘 보존하고 대대로 고정(考亭)의 금서(琴書)를 잘 계승하는 길이 되는 것이니, 이 정자에 사모하는 뜻을 부치고 있는 모든 분들은 어떻게 서로 권면하고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호조참의 이인구(李寅龜)가 찬하다.

    【판액(板額)1】
    鎭安之山有 美溪愼公義連舊址也 公隠居 力學以孝間 壬辰之亂 虜至逼其親 公以身蔽之泣曰 寜殺我母害吾親 虜問其姓名 書而投諸火不㷊 驚曰 天孝也 傍其衆環山不入 賴而得活者數萬人事 聞旌閭仍構 修義副尉 溪之上岸 高千尺 㟁腰有巨巖 公之後人作亭 其頂名曰 永慕 有來徵詩者 用 原韻應之
    千尺岸頭活水源 碩人薖軸此中存 至誠終得神明佑 異類寧無父母恩
    往蹟曽聞環畫邑 居民共說避泰村 百年遺址風聲遠 堂構如今有子孫
    大匡輔國崇祿大夫判中樞府事 慶州 金弘集
    **
    진안의 산에 아름다운 시내가 있으니 愼義連 공의 舊址이다. 공은 은거하며 학문에 힘쓰고 효성으로 소문이 났다. 임진왜란 때 오랑캐가 와서 그 어버이를 핍박하자 공이 몸으로 어버이를 가리고 울며 말하기를, “차라리 나를 죽이고 우리 어버이를 해치지 말라.” 하였다. 오랑캐가 그 성명을 묻고 성명을 종이에 써서 불에 던졌으나 타지 않았다. 오랑캐가 놀라 말하기를, “하늘이 낸 효자이다.” 하고는 그 무리에게 榜文을 보내 산을 둘러싸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살아난 자가 수만 인이었다. 이 일이 조정에 보고되어 정려(旌閭)와 증(贈) 수의부위(修義副尉)의 첩지를 내렸다. 시내의 기슭 언덕은 높은데 허리에 거암(巨巖)이 있어 공의 후손이 정자를 짓고 영모정이라고 판액(板額)을 달았다. 그리고는 나를 찾아와 시를 부탁하는 자가 있어 원운(原韻)으로 부응한다.
    천 길 강안(江岸)에 끊임없는 물,
    석인(碩人)이 이곳에 은거하였네.
    지극한 효성 마침내 신명(神明)의 도움을 얻었으니,
    오랑캐라고 어찌 부모의 은혜를 모를쏘냐.
    지난 일 들으니 고을을 둘러쌌다고 하는데,
    주민들이 다같이 말하기를 난을 피한 태평촌이라 하네.
    백년이 지난 유지(遺趾) 소문은 멀리 들리고,
    부자간에 계승하여 지금의 자손이 있구나.
    대광보국숭록대부판중추부사(大匡輔國崇祿大夫判中樞府事) 경주(慶州) 김홍집(金弘集)*
    *김홍집(金弘集, 1842년~ 1896년) : 개화기의 정치인. 초명은 굉집(宏集), 호는 도원, 시호는 충헌(忠獻). 온건개화파이며 갑오개혁 추진자들의 우두머리였다. 또한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기도 하다.

    【판액(板額)2】
    德山美水長根源 俯仰之間道所存 海寇投鋒驚異感 天朝命爵降殊恩
    居人尙說壬辰事 福地無如孝子村 埜雉飛鳴松梓老 至今瞻慕泣■孫
    九世孫 宗奎
    덕태산은 기틀이 넓고 미계천은 근원이 깊어서,
    우러러보고 굽어보니 도를 보존할 만하다.
    바다 오랑캐 칼을 버리고 기적에 놀라니,
    조정에서 官爵과 특별한 은혜를 내리셨네.
    주민들이 아직도 임진년의 일을 말하니,
    효자촌보다 복받은 땅은 어디에도 없으리라.
    수풀의 꿩은 울며 날고 소나무 가래나무 늙었으니,
    사모하는 후손이 바라보며 지금 눈물 흘리네.
    구세손(九世孫) 종규(宗奎)


    【판액(板額)3】
    [謹次永慕亭韻]
    山有朝宗水有源 萬波一脉各相存 追先意篤猶多感 裕後功深豈忘恩
    松柏交柯連古道 雲林生色接芳村 崢嶸高閣如斯立 永保遺模継后孫
    后孫 愼哲晟
    [삼가 영모정에 차운하다]
    산에는 조종(祖宗)이 있고 물에는 근원이 있어서,
    수많은 갈래 하나의 맥락으로 서로 통하네.
    선조를 추모하는 마음 돈독할수록 느끼는 점 많아,
    복이 후손에게 미치고 공이 깊으니 어찌 은혜를 잊으리.
    소나무 잣나무 얽힌 가지 옛 길에 이어졌고,
    구름 낀 단풍숲이 향기로운 마을에 이어졌네.
    가파른 고각(高閣)이 새로 지은 듯하니,
    남기신 뜻 길이 보존하여 후손들이 이어 가리.
    후손(后孫) 신철성(愼哲晟)


