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안정(開眼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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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안정 전경개안정
백운면 반송리 359-2 마을 앞 천변에 위치한 정자. 학남정과 나란히 서 있는 개안정은 상량문을 보아 1896년에 건립되었는데, 그 후 여러 번 중수하였다. 건물은 사모 지붕으로 정면2칸, 측면, 2칸의 벽체 없는 무실(無室)정자이다. 홑처마집이며 서까래와 기둥에는 석간주칠을 하였고 마구리는 흰색으로 도채하였다. 지붕의 기와는 전통 기와를 사용하였고 서까래와 기둥, 창방, 중인방, 하인방 등은 석간주로 칠하였다. 또한 서까래 마구리는 흰색으로 칠하였고 양 우주의 주초석은 가공 원형초석을 사용하였고 건물 양 측면의 중앙 기둥은 그대로 기단 위에 놓았다. 배면 쪽에 주초석이 하나 남아 있어서 수리할 당시에 잘못 계산하였거나 여분의 초석을 더 만들어두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루는 전통 우물 마루가 아닌 일본식 장마루로 대체되었고 니스칠이 된 흔적이 여기저기 보인다. 정자 안에는 박연창(朴淵昌)이 쓴 ‘개안정유사’ 판액(板額)과 ‘개안정상량문’ 판액(板額)이 걸려 있다.

【開眼亭遺事】 鎭安縣治南三十里 有一勝區 乃盤松村也. 村前有溪 溪之源 出於八公山 縈廻于莘岩 岩勢磅磚 或聳或坎 仍作小湖 是乃濟龍江 以蟾津江上流也 江之畔 千年巨木鬱鬱蒼蒼 胸圍六抱 有若神明之威 二柱喬松 如盤如盖 嫗蹇佇立 有若丈夫之像 中有開眼亭 寔以供村叟杖屨之所以仍構者也 而遠呑白馬八公之山色 平揖銀河濟龍之江瀨 窮杜陵吉古平野之目 聞梧井梅山之香 眞可謂 騷人墨客之解 錦囊而吐 瓊琚之處也 時在駬南堂朴先生之 移京歸鄕 潛究性理之丙申年間 以 任 鎭 長 三郡 縣監之 互相存問 馬耳之南 復見君子云 而每期于此 或辯郡治做去觴咏 因爲年例事 板揭上樑文 卽任實倅 趙蕉田之所述也 南遊文章詞客 四時不絶 於是乎 斯亭之繁華 登鶴樓鳳坮矣 一自庚戌國恥後 世降俗弛 君子隱退 偏作村丁避暑之處 而額與文 板卽被島夷之所侵 兼無亭名之考證 而閒散無涯矣 至于庚申年間 村論歸一 而重修一新 然 未揭者 是額字與文板 恒塊于中者 多年就中 最可愛惜者 有二 是巨木喬松也 往年春 喬松一株 胸剖而枝葉凋零 是年六月二十八日午前十時三十分 天無風 地無揚塵而平穩日氣也 喞喞有聲而巨木半身 部折而倒臥 此由何以然歟 松之樹齡 三百年 木之樹齡 一千年 雖曰植物學者之辯 然 此喬松之在世 果三百年 巨木之在世 果一千年歟 噫 古人所謂死不可復生 折不可復續 果天壽 奈何 矧可愛惜也哉 與以村老之一登此避暑休息而坐 舍第淵喆君 四從姪昌燮君 與內戚孫姜君大沃 斂膝而請曰 盤松 卽是吾村名之冠 巨木 卽是吾村設基之原 喬木不可以不敬重 丁戊兩年 俱爲枯折 實吾村氓之率皆 嗟惜事也 不可以泯滅其由 書以本末 幸以補吾村史 而多年未揭之 開眼亭額字及上樑文 俱爲揭板之地 是吾村上下歸一之論 老昏中 悚惶無比 然 以副吾擧村之望云 故 余亦同感 不以不文辭 欣然而諾 以書其槪如右而額字 卽 自書 文 卽 索出於自家藏書中 抄而揭之 以補 後日之考證焉 歲 戊申(1968) 秋 七月 旣望 密陽 朴淵昌 書
