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목정(忠木亭)
운영자 23-12-26 18:25 97 hit
충목정 전경충목정충목정 현판충목정 편액-원운
성수면 구신리 1213 상염북 마을회관 앞 마을숲에 있는 정자.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진안지(鎭安誌, 1925)』에 기재되어 있는 황운룡의 「충목정기(忠木亭記)」에 의하면, 대략 1910년 이후로 추정된다. 본디 충목정은 정자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이곳의 정자나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정자나무가 경술국치(庚戌國恥)인 1910년 8월 29일 북쪽을 향해서 쓰러져 수년간 살아날 기약이 없었으니, 나무마저도 임금을 사모하는 염북(念北)의 마음을 가졌다고 하여 ‘염북’이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뒤 이 충목을 기리기 위해 그 밑에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기문은 문리(文理)에 모순이 있다. 이 기문이 쓰인 시기가 1910년인데 경술국치를 당하자 나무가 쓰러져 “……북을 향하여 비스듬히 누운 형상이 되어 있었다. 그 후 수년 동안은 시들어서 살아날 기약이 없었으니……”라는 부분은 글을 쓴 때와 그 뒤의 일이 뒤섞여 시제(時制)가 맞지 않는다. 또 충목정 때문에 마을 이름이 ‘염북’이 되었다는 설은 『호구총수(戶口總數,1789년편책)』에 염북리(念北里)가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타당하지 않다.
충목정은 본디 전면 2칸, 측면 1칸의 너와 우진각지붕 양식이었는데 2005년 홍수 때 유실되고 2008년에 도비, 군비보조금으로 신축되었는데 현재는 시멘트 블럭 위에 초석을 놓고 원주형의 기둥을 세운 육모정이다. 창방이 각각 기둥 위에서 결구되었고 익공으로 장식하였다. 창방 위와 도리장여 아래에 소로를 끼운 소로수장집이다. 연목과 부연을 짠 겹처마 지붕이다. 마루 쪽의 기둥과 기둥 사이는 계자 난간을 둘렀다.

【忠木亭記】 或有問於余曰 忠木亭何爲而作也 願聞其義 余於是焉應之曰 雲水之東 月浪之高 接壤之地 有一巨山 名曰萊東山 山下有一村 名曰念北里 里之設 不知其幾百年矣 民俗熙皥 質儉淳朴 構木爲巢 玆食木實 有巢氏之民歟 鑿井而飮 耕田而食 日出而作 日入而息 堯舜氏之民歟 以憂國奉公爲心主 而盡忠盡誠 但願年豊惟希道泰 村號念北 果非虛也 杜甫詩 每依北斗望京華 蘇軾歌曰 望美人兮天一方 是亦憂國奉公之義也 則念北爲號者 有所據 而村之左右兩水合襟處 有一亭木 設村之時所樹之物也 生此王國 老此王國 體大數十圍 而高數十丈 下可以坐數百人 方圓體乾坤之儀 養成涵雨露之澤 其枝葉之駿茂兮 繽陰翳之蔽芾 無恙東風健長身 貞貞獨立蔭四方 當此盛炎 野夫山童 揮汗而憩 李謫仙之大扇 忽焉無功 騷人學士 滌暑而唱咏 嚴先生之羊裘 怳然似看于斯時也 人皆愛惜 仰之若喬松 敬之如桑梓 寔殿玆土 呵噤不祥 俾此村民 安而綬之 不可以尋常凡木視也 然則以忠爲名何也 木亦有忠乎 天地之間 人與物而同胞 故人之所誠 物亦有感焉 王祥之奈 風中不落 孟宗之筍 雪裏有生 乃是誠感所致也 天運不幸 去庚戌年七月某日某時 日色無光 愁雲慘淡 悲風悽切 有似乎地動之樣 而亭木宛然有顚覆之像 