    【판액(板額)4】
    山髙峰也水長源 先生已去道尙存 雖冦寕無誓異佑 惟廷終有降殊恩
    居民共誦知天孝 往老相請避禍村 遠樹風聲花遺趾 爲今增感表愚孫
    外后孫 梁仁權
    산 봉우리 높고 물길이 기니,
    선생은 이미 떠났으나 도는 아직도 남았네.
    오랑캐라 하더라도 하늘의 보우(保佑)에 놀라지 않을 수 없고,
    조정은 마침내 특별한 은혜를 내리셨네.
    주민들은 하늘이 알아준 효성을 칭송하고,
    노인들은 화를 피한 일을 전해 주네.
    멀리 나무들 바람소리 꽃다운 유지(遺趾),
    지금 더욱 훌륭하여 못난 후손의 사표(師表)가 되네.
    외후손(外后孫) 양인권(梁仁權)

    【판액(板額)5】
    一曲淸溪百行源 先生雖去道常存 蘆花十里風霜氣 松栢千年雨露恩
    王蠋舊聞環畫地 商容自有式閭村 小亭成處增追慕 堂搆遺謨付後孫
    嘉善大夫 吏曺叅判 完山 李應夏
    한 굽이 맑은 시내 온갖 지류의 근원이 되니,
    선생은 떠났으나 도는 아직 남아 있네.
    갈대꽃 십 리에 서리 바람 기운이고,
    소나무 잣나무 천 년 동안 우로(雨露)의 은혜로다.
    왕촉(王蠋)의 무덤을 봉해 주듯 고을을 보호해 주었고,
    상용(商容)의 마을에는 절로 경의를 표하였네.
    작은 정자 이룬 곳에 추모하는 마음 더해지고,
    대를 이어 계승해 온 뜻 후손에게 맡기네.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曺叅判) 완산(完山) 이응하(李應夏)
  • 마령면 평지리 1137-9, 원평지마을 국도 30호선 건너편 공지에 있는 정자. 원평지 주민들의 휴게처이다. 정자에 걸려 있는 이규형(李圭衡)이 찬한 영풍정기(迎豊亭記)에 의하면 본디 있었던 정자가 1970년 폭풍으로 허물어져 1971년에 주민 전태주(全泰周) 씨의 특지와 동민들의 합력으로 1972년에 다시 세웠다고 한다. 전면 2칸, 측면 2칸의 기와 팔작지붕이다.