【개안정 유사】 진안 소재지 남쪽 30리에 경치 좋은 곳이 하나 있으니, 반송촌이다. 마을 앞에 시내가 있으니 수원이 팔공산에서 나와 신암에 감도는데 바위형세가 가득하여 혹 솟기도 하고 혹 파이기도 하여 작은 호수를 만들었으니, 이곳이 제룡강이요, 섬진강 상류가 된다. 강가에 천년거목이 울울창창하고 둘레가 여섯 아름이나 되니 신명의 위엄이 있는 듯하고, 두 그루 높은 소나무가 서린 듯 덮은 듯, 할미가 절름거리며 오래 서 있는 듯, 혹은 장부의 형상이 있는 듯 하다. 그 가운데 개안정이 있으니 이는 마을 어른들께서 집을 짓도록 제공한 것이다. 멀리 백마산과 팔공산의 산색을 머금고 평평히 은하 제룡의 강 물결을 굽어보면서 궁두능길(窮杜陵吉, 주변 지명) 옛 평야의 트인 곳에 오정 매산(梧井梅山)의 향기를 들으니, 참으로 문인묵객이 비단 주머니를 풀어 아름다운 옥을 토해 내는 곳이라 할만하다. 이남당(駬南堂) 박 선생이 서울을 떠나 귀향하여 성리학을 잠구(潛究)하던 병신(丙申, 1896)년간에 때맞춰 임실·진안·장수의 3군 현감이 서로 문안을 드렸다. 마이산 남쪽에서 다시 군자를 보겠다고 하면서 매양 이곳에 모여 혹 군정을 변론하기도 하고 술잔을 들고 시 읊는 것을 실행하여 연례사를 삼아 상량문을 판갈하니, 곧 임실 원 조초전(趙蕉田, 당시 임실군수 趙奎夏의 아호)이 지은 것이다. 남으로 노니는 문장사객이 사계절 끊이지 않아 이에 정자의 번화함이 황학루와 봉황대 만큼 되더니, 경술국치 이후로 세태는 타락하고, 풍속은 해이해져 군자들은 숨어버리고, 마을 청년들의 피서하는 곳으로 되어 버렸다. 이에 판액(板額)과 문판은 곧 일제가 침탈하니 정자 이름의 고증도 없어져 스산하기 이를 데 없다. 경신년간에 이르러 마을 의논이 하나로 돌아가 중수하여 일신하였으나, 액자와 문판을 걸지 못하여 항시 가슴에 뭉클한지 여러 해가 되는 가운데에도 가장 애석한 것이 둘 있으니 거목과 반송이다. 지난해 봄, 반송 한 주의 가슴이 쪼개지고 지엽이 말라 떨어지더니, 그 해 6월 28일 오전 10시 30분에 하늘에 바람도 없고 땅에 먼지도 일지 않았는데 찍-찍 소리가 나면서 거목 반신이 쪼개져 꺾어졌으니 이 무슨 이유인가? 송의 수령이 5백년이고 목의 수령이 1천년이라 한 것은 식물학자의 이야기라 하지만, 이 반송이 과연 삼 백년을 살았으며 거목이 과연 일천 년을 살았는가? 아! 옛사람이 이르기를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 못하고 꺾어지면 다시 이을 수 없는 것이라 했으니, 과연 천수에 어찌하리오! 애석한 일이로다. 촌로와 더불어 한번 여기에 올라 피서하면서 쉬고 앉았는데, 사제(舍第) 연철(淵喆)과 사종질(四從姪) 창섭(昌燮)이 내숙손(內戚孫) 강대옥(姜大沃)과 더불어 무릎 꿇고 청하기를, “반송은 곧 우리 동네 이름의 머리요, 거목은 곧 우리 동네 터를 열게된 근원이니, 경중(敬重)히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무(丁戊, 1967-1968) 양년에 함께 마르고 꺾어졌으니, 실로 우리 동민이 다 함께 슬퍼하는 일입니다. 그 사유를 빠뜨릴 수 없으니 본말을 써서 우리 동네 역사를 보존해야 하는데, 여러 해를 걸지 못했으니 개안정 액자와 상량문을 함께 게판하는 것이 우리 동네 상하의 한 뜻입니다. 노혼 중에 황송하기 그지없지만 우리 온 동네의 바라는 바를 들어주시오” 하기 때문에 나 또한 동감이라 글 못함을 사양치 못하고 기쁘게 허락하여 그 줄거리를 우와 같이 쓰니, 액자는 곧 내가 썼고 글은 내 집 장서 중에서 찾아내어 써서 걸어, 후일의 고증에 도움을 주고자 하노라. 무신년(1968) 7월 16일에 밀양 박연창이 쓰다.

