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모정(永慕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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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면 노촌리 676, 덕태산 물줄기가 감아도는 천변에 있는 누정. 1984. 4. 1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되었다. 소유자 및 관리자는 거창 신씨 종중이다. 영모정은 백운면 평장리에서 평장초등학교를 지나 약 1km 정도 오르면 원노촌 마을과 하마치 마을로 갈라지는 갈림길 옆에 신의련 효자각(愼義蓮孝子閣)이 있는데, 효자각(孝子閣) 앞 천변에 세워져 있다. 영모정은 효자 신의련의 효행을 기리고 본받기 위해서 고종 6년(1869)에 세워졌으며, 중개수(重改修)의 내력은 자세히 알 수 없다. 2층의 구조이다. 건물은 팔작 지붕의 형식을 갖추고 지붕의 재료는 기와가 아닌 작은 점판암 판돌인 너와로 올렸다. 주초석은 거북이가 밖을 향하여 가고 있는 모습도 있다. 정자 마루의 수평을 맞추기 위해 냇가 쪽의 초층 기둥은 길고 냇가 반대편으로는 기둥이 짧다. 우물 마루를 가설하였고 기둥 밖으로는 4면 모두 난간을 둘렀다. 지붕은 앞뒤에서 볼 때 용마루 적새 아래로 점판암의 너와 돌을 깔았으나 좌우측면은 까치 구멍에 해당되는 부분은 직각으로 내리고 그 아래로 너와를 놓았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로 초석은 가공 초석이 대부분이다. 내지 쪽의 기둥에는 주련을 달았다. 홑처마 지붕의 익공집의 서까래는 주화 머리의 늘휘로 단청을 베풀었고, 서까래 마구리는 태극문을 넣었다. 각 익공은 초가지를 장식하였고 기둥은 반연화 머리초로 장식하였다. 주두는 먹분 긋기로 처리하였다. 마루는 수평이 틀어진 청판이 곳곳에 보이고 기둥의 열극 현상이 심하다.
정자에는 다음에 기술하는 여러 시운 판액들이 걸려 있다.

【永慕亭記】 鎭安縣治之南二十里 有所謂美溪村 寔美溪愼先生所鍾生棲息之地 而溪之源 出於德泰山 縈廻于五萬洞 溪之上有岸 起十許丈 上有烏頭赤脚之閭 乃美溪先生之以孝旌扁 而輝暎古今者也 岸腰有盤陀一巨巖 可坐十數人 仍搆數架屋於巖上 是永慕亭也 永慕之意 盖欲先生之世世子孫 無忽其瞻依誦法也 嗚呼 惇德至行 袞褒於天朝 孚及於犬羊 垂之竹帛 被之棹楔 榮寵烜赫 將綿亙百世而不泯矣 後生童觀 安敢贅一辭 而描畵盛蹟哉 窃有隱之於癙憂以痒 而不能自解者 夫醜虜之充斥我邦 視古猶今 而在先生 則推孝而全活流人 多至五萬 今也靡哲靡愚 而民將盡劉矣 且在先生之時 人感依德 如德山賴之 而順保性命 今也顧瞻四方 蹙蹙所聘 而絶無一二人卓然可恃者 豈先生之盛德 不世出 上下數十載之間 不可再見耶 抑時丁百六 大運驅逼 而天戚之舞 不能解平城之圍而然耶 愚不敢妄談氣數 而曠感遺徽 祗令人嘐嘐 有起九原之想也 是亭之役 先生之後孫宗奎甫 寶前蹟而請余爲之記 余以托名爲榮 不欲以不文辭 乃言曰 登斯亭 緬想遺矚 則德山峨峨 美水洋洋 眞詮妙諦 煥爛盈矚 而凡爲先生詵詵雲仍 母徒崇飾亭榭 用資一時觀瞻之美 而必也讀先生所讀之書 行先生所行之德 以至一擧足一出言 而不敢忘先生所崇之孝 不敢廢先生所劬之業 紹述前光 家而爲肖孫 移孝爲忠 國而爲良弼 致使當世之人 罔不知美溪翁之有後 而咸嘖以爲醴有源而芝有本也云爾 則永慕之義 於斯盡矣 而儘可以毖保平泉之花石 世守考亭之琴書矣 諸賢之寓慕斯亭者 盍相率而勗之哉 戶曹參議 李寅龜 撰