    【영풍정기(迎豊亭記)】 本鄕 平地里는 山髙水長한 鎭安髙原中에서도 보기드문 名區인바 上古의 文化的 遺産인 数基의 支石이 있고 麗朝에는 馬靈縣의 官衛가 있었던 由緖깊은 宿鄕이라. 馬耳靈峯이 特立한 湖南寶土中에서도 蟾津江의 源流인 白馬川이 沃野를 貫流하고 있으니 恒心을 지닐 恒産이 없지 않을 天惠立地가 山好 水好 人亦好라는 古人의 名言이 決코 虚辭가 아닐지어다. 이같은仙庄에 長幹密葉의 巨槐가 滿地淸隂을 이루고있어 每年盛夏에 隣近洞員의 滌暑之所가 되어 本鄕聚落의 悠久한 歷史를 代辯하고 있던바 지난 庚戌(1970)歲에 暴風의 被害를 입어 倒壞되고 말았으니 鄕里를 아끼는 衆人의 失望이 어떠했으리요. 이에 有志諸賢이 桑海之嘆을 머금고 한 亭子를 얽고저 한 바 里仁全泰周甫의 盡力周旋과 监役委員 諸位의 盡心勤勞로 翼然히 辛亥暮에 一亭을 特立하니 換舊迎新의 새로운 氣像이 이루어졌다. 噫라, 掛陽山下 一川流는 晝宵不息 帰大海라. 洞里諸彦이 亭名을 請함에 迎豊이라 號하고 다시 記文을 請함에 敢히 몇 字를 적는 바이며 이어 돋는 興을 참지 못하여 境內八景을 略記하노니 惟我 鄕里諸位는可不貶哉며 可不貶哉아. 八景者는 一曰 東臺吐月이요, 二曰南溪細雨요, 三曰西山落照요, 四曰北峀曉鍾이요, 五曰亀山深淵이요, 六曰馬耳帰雲이요, 七曰平沙洛雁이요, 八曰南溪淸風이라. 雙溪睡仙의太古淸風이 豊年을 謳歌하고 晩趣暮雲이 古情을 불러 일으키니 이아니 名區仙庄이 아닌가. 光復後 辛亥(1971) 六月 日 전의후인(全義後人) 이규형(李圭衡) 근찬(謹撰)
  • 진안읍 우화1길 4-16[군상리350-1], 우화산 북쪽, 진안천변 암벽위 버덩에 있는 정자. 본래 우화정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편찬)』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최소 500년은 된 정자이다. 본디는 지금의 자리에서 서쪽으로 100여 미터 떨어진 등성이 너머 암벽아래에 위치하였는데, 언제인가 퇴락하여 없어졌으나 1921년 지역 인사들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 중창(重創)하였고, 1963년 지역인사들이 다시 중수(重修)하였으며, 그 뒤 1998년 진안군에서 다시 중건(重建)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정 건축이다. 구조는 낮은 기단위에 가공된 고복형 주초를 놓고 두리 기둥을 세운다음 창방과 결구하고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양식으로 기와지붕이다. 누정 주변에는 계자난간을 돌려 설치하고 있다. 공포는 익공양식이고 가구는 5량집으로 대들보 위에 대공을 대고 다시 종보를 댄 다음 그 위에 대공을 세우고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2단의 대들보 사이에 충량을 대고 기둥 주두위에 걸치고 있다. 우화정이 위치한 우화산은 주위 경관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전망이 뛰어나 이곳에 오르면 마이쌍봉 등 소위 월랑팔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경승지이다. 정자에는 지역인사들의 차운(次韻)을 담은 판액(板額)이 즐비하다. 이곳은 진안읍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진안읍민의 휴식공간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곳이 우화산이란 이름이 붙여진 연유는 예전에 이곳에서 신선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우화등선(羽化登仙)의 전설이 전해오기 때문이다. 우화정에는 다수의 판액(板額)이 걸려 있다. 다음은 1921년 중창하면서 진안읍의 전민탁(全玟鐸)이 쓴 기문인데 판액(板額)은 없어지고 글만 『진안지(1925)』에 전한다. 이 글로 1921년 정자의 중창(重創) 전말을 알 수 있다.

    【羽化亭記】 夫物之廢而興 衰而盛 卽理之常也 羽化一亭 在縣之案南者 爲幾百年前云 而胡爲乎失葺 但遺礎者 未知幾經星霜 此亭參居月浪八景之一 其所勝槩 遙想一郡翹楚 而今我後進 只憑古老相傳 瞻望舊墟而已 於是乎同志諸人 有感古之懷 謀新築之論 隨力捐金 不違劃筭 可謂廢而興者此歟 前日竪亭之處 乃玉流泉上駕鶴臺下 其幽邃景狀 非爲不佳 欲營別團而置之 乃隔一巒 更卜于此 翬飛碧榭 胸衿豁然 亦豈非地人相遇哉 前臨石壁 涵流水百年之聲 後擁松墩 毓靑山千古之色 東開牛蹄之野 濛濛也細雨 南隱馬耳之峰 悠悠也白雲 簷頭明月 欄外淸風 非但吾人之暢叙 足爲才子之觴咏 美哉仙鄕之流華 不愧隣境也 是亭也 豈憂竹樓之易朽乎 後必有如我同志之嗣葺云 歲在辛酉夏四月下澣 全玟鐸謹識
    【우화정기】 무릇 사물이 없어졌다 생기고, 쇠했다가 성한 것은 이치의 떳떳함이다. 우화정(羽化亭)이 고을의 안산 남쪽에 있었던 것은 몇 백 년 전의 일이라고 하나, 어쩌다가 중수(重修)하지 못했는지 모르나, 주초(柱礎)만 남게 된 것도 몇 년이 지났는지 모를 일이다. 이 정자는 월랑팔경(月浪八景)의 하나에 들어 있고, 그 좋은 경치는 한 고을에서 으뜸이었을 것이나, 지금 우리 후생들은 다만 어른들이 전하는 말만 듣고 빈터만 바라볼 따름이다. 이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옛날을 회상하는 마음이 있어 새로 짓자는 논의를 하고, 힘닿는 대로 돈을 내놓고 계획에 차질이 없었으니, 이른바 없어졌다가 도로 생긴다는 것이 이런 경우일 것이다. 전일 정자를 세웠던 곳은 옥류천(玉流泉) 위이고 가학대(駕鶴臺) 아래로 그윽한 경개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아니나, 달리 지어보려고 그 자리는 버리고 산등성이 하나를 격(隔)하여 이곳에 다시 터를 잡으니, 날아갈 듯한 푸른 정자는 가슴이 툭 트인다. 이 어찌 땅과 사람이 서로 때를 만남이 아니겠는가? 앞으로 석벽(石壁)에 임하여 유수(流水)의 백년성(百年聲)을 머금었고, 뒤로는 송돈(松墩)에 기대어 청산(靑山)의 천고색(千古色)을 띠었다. 동으로 우제(牛蹄)의 들 열렸는데, 컴컴한 것은 가랑비이다. 남으로 마이(馬耳)의 봉우리 가리웠는데 유유(悠悠)한 것은 백운(白雲)이다. 처마 끝 명월(明月)과 난간 밖 청풍(淸風)은 비단 우리만이 창서(暢敍)하는 것이 아니라, 족히 재자(才子)들의 상영(觴詠)도 됨직하니 아름답도다. 선향(仙鄕)의 유광(流光)은 이웃 고을에 부끄러움이 없다. 이 정자는 어찌 죽루(竹樓)*의 쉬이 썩음을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 이 뒤로 필시 우리와 같은 동지자(同志者)가 있어 보수(補修)하게 될 것이다. 신유(辛酉, 1921) 하4월 하한(下澣) 전민탁(全玟鐸)이 삼가 기록하다.
    *당[唐]나라 때 왕우칭[王禹偁]이 황주죽루기[黃州竹樓記]를 지었는데, 그 말미에 대나무로 기와처럼 집을 덮으면 10년이 가니 다시 또 덮어도 20년밖에 못 가지만,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 뒤를 이어 보수하면 쉬이 썩는 것을 걱정할 것이 없다 하였는데, 그 뜻을 인용한 것이다.