【開眼亭上樑文】 (□□은 판독불능 자) 簿書叢裡抽身出 欲察畝□□*艱難 雲水光中洗眼來 忽有亭□□蕭灑 翼然駿矚 足以暢情 念邑基處四塞深□之區 而民居無一片爽□之所 八公之螺鬟 隐若烟嵐 聳萬古之觀瞻 雙尖之馬耳 屹如風景 作一縣之形勝 奈旱澇項背之相継 而接濟鼻眼之莫開 受重瞳分憂之貴 寧忽自我民視也 顧四面被荒之處 莫如於吾身見之 於焉二東面行尋 不覺一隻眼驚拭 幾千疂雲屏好萊峰峨峨 六七里水聲聞莘谿 灾分三等之列 行遍一邑之中 嗟溢目之有憂 歎暢懷之無暇 蔀屋之疾苦方切若癏在躳 草堂之顔色忽生如瞽得目 心勞政拙惱爾銅章之虛縻 眼忽氣舒完如金箆之自刮 喜名區之獨擅 問主人兮爲誰 山居之耕鑿入眸禾麻菽麥 村秀之誦讀洋耳禮樂詩書 夫何濟龍之肇名 宜有模象之新號 脑襟爽豁那禁長在目之思 體勢淸閒允爲可捿身之地 思蒿目而幾惱 睇翠眉而忽凝 土肥泉甘地得人而尤美 峰迴路轉天教我而遍看 爰改二字 用助六郞. 兒郞偉抛樑東 眼底村閭東復東 骨秀神淸如夢覺 遅遅紅日照牎東. 兒郞偉抛樑西 黃雲滿眼大田西 華山灝氣如藍碧 遥望長安日下西. 兒郞偉抛樑南 蒼蒼上耳面其南 源頭活水淸如許 瀉出两峰杜苑南. 兒郞偉抛樑北 睡僊遥對山之北 石温處士今何居 悵望水南與水北. 兒郞偉抛樑上 榱角逈臨飛鳥上 髙處騁眸神忽驚. 依然身人瓊楼上 兒郞偉抛樑下 餙躳捿息於其下 欄頭百尺闢林霏 垤穴岈洼袵席下. 伏願上樑之後 亭額載新 石齒不老 對此云胡不樂吾心亦凉 望之蔚然而深子居何陋 名焉兹而志喜泉石居然 觀者慘兮忘歸水竹據了 歲 丙申(1896) 趙蕉田.
【개안정 상량문】 바쁜 고을 업무에서 빠져 나와 농사의 상황을 살피려 하였는데, 빼어난 풍광을 보며 눈을 씻고 왔더니 홀연히 시원한 정자가 있구나. 나는 듯이 우뚝한 모습, 가슴을 씻어 내는구나. 이곳은 사방이 막힌 궁벽한 고을이어서, 어떤 마을에도 시원스레 터진 곳이 없다. 이내 속에 우뚝 늘어선 팔공산은 만고의 자랑이고, 풍경처럼 뽀족한 두 봉우리 마이산은 온 고을의 승경이지만, 가뭄과 장마가 이어져서, 눈코 뜰 새 없이 구제하기 바쁘니, 임금님과 수령처럼 존귀한 사람이라도 하늘은 백성들이 보는 대로 본다는 것을 어찌 소홀히 하겠는가. 사방의 재해를 당한 곳을 돌보는 것은 내가 몸소 보는 것이 제일이다. 이에 이동면(二東面, 지금의 백운면 일부지역)을 순행하다가, 나도 모르게 놀라 눈을 비비고 바라보네. 수천 겹의 구름 병풍에 싸인 내동산의 높은 모습, 6, 7리까지 물소리 들리는 신암리 계곡의 시내물, 재해(災害)는 3등급으로 하고, 온 고을을 다 순행해 보니, 눈에 근심이 가득한 것을 탄식하고, 회포를 풀 여가 없음을 슬퍼하게 되도다. 내 몸에 병이 있는 듯이 백성들의 고통을 절실히 느껴야, 소경이 눈을 뜨듯이 초당(草堂)의 안색이 활짝 펴지는 법이다. 마음으로는 애를 썼으나 정사(政事)가 졸렬하여 군수 자리 헛되이 차지한 것이 괴로웠는데, 갑자기 눈에 총기가 퍼지며 금빗[金篦]으로 눈곱을 긁어내는 듯하다. 명승을 독차지한 것을 기뻐하며, 주인이 누구인지 물어 보네. 산촌에 일군 전답에는 벼, 삼(麻), 콩, 보리 등이 보이고, 시골 수재가 글을 읽으니 예악(禮樂) 시서(詩書)가 귀에 가득하다. 