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계정(雙溪亭)
운영자 23-12-26 18:25 79 hit
쌍계정 원경쌍계정 정우측면쌍계석문 서-이원효
마령면 평지리 산3-3, 원평지마을에서 백운 방향 1km지점 모롱이에서 냇가쪽으로 100m 내려간 지점에 있는 정자. 2016. 12. 28 진안군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덕태산 아래 백운동마을에서 발원한 백운천과 평장리 솥내마을에서 남으로 흐르는 내가 합류하는 지점에 건립된 까닭에 ‘雙溪亭’ 또는 ‘雙磎亭’으로 불린다. 1886년 오도한(吳道漢), 이우흠(李禹欽) 등이 발의 출연하여 건립한 누정으로 전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 지붕 양식이다. 누정 후벽에는 고운 최치원의 ‘雙磎石門’ 4자를 모방한 큰 글씨가 새겨져 있고, 오도한 등이 조직한 ‘쌍계동천 현현계’의 계원 36여 명의 명단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 정자 안에는 진사 오도한(吳道漢)이 기술한 쌍계정기(雙溪亭記)와 이원효(李元孝)의 쌍계석문서(雙磎石門序) 판액(板額)이 걸려있다.

【雙溪亭記】 亭乎 不以丹雘之侈爲美 專以水石之奇爲勝 越州之東 白雲仙閣巍然居望 而雲之一枝 西走爲甑山 甑之北 石壁斗立 古怪哉 鬼斤神斧 剜削出別樣造化跡 眞可謂白雲之孫 馬耳之弟也 壁之下 凹而爲門 可容百多人 門之側 石平而磐 天作一亭 其磐之下 有雙溪 一自雲洞發源 一自鼎川橫流 合注成潭 廣纔容舫 深可餘丈 溪於亭上 一高唾可及 懸崖而磯出 百尺藋竿風絲 近似桐江 引流而田灌千頃 香稻瓊粒 何羨杭州 粤赤龍歲 一鄕多士中 有志於山水者 愛惜其勝地之僻在遐陬而無名焉 遂題縣宰之啣 次刻鄕員之名 又模來方丈孤雲先生雙溪石門四字 鐫之者 盖示結亭之意也 成毁 眞個關數之事 拖三十餘載未就 至于丙戌 余與沁判李秀殷氏 語及此事 同有厭紛就閒之意 乃以創營 因其天作 址而結構 偶合龜疇之九宮 可集蘭亭之群賢 要以爲暮年登臨之娛 後生風浴之所矣 其工匠材瓦所入 摠一千二百金 而李友禹欽甫所惠金三百 題名僉員中所惠金七十 其餘八百零 吾取諸吾帑 而用之斯亭云爾 居停主人 喜其落成而秉管 歲在丙戌九月日 進士吳道漢記
【쌍계정기】 정자란 단청(丹靑)의 호사스러움으로 미(美)를 삼지 말고, 수석(水石)의 기특함으로 훌륭함을 삼아야 한다. 월주(越州, 진안의 고호. 월랑[越浪]에서 유래함)의 동쪽에는 백운산(白雲山)과 선각산(仙閣山)이 높다랗게 으뜸을 차지하고 있다. 백운산의 한 가지가 서쪽으로 달려 증산(甑山)이 되고, 증산의 북쪽에는 석벽(石壁)이 우뚝 섰는데, 극히 고괴(古怪)하여 귀신이 자귀와 도끼로 깎고 찍어낸 듯 별스런 조화(造化)의 형적을 나타내고 있다. 참으로 백운산의 손자요 마이산의 아우라 할 만하다. 석벽의 아래는 오목하게 문을 이루어 많은 사람을 수용할 만하고, 문의 곁의 돌은 평평한 반석(盤石)이어서 하늘이 정자의 터를 만들어 주었다. 반석 아래에는 쌍계(雙溪)가 있는데, 하나는 백운동(白雲洞)에서 발원(發源)하고, 하나는 정천(鼎川)에서 옆으로 흘러 이곳에서 만나 못을 이루었다. 넓기로는 배 한 척을 용납할 만하고, 깊이는 한 길(丈) 남짓한데, 시내는 정자 위에서 침 한 번 크게 뱉으면 닿을 만하다. 깎아지른 절벽에 낚시터는 백 척(尺)이나 튀어나와 쭉 뻗은 낚싯대와 흔들거리는 낚싯줄은 동강(桐江, 엄자릉[嚴子陵]이 낚시하던 강)의 모습과 흡사하다. 또 물줄기를 끌어들여 논 1천 경(頃)에 대는데, 향긋한 벼와 구슬 같은 쌀은 어찌 항주(杭州, 중국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지명)를 부러워하랴? 