    다음은 1963년 중수하면서 마령면의 정귀영(鄭貴泳)이 쓴 기문 판액이다.
    【羽化亭重修記】 鎭安郡治之南數武許 崗巒突兀 絶壁奇異 樹木㭗蒼 百鳥咸集 甘露湧出石間而爲泉 淸溪不息長流而爲沼 瞻望一隅 馬耳雙峰 屹立中天于彼 古寺暮鐘 攩聲日聞不絶 此眞可謂神仙道師會遊消塵之勝區 而有亭翼然者 乃羽化亭也 文章才士 詩人墨客 詠於斯題於斯 揭之于板上 亭之可觀備在前者老儒之述矣 姑置之 而盖天下事 初創雖云難 守補亦難 如非後人之承述嗣葺 則若將難保者 理所固然 矧修理有年 土木傾頹 瓦覆滲漏 有志諸君子 慨然於斯 捐金鳩財 命匠不數月 而告工重新之 環顧宇內 慾浪滔滔 致禮義之不暇 而範俗世道 無論可想 花朝月夕 會友觴詠 炎天曝陽 棲息渴飮 不聞可知爲不忘僉君子之德矣 不佞以匪德不文 豈敢敍述也 僉尊之固請 重且大 不揆妄拙 擧其槩而爲之記 捐金與尸事之芳名 當次其後矣. 檀君紀元四二九六年 癸卯 窉月 日. 東萊 鄭貴泳 記.
    【풀이】 진안(鎭安)의 군치(郡治) 남쪽 몇 발자욱되는 거리에 뫼뿌리가 우뚝 솟아 절벽이 기이하고 수목이 울창하여 온갖 새가 다 모여들며 감로(甘露)가 돌사이에서 샘솟아 우물이 되고 맑은 물은 쉬지 않고 흘러 못이 되었는데 한쪽 모퉁이를 쳐다보면 마이(馬耳)의 두 봉우리가 중천(中天)에 드높이 솟아있고 절간의 저녁 종소리 끊임없이 들려오니 이는 참으로 이른바 신선(神仙)과 도사(道師)가 만나 노닐면서 진세(塵世)를 잊는 승구(勝區)라 할 만한데 날렵한 정자 하나가 있으니 바로 우화정(羽化亭)이다. 문장(文章), 재사(才士), 시인(詩人), 묵객(墨客)이 여기에서 읊조리고 여기에서 써서 판상(板上)에 걸어놓았으니 정자로서의 볼거리는 다 갖추어져 있다. 지난날 노유(老儒)들이 계술(繼述)한 것은 그만두고서라도 대체로 천하의 일은 비록 초창(初創)이 어렵다고 하지만 수보(守補)도 또한 어렵다. 후인(後人)의 끊임없는 보수(補修)가 없으면 보전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하물며 수리한지 여러 해가 되어 목재(木材)는 기울어지고 기와는 비가 샘에 있어서랴. 뜻이 있는 제군자(諸君子)가 이를 개연히 여겨 돈을 내놓고 재목을 거두어 공장(工匠)을 불러 몇 달이 채 되지 않아 일을 마쳐 일신(一新) 하였다. 지금 세상을 두루 돌아보면 탐욕(貪慾)의 물결이 넘쳐흘러 예의(禮義)를 이룰 겨를도 없으니 세도(世道)에 모범이 되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그런데 꽃피는 아침, 달이 뜨는 저녁에 벗을 모아 시를 읊고 더운 철 땡볕이 내려 쪼일 때에 이곳에서 쉬면서 목이 말라 우물을 마시면 듣지 않아도 제군자의 덕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덕도 없고 글도 못하니 어찌 감히 서술(敍述)할 수 있겠는가마는 여러 어른의 간청이 중한 바라서 망녕됨을 헤아리지 않고 그 줄거리를 들어 기(記)로 삼는 바이다. 돈을 내놓은 사람과 일을 맡아본 사람의 방명(芳名)은 응당 부차(副次)로 있을 것이다. 단군기원(檀君紀元) 4296(1963)년 계묘(癸卯) 3월(窉月) 일 동래(東萊) 정귀영(鄭貴泳) 기(記)