제룡(濟龍)이란 명칭이 어찌하여 유래했나, 마땅히 이것저것 참조하여 새 이름을 지어야겠다.* 흉금이 상쾌하니 길이 음미하고픈 마음 어찌 하겠나. 체세(體勢)가 청한(淸閒)하니 충분히 깃들 만한 곳이로다. 세상의 환란 생각하면 근심이 쌓여, 눈썹을 찌푸리게 된다. 물 좋고 기름진 땅 적임자가 있어야 더욱 아름답고, 봉우리들 사이로 굽은 길 하늘이 다 보게 해 준다네. 이에 두 글자를 고쳐서* 대들보 세우는 사람들을 돕는다.
어기영차! 대들보 동쪽에 던지자![兒郞偉抛樑東]* 눈 아래 시골 마을 동쪽의 동쪽, 빼어난 모습 맑은 정신 꿈에서 깬 듯, 더디 뜨는 붉은 해 동창을 비추네. / 어기영차! 대들보 서쪽에 던지자! 황운(黃雲)에 서쪽 대전(大田, 동창들)이 눈에 가득하여라. 화산(華山, 내동산을 가리키는 듯)의 넓은 기운이 푸르고, 멀리 보이는 長安에 해가 서쪽으로 지도다. / 어기영차! 대들보 남쪽에 던지자! 푸르디 푸른 상이암(上耳庵)이 남쪽으로 향했구나. 지극히 맑은 샘물이 솟아 나오고, 두원(杜苑, 반송리의 마을)의 남쪽에 두 봉우리(성수산)를 뿜어내었구나. / 어기영차! 대들보 북쪽에 던지자! 수선루(睡僊樓)가 멀리 산의 북쪽에서 마주보고, 석온처사(石温處士, 미상)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나, 물길 따라 여기저기 창망히 바라보네. / 어기영차! 대들보 위쪽에 던지자! 서까래 쭉 뻗은 곳에 새가 날아들고, 높은 곳으로 눈을 돌리니 정신이 번쩍 드는데, 의연(依然)히 이 내 몸은 경루(瓊樓) 위에 있구나. / 어기영차! 대들보 아래쪽에 던지자! 몸을 단장하고 그 아래 들어가니, 백 척의 난간 앞에 이내 서린 숲이 열리네, 임석 아래에 개밋둑이 우묵하도다. / 삼가 바라건대 상량을 한 뒤에 정자의 판액(板額)이 산뜻해져서 돌처럼 늙지 않아라. 이 정자를 대하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내 마음도 시원하고, 바라보니 우뚝하고 빼어나니 그대 거처 어찌 누추하랴. 이름을 짓고 나니 마음이 기쁘고 천석(泉石)이 반짝반짝하고, 바라보는 이는 날이 어둡도록 돌아가지 못하고 수죽(水竹)에 묻히기를 바라노라. 歲 丙申(1896) 조초전(趙蕉田, 당시 임실군수 趙奎夏의 아호)
*제룡(濟龍)이란 천(川) 이름의 유래가 모호(模糊)한 것에 대한 자문(自問)인 듯.
*당시 주변에서 정자이름을 제룡정(濟龍亭)으로 정했던 모양인데 개안정(開眼亭)으로 바꾼 사실을 말하는 듯 하다.
*아랑위(阿郎偉)는 여럿이 힘을 모을 때 쓰는 감탄사 ‘어기영차’를 한문으로 표현한 글이고 포량동(抛樑東)은 ‘대들보 동쪽에 던지다’이다. 상량식을 할 때 만두나 떡 같은 음식을 사방으로 던지는 관습에서 유래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