【영모정기】 진안(鎭安) 현치(縣治)의 남쪽 20리, 이른바 미계촌(美溪村)이 있으니, 바로 미계(美溪) 신 선생(愼先生)이 태어나서 은거하신 곳이다. 시내의 근원은 덕태산(德泰山)에서 발원하여 오만동(五萬洞)을 굽이도는데, 시내 위에는 10여 길이나 되는 언덕이 있고, 언덕 위에는 오두적각(烏頭赤脚, 비석은 검고 비각은 붉음)의 정려(旌閭)가 있으니, 미계 선생의 효자 정려로 고금에 빛을 발하는 곳이다. 언덕의 허리에는 반반한 큰 바위가 있어 10여 인이 앉아서 놀 만한데, 그 위에 몇 칸 집을 지었으니, 이것이 영모정(永慕亭)이다. 영모의 뜻은 대대로 선생의 자손되는 사람들이 첨앙(瞻仰)하고 계술(繼述)하는 도리를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오호라! 선생의 두터운 덕과 지극한 행의는 명(明)나라 조정에서 포장(襃獎)하니, 그 영향이 이적(夷狄)에게까지 올라 빛나는 영총(榮寵)은 앞으로 백세(百世)가 지난다 해도 묻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후생의 천견(淺見)으로 어찌 감히 한 마디나마 덧붙여서 훌륭한 사적을 묘사하려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저윽이 속을 끓여서 생긴 병을 숨기고 스스로 풀지 못한 바가 있으니, 무릇 오랑캐가 우리나라에 꽉 차 있는 현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일반이지만, 선생에 있어서는 지극한 효성으로 말미암아 피난민을 온전히 살린 것이 많게도 5만 인에 이르렀으나, 지금은 현우(賢愚)를 가릴 것 없이 백성은 다 속절없이 죽어가게 되었다. 또 선생의 시대에는 사람들이 모두 덕을 의지하는 것이, 마치 덕이 있는 산을 의지하듯 하여 목숨을 부지하였건만, 지금은 사방을 둘러보아야 애처롭도록 제 살길만 찾고 있어 한 두 사람도 뚜렷이 의지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 어쩌면 선생같은 성덕(盛德)은 시대마다 태어나는 것이 아니어서 상하(上下) 수 천년 동안 다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나 아닐는지? 아니면 시대가 백육(百六, 액회[厄會])의 액운을 만나 대운(大運, 국운[國運])마저 구박(驅迫)을 받아 간척(干戚)의 춤으로 평성(平城)의 포위를 풀 수 없어서 그러한 것일까? 나는 감히 망녕되이 기수(氣數)를 말할 수는 없으나 남기신 훌륭한 점을 추상(追想)할 때, 다만 사람으로 하여금 효효(嘐嘐, 뜻이 크고 말도 큰 소리를 치다)하여 황천(黃泉)에서 다시 일으키고 싶은 생각만 들게 한다. 