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우정(庚友亭)
운영자 23-12-26 18:25 81 hit
경우정경우정 현판경우정 기 편액
백운면 임진로 1080[남계리 234]에 있는 정자. 국도 30호선 백운교 옆에 자리한 정자로 단기 4300(1967년)년 정미년 5월 3일 상량하였다. 백운면에 거주하는 경술생(1910년생) 동갑계원 25명이 건립하였다. 당시 계쌀 100가마를 들였으며 25명 계원의 명단이 경우정에 판액으로 걸려있다. 계원들은 모두 별세하고 그 자녀들이 계를 잇고 있다. 현재 백운에 10여명의 계원들이 거주한다. 정자에는 정귀영(鄭貴泳)이 쓴 기문과 계원들의 성명을 기재한 판액(板額)이 걸려있다.

【庚友亭記】 鎭安之南, 南溪德峴之間, 有一小崗而其後大路, 直通全州市. 客車貨轍, 晝宵連續, 譁然有城府之物態. 前有淸溪, 流出十餘里, 有沼有淵, 浴斯可宜, 比若曾點之詠歸. 論之四圍, 仙閣仙人两峰, 逺近在東, 可占神仙之窟宅. 萊東山岳, 嶄嶄在西, 彷髴蓬萊仙遊徃來之跡. 地接雲水, 群山羅列南方, 如見錦繡奇花之妙. 馬耳筆峰, 屹然北立, 宛若文明之氣像. 崗之畔, 翼然有佇立者, 庚友亭也. 世皆楼亭之淸香淸趣而爲稱者, 不爲不多, 奚獨曰庚友也? 惟我庚戍同庚, 每佳節良辰, 會集崗山片, 致酒賦詩, 歡然談笑, 盡日暮歸, 仍成契案, 名之曰庚友契. 友也者, 友其德也. 千善萬行, 莫非以德爲最, 而外何他求? 亭亦契中所以建, 而揭楣顔庚友亭者, 以其然也.亭旣成, 同庚諸君子, 願有其記於貴泳, 顧此拙工, 累辭大匠之手, 而終是不獲, 恐未免覧者之嘲笑也. 噫! 方此世道彜倫掃地, 而朋友有信, 亦五倫之一也. 固守友誼者, 盛莫盛焉. 非徒會友遊亭, 呼酒賦詩爲能事, 足以責善輔仁之道, 爲法於當時, 則石交之情, 斯亭之名, 將流芳之無限矣. 以契以亭, 善始善終, 雖是契中僉彦之力, 特梁德隐在炯, 崔溪隐龍日, 崔雲岡峻泰, 林隐樵永春, 尸其事者也. 大韓光復後戊申端午節, 東萊鄭貴泳記.
【풀이】 진안(鎭安)의 남쪽 남계(南溪)와 덕현(德峴) 사이에 작은 산등성이가 하나 있는데 그 뒤쪽의 큰 길은 전주시(全州市)와 직통(直通)하므로 객차와 화물차가 밤낮으로 계속 이어져서 떠들썩하게 성부(城府)의 물태(物態)가 있다. 그 앞에 맑은 시냇물이 있어 10여 리(里)를 흘러 나오는데 소(沼)도 있고 연(淵)도 있어 목욕을 하기에도 좋으니, 비교하자면 증점(曾點)이 시를 읊으며 집에 돌아가던 곳*과 같다고 하겠다. 사방 주위를 말하자면, 선각봉(仙閣峰)과 선인봉(仙人峰) 두 봉우리가 동쪽의 원근(遠近)에 있어서 신선(神仙)의 굴택(窟宅)을 점유할 수 있고 내동(萊東) 산악(山岳)이 서쪽에 뾰족하게 있어서 봉래산(蓬萊山)의 선유(仙遊)를 방불하게 한다. 왕래하는 자취는 땅이 운수(雲水 임실(任實)을 말함)와 접하였고 여러 산들이 벌여 있다. 남쪽은 마치 수놓은 비단과 기묘한 꽃들을 보는 듯하고 마이산(馬耳山)의 필봉(筆峰)이 우뚝하게 북쪽에 서있어서 영락없이 문명(文明)의 기상(氣像)과 같다. 산등성이 옆에 날아갈 듯이 우두커니 서있는 것이 경우정(庚友亭)이다. 세상의 모든 누정(樓亭)이 청향(淸香)이나 청취(淸趣)를 호칭으로 삼은 것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니로되, 어째서 유독 ‘경우(庚友)’라고 하였을까. 생각건대 우리 경술년(庚戌年) 동갑 친구들이 아름다운 계절의 날씨가 좋은 때에 산등성이 한쪽에 모여서 술도 마시고 시도 읊으면서 즐겁게 담소(談笑)하다가 해가 다하면 저물녘에 돌아오곤 하였는데 그대로 계안(契案)을 만들어 이름을 경우계(庚友契)라고 하였으니 벗이라는 것은 그 덕(德)을 벗하는 것이다. 천만 가지의 선행(善行)이 덕을 가장 높은 것으로 삼지 않는 것이 없으니 그 밖에 무엇을 구하겠는가. 정자 역시 계중(契中)이 건립해서 현판에 계우정이라고 내걸은 것은 그러한 까닭인 것이다. 정자를 만들고 나자 나이가 같은 여러 군자들이 나에게 기문(記文)을 쓰기를 원하였는데, 나를 돌아보매 솜씨가 변변찮아서 글을 잘 짓는 사람에게 누차 사양하였으나 끝내 그렇게 되지 못하였으니 보는 사람들이 비웃는 것을 면하지 못할 듯하다. 아, 바야흐로 지금은 세상 도덕과 인륜이 땅바닥을 쓸어 없앤 듯이 모조리 사라졌는데 붕우유신(朋友有信)도 또한 오륜(五倫)의 하나이니, 우의(友誼)를 굳게 지키는 것은 참으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일이다. 한갓 벗들을 모아 정자에서 놀면서 술을 부르고 시를 읊는 것만 능사로 삼지 아니하고 족히 책선(責善)하고 보인(輔仁)하는 도리로써 당시에 본보기가 되고 있으니 돌처럼 단단한 우정과 이 정자의 이름이 장차 무한토록 아름다운 향기를 전하게 될 것이다. 계(契)를 보거나 정자를 봐서는 선(善)하게 시작하고 선하게 마무리한 것이 비록 계중의 여러 선비들의 힘으로 만들어졌으나 특별히 덕은(德隱) 양재형(梁在炯), 계은(溪隱) 최용일(崔龍日), 운강(雲崗) 최준태(崔峻泰), 은초(隱樵) 임영춘(林永春)이 그 일을 주관한 사람들이다. 대한(大韓)이 광복(光復)한 뒤 무신년(戊申年, 1968) 단오절(端午節)에 동래(東萊) 정귀영(鄭貴泳)이 기문을 쓰다.
*증점(曾點)이……돌아가던 곳 : 공자(孔子) 앞에서 여러 제자들이 각기 제 뜻을 말할 때 증점(曾點)이 남다르게 술회(述懷)하여 공자의 동감(同感)을 얻은 말. 『논어』〈선진(先進)〉편에 의하면, “늦은 봄에 봄철 옷이 만들어지면 어린애 6-7명을 데리고 함께 기수에 가서 목욕하고 무에 가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며 돌아오리라.”고 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