    다음은 1963년 중수하면서 진안읍의 김종관(金鍾寬)이 쓴 기문으로 중수내역을 국한문 병용으로 기재한 글이다.
    【鎭安羽化亭重修記】 月浪城南 數武許에 一見 仙娥가 邑을 향하여 춤을 추는 듯한 자세를 올리고 있는 산을 일러 羽化山이라 한다. 이 山 分野內에 있는 羽化橋의 風致와 玉流泉의 淡味와 忠魂塔의 偉容과 駕鶴坮의 神祕와 羽化江의 返景 등 許多 風光은 곧 登臨客을 陶醉케 하며 本郡 遊覽地로서 이름이 높은 저 馬耳雙峯과 雲半兩岩으로 더불어 優劣을 다투는 터이다. 이와 같은 勝地에 어찌 亭榭가 없을소냐 槪使 羽化山을 仙娥 舞體로 본다면 右舞袖에 該當한 位置에 서 翼然中天에 드높이 나타나고 있는 건물이 곧 羽化亭이다. 眼界가 廣闊하여 所謂 月浪八景이 一目之下에 展開되어 있고 地帶가 迢遞하여 浮埃가 끊어지고 淸風만이 徐來하는지라 와서 앉으면 胸襟이 灑落하여 곧 神仙에 오른듯하다. 春風秋月境을 찾아 詩人墨客이 接踵하고 있는 이 羽化亭의 存在야말로 郡寶로서 자랑함에 遜色이 없을 것이다. 烏號라! 건물의 修不修는 管理 如何에 따라 左右됨은 再言을 要치 않는바 從來 우화정의 管理가 너무나 疎忽하였으므로 그로 因하여 建物이 日頹月落 將次 顚覆의 危險前夜에 있었다. 이를 憂慮한 地方同志가 相謀下에 우화정 修理期成會를 組織하고 積極 推進한 結果 郡에서 修理費 三萬원의 下達을 받고 會員으로부터 應分의 誠金을 收合하여 計劃대로 付屬建物까지 完全修理의 業績을 거두었다. 玆에 今般 우화정을 修理하게된 顚末과 此 修理工事에 積極 協力하신 會員諸氏의 名單을 登梓하여서 길이 紀念코자 하노라. 檀紀四二九六(1963)年 癸卯 仲秋 下澣 金海 金鍾寬 記

    다음은 우화정 안에 걸려 있는 한시 판액(板額)들이다.
    [謹次]
    崖懸巖疊水聲長 羽化亭高此片岡 臺影沈江兼鶴靜 樹陰如海帶鶯凉
    百登不厭眞佳境 一寓難辭亦故鄕 仙跡渺茫無處問 只留瑤草向人香
    丁酉初夏中澣 寓人 秋圃 金鍾管
    삼가 차운하다
    첩첩한 바위 절벽 물소리 유장한데,
    이 언덕에 우화정이 높다랗게 섰도다.
    정자의 그림자는 물속에서 학과 함께 고요하고,
    수풀의 그늘은 바다처럼 꾀꼬리와 함께 서늘하다.
    백 번을 올라도 염증이 나지 않아 참으로 가경(佳境)인데,
    한 번 보고는 말하기 어려우니 역시 고향으로 삼을 만하다.
    신선의 자취는 묘연(渺然)하여 어디 있는지 물을 길 없고,
    다만 기화요초(琪花瑤草)만 남아 사람에게 향기를 보내네.
    정유 초하 중한 우인(寓人) 추포(秋圃) 김종관(金鍾管)