지난 병진년(丙辰年), 이 고을 선비 중에서 산수(山水)에 뜻이 있는 사람들이, 그러한 승지(勝地)가 두메 산골에 궁벽하게 위치하여 이름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음을 애석히 여겨, 마침내 군수의 명함부터 각하고 다음으로 향원(鄕員)들의 이름을 각하였으며, 또 지리산에 있는 고운 선생(孤雲先生)의 쌍계석문(雙溪石門) 네 글자를 따다가 새겼는데, 대체로 정자를 세우겠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성패(成敗)는 참으로 명수(命數)에 관한 일이라 미루어온 지 30여 년이 되었다. 병술년(丙戌年)에 이르러 나와 심연(心淵) 이수은(李秀慇)이 이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 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조용하게 이루자는 데 합의를 보았다. 이에 일을 시작하여 천작(天作)으로 된 그 터에 지으니, 귀주(龜疇)의 구궁(九宮, 모든 법수[法數]를 말한 듯)과 우연히 합치되고, 난정(蘭亭, 주현상[柱見上])의 군현(郡賢)을 모을 만하였다. 요컨대 모년(暮年)에 등림(登臨)의 즐거움을 갖고 후생들이 바람 쏘이고 목욕하고 하는 처소를 마련하고자 함이다. 그 공장(工匠)과 재와(材瓦)로 들어간 돈이 모두 1천 2백금(金)인데, 이우(李友) 우흠보(禹欽甫, 甫는 애칭[愛稱])가 낸 돈이 3백이고, 이름을 각한 인원 중에서 낸 것이 70금이며, 나머지 8백여 금은 내가 내 호주머니에서 털어서 이 정자에 썼다. 거정주인(居停主人, 나그네가 자칭하는 말이다)은 낙성(落成)을 기뻐하며 붓을 드는 바이다. 세재 병술(歲在 丙戌, 1886) 9월 일 진사 오도한(吳道漢)이 기술하다.

【雙磎石門序】 余嘗遊方丈山 山之南 有雙磎石門 書曰 雙磎石門者 孤雲崔先生 筆跡也 其筆勢巉嚴正直 仰之若掎拓北斗也 歸而觀吾鄕之東林 水作雙溪 而其旁石壁 堪爲門於雙磎也 噫孤雲己仙矣 縦未蹑孤雲之蹤 而嘗有探 孤雲之蹟 則在世而不泯者 雙磎石門也 於是焉 遣人於方丈 描歸孤雲筆帖 而仍刻于斯地 非方丈而磎一石門也 人無孤雲 而筆是孤雲也 且聞孤雲得道者也 馬耳山出沒 隠若之中 安知無 或者徃来而遊 此石門也㦲 是以其門壁刊 以吾儕 七十餘人記以示之 崇禎四庚申 四月 日 崇政大夫 李元孝 序.
【쌍계석문 서】 내 일찍이 방장산(지리산)을 구경할 때 산의 남쪽에 雙磎石門이 있는데 쓰이기를 雙磎石門은 고운 최치원 선생의 필적이라 한다. 그 필세가 가파르고 바르다. 우러르니 마치 북두칠성을 끌어온 듯 하다. 내 고향 동림(백운면 평장리 솥내 부근)으로 돌아와 보니 냇물이 쌍계를 이루었는데 그 옆 석벽이 쌍계문처럼 생겼다. 희라! 고운은 이미 신선이 되어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는데 고운의 흔적은 찾을 수 있으니 살아 있을 때 남긴 쌍계석문(이란 글씨)이다. 그래서 사람을 방장산에 보내 고운의 필적을 모사(摹寫)하여 이곳에 각자하였으니 방장산이 아닌 쌍계석문인 셈이다. 고운은 없지만 이 글씨는 고운 것이다. 또 듣기를 고운은 신선이 되었다는데 마이산에 숨어 출몰하는지 어찌 알랴. 혹은 오가며 이 석문에서 놀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석벽 사이에 우리들 70여 인을 (연명하여) 기록해 둔다. 崇禎 四庚申(1860) 4월 일 숭정대부(崇政大夫) 이원효(李元孝) 서(序)
*이원효(李元孝, 1784[정조 8]~1870[고종 7]) : 자는 순경(舜卿), 호는 석정(石亭). 본관은 진안으로 보문각 직학사(寶文閣直學士) 교(校)의 후손이며, 증한성부 좌윤(左尹) 수삼(受森)의 아들이다. 재예가 뛰어났으며 고종 초년에 행의로 사림의 천거를 받았다. 규당 정상범(葵堂 鄭相範)이 전라도를 살피려고 내려와서 특제를 내렸는데 ‘백리수풍망려필식(百里樹風望閭必式)’ 8자로 글을 지으매, 당시의 사람들이 서로 전하여 암송하였다고 한다. 수직(壽職)으로 숭정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묘는 서주동(鼠走洞) 선영(先塋) 아래에 있으며, 최병심(崔秉心)이 찬한 묘갈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