이 정자의 공사가 끝날 무렵에, 선생의 후손인 종규보(宗奎甫, 甫는 존칭)가 선대의 사적을 간추려서 나에게 기(記)를 써 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이름 내걸기를 좋아하는 터이라 글을 못한다고 사양하지 아니하고 말을 잇기를, 정자에 올라서 조상이 구경하던 바를 추상해 보면, 덕태산은 높다랗고 미계(美溪)의 물은 넓다란데, 진전(眞詮)과 묘체(妙諦)는 찬란하게 눈앞에 다가오니, 모든 선생의 자손되는 많은 분들은 그저 정자나 훌륭하게 꾸며서 한 때의 훌륭한 볼거리로 삼으려 하지말고, 반드시 선생께서 읽었던 책을 읽고 선생께서 숭상했던 효도를 잊지 말고, 선생께서 힘쓰시던 학문을 자파하지 말고 전대(前代)의 광영을 계승하여, 집안에서는 초손(肖孫)이 되어 효도를 미루어 충성하고, 나라에 있어서는 훌륭한 보필자가 되어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미계옹(美溪翁)에게 훌륭한 자손이 있음을 모르는 이가 없게 하여, 모두가 혀를 차면서 동감하기를, “예천(醴泉)은 근원이 있고 영지(靈芝)는 근본이 있다더니 사실이구나!”하게 한다면, 길이 사모하는 뜻을 다 바친 것이 된다 하겠다. 이는 진실로 평천(平泉)의 화석(花石)을 잘 보존하고 대대로 고정(考亭)의 금서(琴書)를 잘 계승하는 길이 되는 것이니, 이 정자에 사모하는 뜻을 부치고 있는 모든 분들은 어떻게 서로 권면하고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호조참의 이인구(李寅龜)가 찬하다.

【판액(板額)1】
鎭安之山有 美溪愼公義連舊址也 公隠居 力學以孝間 壬辰之亂 虜至逼其親 公以身蔽之泣曰 寜殺我母害吾親 虜問其姓名 書而投諸火不㷊 驚曰 天孝也 傍其衆環山不入 賴而得活者數萬人事 聞旌閭仍構 修義副尉 溪之上岸 高千尺 㟁腰有巨巖 公之後人作亭 其頂名曰 永慕 有來徵詩者 用 原韻應之
千尺岸頭活水源 碩人薖軸此中存 至誠終得神明佑 異類寧無父母恩
往蹟曽聞環畫邑 居民共說避泰村 百年遺址風聲遠 堂構如今有子孫
大匡輔國崇祿大夫判中樞府事 慶州 金弘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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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의 산에 아름다운 시내가 있으니 愼義連 공의 舊址이다. 공은 은거하며 학문에 힘쓰고 효성으로 소문이 났다. 임진왜란 때 오랑캐가 와서 그 어버이를 핍박하자 공이 몸으로 어버이를 가리고 울며 말하기를, “차라리 나를 죽이고 우리 어버이를 해치지 말라.” 하였다. 오랑캐가 그 성명을 묻고 성명을 종이에 써서 불에 던졌으나 타지 않았다. 오랑캐가 놀라 말하기를, “하늘이 낸 효자이다.” 하고는 그 무리에게 榜文을 보내 산을 둘러싸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살아난 자가 수만 인이었다. 이 일이 조정에 보고되어 정려(旌閭)와 증(贈) 수의부위(修義副尉)의 첩지를 내렸다. 시내의 기슭 언덕은 높은데 허리에 거암(巨巖)이 있어 공의 후손이 정자를 짓고 영모정이라고 판액(板額)을 달았다. 그리고는 나를 찾아와 시를 부탁하는 자가 있어 원운(原韻)으로 부응한다.
천 길 강안(江岸)에 끊임없는 물,
석인(碩人)이 이곳에 은거하였네.
지극한 효성 마침내 신명(神明)의 도움을 얻었으니,
오랑캐라고 어찌 부모의 은혜를 모를쏘냐.
지난 일 들으니 고을을 둘러쌌다고 하는데,
주민들이 다같이 말하기를 난을 피한 태평촌이라 하네.
백년이 지난 유지(遺趾) 소문은 멀리 들리고,
부자간에 계승하여 지금의 자손이 있구나.