    [謹次]
    仙翁以去歲華長 此地空餘羽化岡 駕鶴坮前山月白 釼岩沼上水風凉
    名亭幻出三淸界 物色由來太古鄕 遠近遊人常不絶 日團詩社酒樽香
    東隱 金圭泰
    삼가 차(次)하다.
    신선이 가버린 지 세월이 오래인데,
    이곳엔 공연스레 우화정만이 왔네.
    가학대(駕鶴臺) 앞엔 달빛이 희고,
    검암소(劒巖沼) 위엔 바람 서늘하다.
    이름난 정자 삼청계(三淸界)*에 솟아있는데,
    물색(物色)*은 자래로 태고향(太古鄕)*이었네.
    원근의 유인(遊人)들 항상 떨어지지 않아,
    날마다 시사(詩社)* 얼려 술기운 향긋하다.
    동은(東隱) 김규태(金圭泰)
    *삼청계(三淸界): 신선이 사는 하늘 나라. 즉 옥청(玉淸) 상청(上淸) 태청(太淸)의 총칭임.
    *물색(物色): 어떤 풍경과 모양의 종합적인 상징(象徵).
    *태고향(太古鄕): 태고적의 순후한 고장
    *시사(詩社): 시로써 모이는 동아리.

    一谷淸川翠帶長 枕流巖石疊成岡 山花滿地春風暖 水氣通簾夏日凉
    歲月重來明月也 神仙不返醉仙鄕 後人修葺多生色 聯揚新詩墨潤香
    檀陰 金圭彦
    한 굽이 맑은 시내 띠처럼 기다란데,
    베고 누은 바윗돌 쌓여서 산을 이뤘네.
    산화(山花)는 땅에 가득하여 봄바람 따스한데,
    수기(水氣)는 주렴에 스며 여름에도 서늘하다.
    세월은 명월야(明月夜) 다시 돌아왔건만,
    신선은 취선향(醉仙鄕)에 돌아오지 않누나.
    후인들 보수하여 화사한 맵시 많이 나는데,
    새로운 시 나란히 걸어 먹 향기 그윽하다.
    단은(檀隱) 김규언(金圭彦)

    勝地名亭共特長 月浪佳境在斯岡 高臺隔水紅塵遠 老樹叅天白日凉
    羽化仙翁去何處 風流士子訪吾鄕 逍遙擬到三山境 瑤草琪花分外香
    陽圃 鄭京朝
    승지(勝地) 명정(名亭)의 특장(特長) 겸했으니,
    월랑(月浪)의 가경(佳景) 이 산에 있구려.
    높은 누대 물에 막혀 홍진(紅塵)은 먼데,
    늙은 수림 하늘을 가려 한낮에도 서늘하다.
    우화(羽化)한 신선은 어데로 가버렸는지,
    풍류(風流)의 선비맛이 이 고장 찾아드네.
    삼산(三山)*의 지계(地界)에서 바람을 쏘이는 듯,
    요초(瑤草)와 기화(琪花) 생각밖에 향기롭다.
    양포(陽圃) 정경조(鄭京朝)
    *삼산(三山): 삼신산(三神山) 즉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를 말함.

    [謹次]
    一榭亭亭鳴世長 鎭中秀氣鐘南岡 懸簷霽月終霄白 滿座光風盡日凉
    眼際皆無非別界 人誰不道是仙鄕 忘俗憑欄如化羽 仃伶暫醉九煎香
    蓮史 姜信永
    삼가 차하다
    한 정자 청정하여 세상에 울린지 오래이니,
    진안의 수려한 기상 남강(南岡)에 모였네.
    처마에 매달린 제월(霽月)은 밤새도록 밝고,
    자리에 가득한 광풍(光風)은 종일토록 서늘하다.
    눈 앞엔 모두가 별계(別界) 아님이 없나니,
    사람이 뉘라서 선향(仙鄕) 아니리 이르는가.
    세상 잊고 난간에 비기니 날개가 돋치는 듯,
    나 홀로 잠시 구전향(九煎香)*에 취해 보네.
    연사(蓮史) 강신영(姜信永)
    *구전향(九煎香): 신선이 되는 약인 금단(金丹)은 수은(水銀)을 아홉 번 달여서 만들기 때문에 붙여진 용어임.

    [謹次]
    羽化亭下一溪長 山勢南來聳此岡 危欄半枕釼巖碧 畵棟高撑玉宇凉
    絶壁籠雲超俗界 靈泉釀酒醉仙鄕 鍊道醒心幾多客 煎丹遺煙至今香
    慕軒 李圭衡
    삼가 차하다
    우화정 아래 시냇물 하나 길게 흐르는데,
    산세는 남으로 내려와 이곳에서 솟았네.
    위태로운 난간은 반쯤 검암(劒巖)에 기대었고,
    붉은 기둥 높다랗게 옥우(玉宇)* 받치고 있네.
    절벽은 구름에 감싸여 속계(俗界)를 벗어났는데,
    영천(靈泉)으로 술을 빚어 선향(仙鄕)에서 취하네.
    도를 닦고 마음 깨친 나그네 얼마나 되는가,
    단(丹)을 달여 전해진 약 지금도 향긋하다.
    모헌(慕軒) 이규형(李圭衡)
    *옥우(玉宇): 하늘을 말함