其下村人遊者二三子 驚懼疾走 遠立而視之 則果有向北偃臥之儀 其後數年凋殘 若無生存之期 此靈神之所感而然也 人亦念北 木亦念北 人與物而同符 念北之義 豈不重且斐歟 昔者伯夷之死也 西山之薇 曲拳不伸 田橫之沒也 東島之樹 同日有枯 是則兩人之節義 徹天透地也 故所感發者 於斯見矣 山薇與島樹 爲節云乎哉 爲義云乎哉 蕩蕩乎無能名焉 至於此木 則爲國爲君 而同日同時 向北有偃臥之像 數年有凋殘之像 則以忠爲名 不亦可乎 問者唯唯而去 余亦慽慽馬有所感 而因悉次是語以記之 又從而歌之曰 木兮木兮 可以人而如之 樹木亦然 怳乎人而不知 嗚呼此木 邦國禎幹 曰爾村童 勿剪勿折 歲在 上章閹茂仲秋下浣 晩翠長水黃雲龍記
【충목정 기】 혹자가 나에게 묻기를 “충목정(忠木亭)은 어찌하여 지었습니까? 그 까닭을 알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운수(雲水, 임실[任實]의 고호)의 동쪽과 월랑(月浪) 서쪽의 지경이 맞닿은 곳에 큰 산이 하나 있어 내동산(萊東山)이고, 산 아래에 마을이 있어 염북리(念北里)인데, 마을이 생긴 지는 몇 백 년이나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풍속이 순진하고 검박하여 나무를 얽어서 집을 짓고, 나무 열매를 따먹고 사니 유소씨(有巢氏, 상고의 임금으로 처음으로 집을 짓는 법을 가르친 임금)의 백성이던가?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밥을 먹으면서 해가 뜨면 나가서 일을 하고, 해가 지면 들어와서 쉬니 요순씨(堯舜氏)의 백성이던가? 나라를 걱정하고 공가(公家)에 봉사함으로 심주(心柱)를 삼고 충성을 다하면서 다만 풍년이 들기만을 빌고 태평하기만을 바라니, 마을 이름이 염북(念北, 임금님을 생각한다는 뜻)임이 과연 빈말이 아니다. 두보(杜甫, 당대[唐代]의 시인)의 시에 ‘매양 북두에 의지하여 서울을 바라본다. [每依北斗望京華]’고 하였고, 소식(蘇軾, 송대의 문장가)의 노래에 이르기를 ‘미인(임금을 지칭함)을 바라보니 하늘 끝에 있구려! [望美人兮天一方]’라 하였는데, 이 역시 나라를 걱정하고 공가에 봉사하는 뜻인즉, 염북이라 이름한 것도 근거가 있다 하겠다. 이 마을의 왼쪽과 오른쪽의 두 물이 합쳐진 곳에 정자나무 한 그루가 있으니, 마을이 생길 때 심은 것이다. 이 나라에서 태어나 이 나라에서 늙어 몸통의 크기는 몇 아름이나 되고 높이는 몇 십 길이나 되며, 그 아래에는 수백 인이 앉을 만하다. 방원(方圓)은 건곤(乾坤) 양의(兩儀, 음[陰]과 양[陽])를 본받았고, 성장(成長)은 우로(雨露)의 덕택을 입어 지엽(枝葉)이 무성하기는 어두컴컴하게 뒤얽히고 탈없는 동풍에 건장한 몸체는 정정하게 홀로 서서 사방에 그늘을 드리운다. 한여름 불꽃더위에 야부(野夫)와 산동(山童)이 땀방울을 뿌리고 쉬어 있노라면 이적선(李謫仙, 당[唐]의 시인 이백[李白]의 별호)의 큰 부채가 소용이 없게 되고, 문인(文人)과 학사(學士)가 더위를 씻고 읊조리면 엄선생(嚴先生, 후한[後漢]의 엄자릉[嚴子陵]을 높혀서 부른 말)의 양구(羊裘, 양피로 만든 갓옷. 엄자릉은 양구를 입고 낚시질을 하였다)를 흡사 이 때에 입은 듯하다. 