대광보국숭록대부판중추부사(大匡輔國崇祿大夫判中樞府事) 경주(慶州) 김홍집(金弘集)*
*김홍집(金弘集, 1842년~ 1896년) : 개화기의 정치인. 초명은 굉집(宏集), 호는 도원, 시호는 충헌(忠獻). 온건개화파이며 갑오개혁 추진자들의 우두머리였다. 또한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기도 하다.

【판액(板額)2】
德山美水長根源 俯仰之間道所存 海寇投鋒驚異感 天朝命爵降殊恩
居人尙說壬辰事 福地無如孝子村 埜雉飛鳴松梓老 至今瞻慕泣■孫
九世孫 宗奎
덕태산은 기틀이 넓고 미계천은 근원이 깊어서,
우러러보고 굽어보니 도를 보존할 만하다.
바다 오랑캐 칼을 버리고 기적에 놀라니,
조정에서 官爵과 특별한 은혜를 내리셨네.
주민들이 아직도 임진년의 일을 말하니,
효자촌보다 복받은 땅은 어디에도 없으리라.
수풀의 꿩은 울며 날고 소나무 가래나무 늙었으니,
사모하는 후손이 바라보며 지금 눈물 흘리네.
구세손(九世孫) 종규(宗奎)


【판액(板額)3】
[謹次永慕亭韻]
山有朝宗水有源 萬波一脉各相存 追先意篤猶多感 裕後功深豈忘恩
松柏交柯連古道 雲林生色接芳村 崢嶸高閣如斯立 永保遺模継后孫
后孫 愼哲晟
[삼가 영모정에 차운하다]
산에는 조종(祖宗)이 있고 물에는 근원이 있어서,
수많은 갈래 하나의 맥락으로 서로 통하네.
선조를 추모하는 마음 돈독할수록 느끼는 점 많아,
복이 후손에게 미치고 공이 깊으니 어찌 은혜를 잊으리.
소나무 잣나무 얽힌 가지 옛 길에 이어졌고,
구름 낀 단풍숲이 향기로운 마을에 이어졌네.
가파른 고각(高閣)이 새로 지은 듯하니,
남기신 뜻 길이 보존하여 후손들이 이어 가리.
후손(后孫) 신철성(愼哲晟)


【판액(板額)4】
山髙峰也水長源 先生已去道尙存 雖冦寕無誓異佑 惟廷終有降殊恩
居民共誦知天孝 往老相請避禍村 遠樹風聲花遺趾 爲今增感表愚孫
外后孫 梁仁權
산 봉우리 높고 물길이 기니,
선생은 이미 떠났으나 도는 아직도 남았네.
오랑캐라 하더라도 하늘의 보우(保佑)에 놀라지 않을 수 없고,
조정은 마침내 특별한 은혜를 내리셨네.
주민들은 하늘이 알아준 효성을 칭송하고,
노인들은 화를 피한 일을 전해 주네.
멀리 나무들 바람소리 꽃다운 유지(遺趾),
지금 더욱 훌륭하여 못난 후손의 사표(師表)가 되네.
외후손(外后孫) 양인권(梁仁權)

【판액(板額)5】
一曲淸溪百行源 先生雖去道常存 蘆花十里風霜氣 松栢千年雨露恩
王蠋舊聞環畫地 商容自有式閭村 小亭成處增追慕 堂搆遺謨付後孫
嘉善大夫 吏曺叅判 完山 李應夏
한 굽이 맑은 시내 온갖 지류의 근원이 되니,
선생은 떠났으나 도는 아직 남아 있네.
갈대꽃 십 리에 서리 바람 기운이고,
소나무 잣나무 천 년 동안 우로(雨露)의 은혜로다.
왕촉(王蠋)의 무덤을 봉해 주듯 고을을 보호해 주었고,
상용(商容)의 마을에는 절로 경의를 표하였네.
작은 정자 이룬 곳에 추모하는 마음 더해지고,
대를 이어 계승해 온 뜻 후손에게 맡기네.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曺叅判) 완산(完山) 이응하(李應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