    [次羽化亭韻]
    羽化翁歸天日長 而今只有古亭岡 杜宇曉岑殘月白 寒蟬紅樹夕陽凉
    幻身一旦期離俗 駕鶴千年不返鄕 聊識世間都是夢 惟存芳草帶春香
    石亭 全鍾烈
    우화정 운을 차하다
    우화옹(羽化翁) 돌아가고 햇끝만 긴데,
    지금은 다만 옛 정자만이 남아 있구려.
    두견새 새벽 뫼뿌리에 잔월(殘月)은 희고,
    매미 소리 붉은 숲엔 저녁 노을 서늘하다.
    환신(幻身)한 그 날에 세속 떠나려고 작심했는지,
    가학(駕鶴)한 천년동안 고향엔 돌아오지 않네.
    양괘라 인간 세상 모두가 꿈인지라,
    방초(芳草)만 봄의 향기 띠고 있구려.
    석정(石庭) 전종렬(全鍾烈)

    [又]
    駕鶴一飛歲月長 只存重疊白雲岡 叅差城樹空中碧 灑落林泉石上凉
    千家桃竹武夷谷 七里山川滁水鄕 如逢記似羲之筆 不使蘭亭獨擅香
    石川 金鍾寬
    우(又)
    학 타고 떠난 뒤로 세월이 많이 흘러,
    겹겹이 쌓인 백운강(白雲岡)만이 남았네.
    들쭉 날쭉 성수(城樹)는 공중에 푸르르고,
    깔끔한 임천(林泉)은 돌 위에 서늘하다.
    얼천 집 도죽(桃竹)은 무이(武夷)*의 골짜기요,
    칠리(七里)의 산천은 저수(滁水)*의 고을일세.
    글 잘 지은 왕희지(王羲之)의 솜씨 만난다면,
    난정(蘭亭)*이 그 이름 독차지하게 않았으련만.
    석천(石川) 전종관(全鍾寬)
    *무이(武夷): 중국 복건성(福建省) 숭안현(崇安縣)에 있는 산 이름. 그곳에 있는 골짜기 구곡(九曲)은 경치가 좋아 주희(朱熹)의 구곡가(九曲歌)가 있다.
    *저수(滁水): 중국 안휘성(安徽省)에 있는 물 이름. 송(宋)의 문장가 구양수(歐陽脩)가 이곳 지방관이 되어 취옹정(醉翁亭)을 짓고 기(記)를 지었음
    *난정(蘭亭): 중국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정자 이름. 동진(東晋) 때에 명사(名士) 42인이 이곳에 모여 주연(酒宴)을 베풀었는데 그 기(記)를 왕희지(王羲之)가 대를 있고 쓰고 하였음.

    [次羽化亭]
    羽亭日上放懷長 駕鶴千秋露此岡 一輪明月當樽白 萬斛淸風入座凉
    玉削芙蓉挺馬耳 天圍地軸闢仙鄕 最好登臨無限景 每唫花鳥幾番香
    春岡 全承國
    우화정 운을 차하다.
    해 돋는 우화정에서 길게 회포를 푸는데,
    신선은 가버리고 천추토록 이 언덕만 남았네.
    일륜(一輪)의 명월은 술동이 비추어 희고,
    만곡(萬斛)*의 청풍 자리에 들어 서늘하다.
    옥으로 각각은 연꽃인 듯 마이(馬耳)는 솟았고,
    하늘은 땅의 테를 둘러 신선 고장 이루었네.
    가장 좋은 건 등림에 끝없는 경치 있음이라,
    매양 화조(花鳥) 읊조리며 몇 번이나 놀았던가.
    춘포(春圃) 전승국(全承國)
    *만곡(萬斛): 일만 섬(石). 아주 많음을 뜻함