사람들이 모두 아끼고 사랑하여 우러르기를 마치 교송(喬松, 큰 소나무)과 같이 하고, 공경하기를 상재(桑梓, 고향집의 울안에 있는 뽕나무와 가래나무)와 같이 하는데, 이 나무는 이 땅을 맡아 재앙을 물리치고 이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편안하게 유지하게 하니, 예사로운 나무로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충(忠)자로 이름을 붙인 것은 무슨 까닭인가? 나무에도 충성이 있다는 말인가? 하늘과 땅 사이에는 사람과 사물이 같은 품안에서 자라기 때문에 사람이 정성을 바치면 사물도 느끼는 바가 있게 되는 것이므로 왕상(王祥, 동진[東晋] 사람. 자는 휴징[休徵]으로 태보[太保]를 지냈다. 계모를 지성으로 섬겨 얼음 속에서 잉어가 튀어나오고, 새가 저절로 장막 안으로 들어오는 등 이변이 많았다. 특히 계모가 능금을 좋아하는데 바람이 세게 불어 능금이 다 떨어질 것 같아 능금나무를 껴안고 통곡을 하니 강풍 속에서도 능금이 하나도 떨어지지 않았다고 함)의 능금나무(柰)는 바람에도 떨어지지 않았고, 맹종(孟宗, 삼국시대 오[吳]나라 사람. 자는 공무[恭武]로 사공[司空]을 지냈다. 어머니가 병이 나서 겨울철에 죽순이 먹고 싶다 하여 눈 속의 대밭에 들어가서 통곡을 하니, 죽순이 솟아나서 올렸다 함)의 죽순은 눈 속에서도 솟아났으니 이것이 바로 정성의 감화에서 이루어진 것들이다. 천운이 불행하여 지난 경술년(庚戌年, 1910) 7월 모일(某日) 모시(某時)에 태양이 빛을 잃자 수운(愁雲)은 암담하고 비풍(悲風)은 처절하여 흡사 땅이 꺼지는 듯하였는데, 정자나무도 완연히 기우는 듯한 형상을 하였다. 마을의 한유한 사람 몇이 놀라서 달려가 먼 발치에서 서서 보니, 과연 북을 향하여 비스듬히 누운 형상이 되어 있었다. 그 후 수년 동안은 시들어서 살아날 기약이 없었으니, 이는 영신(靈神)이 감동하여서 그렇게 된 것이다. 사람도 북쪽을 생각하고 나무도 북쪽을 생각하여 사람과 사물이 염북(念北)의 의의가 같으니 어찌 소중하고 대견한 일이 아니겠는가? 옛날 백이(伯夷)가 죽으니 서산(西山)의 고사리가 주먹처럼 오그라지고 펴지지 않았으며, 전횡(田橫, 전국시대 제[齊]의 마지막 군주)이 죽으매 동해(東海) 섬(전횡이 무리를 이끌고 섬으로 퇴각했음)의 나무가 같은 날 말라죽었으니, 이는 두 사람의 절의가 하늘과 땅에 통달하였기 때문이며, 사물에까지 감동하게 한 바를 여기에서 보게 되는 것이다. 산의 고사리와 섬의 나무가 절조가 있다 할 것인지? 의리가 있다고 할 것인지? 너무나 탕탕(蕩蕩, 광대한 모양)하여 형언(形言)할 수가 없다. 이 정자나무에 있어서는 나라를 위하고 임금을 위하여 한 날 한 시에 북을 향하여 비스듬히 눕는 형상이 일어났고, 수년 동안 말라 시들은 현상이 있게 되었으니, 충(忠)이라 이름을 붙여도 옳지 않겠는가?”라고 하니, 묻던 사람이 네네 하고 가버렸다. 나 역시 마음 속에 뭉클한 바가 있어 이 말을 모두 조리 있게 적어 기(記)에 가름하기로 하였다. 이어 노래를 달기를 “나무여, 나무여! 사람이 사람답게 행하면 나무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사람이 사람답지 못할 수 있겠느냐? 오호라! 이 나무는 나라의 기둥이로다. 너희들 촌동(村童)들은 분지르지도 말고 꺾지도 말지어다!”라고 하였다. 경술(庚戌, 1910) 중추(仲秋) 하순 만취(晩翠) 장수(長水) 황운룡(黃雲龍)이 기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