    [又]
    百尺臺高一水長 擁城屹立畵中岡 森羅萬象乾坤大 蘊蓄千年木石凉
    湖山表裏玲瓏界 吳楚東南壯麗鄕 詩友棋朋仍共樂 灑然巾屐襲天香
    晴溪 薛洙奉
    우(又)
    대(臺)는 백척(尺)이나 높고 시냇물 길게 흐르는데,
    성(城을) 끼고 우뚝 솟은 그림 속의 뫼뿌리일세.
    만상(萬象)은 삼라(森羅)하여 건곤(乾坤)은 크고,
    천년(千年)을 온축(蘊蓄)*하여 목석(木石)도 서늘하다.
    호산(湖山)은 안팍으로 영롱(玲瓏)한 세계이고,
    오초(吳楚)*는 동남으로 장려(壯麗)한 고장일세.
    시우(詩友) 기붕(棋朋) 함께 모여 즐기니,
    쇄연(灑然)한 건극(巾屐) 천향(天香)*에 젖네.
    청계(晴溪) 설수봉(薛洙奉)
    *온축(蘊蓄): 어떤 기운이나 학문 품위 따위가 오래 쌓이는 것
    *오초(吳楚): 오(吳)나라와 초(楚)나라. 두보(杜甫)의 악양루(岳陽樓)시에 오초는 동남으로 펼쳐졌다[吳楚東南坼]는 시귀가 있는데 그 사의(辭意)를 취해서 쓴 것임
    *천향(天香): 하늘 멀리에서 은은히 풍겨오는 향기

    [次羽化亭韻]
    孤亭特立歲年長 月浪城过一小岡 門掛白雲常隱僻 窓臨流水饒淸凉
    絶勝溪山開別界 煥然文物非凡鄕 邨俗亦知烟景好 隨時筆筆自題香
    玉雲 宋瑢憲
    우화정 운을 차하다
    외딴 정자 우뚝 솟아 세월이 흘렀는데,
    월랑성(月浪城)변의 작은 뫼뿌리일세.
    문에는 백운(白雲)이 걸려 항상 그윽하고,
    창은 유수(流水)에 다달아 서늘함 풍족하다.
    절승(絶勝)의 계산(溪山)에 별천지 열렸는데,
    빛나는 문물(文物)은 범향(凡鄕)이 아니로세.
    나라 풍속 역시 연경(煙景)이 좋음을 알아,
    때때로 이 붓 저 붓 멋대로 향기를 적네.
    옥운(玉雲) 송용헌(宋瑢憲)

    一上名亭興味長 郡城秀色盡南岡 千里溪山依旧碧 百年松檜帶新凉
    畵棟鶴鳴明月夜 玉簫仙降彩雲鄕 幾多騷客登臨處 聯壁圖書漆墨香
    春岡 房鎭洪
    이름난 정자 성큼 오르니 흥미로움 많은데,
    한 고을 뛰어난 경치 이 언덕에 다했구려.
    천리의 산천은 옛 모습 그대로 푸르르고,
    백년의 송백(松栢)은 서늘함 가져오네.
    화동(畵棟)엔 달이 밝은데 학이 울고,
    옥소(玉簫)로 신선 구름타고 내리네.
    허구많은 시인들 등림(登臨)하던 곳엔,
    벽을 둘러 시와 글 먹 향기에 젖었네.
    춘강(春岡) 방진홍(房鎭洪)

    [次]
    駕鶴坮傳歷史長 羽亭生色擅奇岡 江風拂檻詩心快 山月當簷酒氣凉
    自古湖南多勝地 鎭安名實太平鄕 湯來掬飮靈泉水 頓覺凡夫口腹香
    守軒 吳在東
    차하다
    가학대(駕鶴臺)는 전해진 지 오래인데,
    우화정의 생색은 이 뫼뿌리 독차지했네.
    강풍이 난간 흔드니 시심(詩心) 울렁이고,
    산월(山月)이 창살 마주하니 술기운 서늘하다.
    자고로 호남에는 승지(勝地)가 많으나,
    진안은 명실이 태평향(太平鄕)이었도다.
    목이 말라 영천수(靈泉水) 움켜 마셨더니,
    범부(凡夫)도 뱃속 향긋함 완연히 깨닫겠네.
    수헌(守軒) 오재동(吳在東)

    亭故築今一羽長 南湖形勝此東岡 白晝樹林情欲斷 黃餘石礎座還凉
    日鶯歌非俗洞 霽天月色是仙鄕 名遊不晩前人後 後我千年亦有香
    辛酉五月二十日 晩圃 文榮一
    오랜 정자 지금 중건하니 깃 하나 자랐는데,
    남호(南湖)의 형승(形勝)이 언덕에 있구려.
    백주(白晝)의 정취(情趣)는 애간장을 끊는데,
    석초(石礎)*에 황화(黃花) 있으니 자리 되려 서늘하다.
    따스한 날 꾀꼬리 소리는 속계(俗界)가 아닌데,
    개인 하늘 달빛은 이곳이 바로 선향(仙鄕)이구려.
    이름난 놀이 전인(前人) 뒤 따르는 것 늦지 않나니,
    이로부터 천년 뒤일지언정 남은 향기 있으리라.
    신유(辛酉) 5월 20일
    만포(晩圃) 문영일(文榮一)
    *석초(石礎): 주춧돌을 말한 것은 분명하나 황(黃)은 단청(丹靑)을 말함인지 국화인지 알 수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