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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822년 8월에 부임하여 1826년 1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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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1908. [김준(金準), 죽봉(竹峰), 김참봉] 대한이산묘에 배향된 개항기 의병장. 자는 태원(太元). 의병장 김율(金律)이 동생이다. 나주시 문평면 북동리에서 태어났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잠시 동학에 투신했다가 귀향, 고향 고을 아전들의 탐학을 관찰사에게 호소하여 바로잡아 주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906년 동생 김율과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켜 고창·영광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기삼연(奇參衍)의 호남창의회맹소의 선봉장이 되어 나주·함평·담양·창평·영광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기삼연이 체포되어 죽자 김태원은 김율과 함께 전라남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세력이 한창일 때에는 휘하 의병이 200명이 넘었다. 1908년 2월에 장성군 서이면 전투에서 크게 패한 후 점차 그 세력이 쇠퇴하였고 다른 전투에서 김율이 잡혔다. 김태원은 그 뒤에도 계속 항전하였으나 4월 25일 함평군 오산면 박산동[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고 대한이산묘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전북의병사』 하 (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90),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 10 (국가보훈처, 1993), 『진안의 금석문』 (진안문화원, 2001), 홍영기 「한말 호남창의회맹소에 대한 일 고찰」 (『한국근현대사연구』, 2002), 정영태 「이산묘의 건립과 변천에 대한 연구」 (전북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8), 한국민족문화 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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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7~1919. 조선후기~근대 진안 출신의 학자·교육자. 자는 경옥(景玉), 호는 서하(西荷). 주천면 주양리 출생.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했으며 학문을 이룬 후에는 와룡암에서 후학 육성에 전력하였다. 300여 명의 문하생 중에서 많은 인물이 과거에 합격하였으며, 1908년에는 사립 화동학교[현 주천초등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저술로는 『서하집(西荷集)』 11권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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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1916. 자는 원오(元五), 호는 농은(農隱). 계림군(鷄林君) 김균(稛)의 후손이다. 이도복(李道復)이 찬한 묘지명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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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문(1883~?)은 진안군 남면 무등리(현 진안군 백운면 동창리)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 다른 인적 사항은 알 수 없 다. 그는 이석용의 호남 의병창의동맹단에 가입하여 오기열(吳埼烈), 조영 국(趙榮國)과 함께 운량부장(運槿部長)이 되었다. 그 후 의진의 중견 간부 로서 약 1년 6개월 동안 악전고투하다가, 1909년 3월 6일에 의진이 해산 되자 귀향하여 은신 중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1910년 7월 8일에 광주 지방재 판소 전주 지부에서 1년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201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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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6~1877. 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효자. 자는 경화(慶和), 호는 금소(琴巢). 조부는 김동식(金東植)이고 부친은 음죽 현감(陰竹縣監)을 역임한 김현택(金顯澤)이다. 아들 김종관(金鍾觀) 역시 효자로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증직되었으며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성수면 좌포리에서 태어났다. 가문은 대대로 효심이 뛰어났다. 조부 김동식은 효행으로 감사와 어사의 추천을 받았다. 아들 종관 역시 효행이 상소되어 정려와 증직이 내려졌다. 김학배는 타고난 자질이 돈후(敦厚)하였으며, 어려서부터 학문에 전념하여 1870년 실시된 식년시 생원과에 합격하였다. 1877년 부친의 임지인 음죽의 관아에서 병으로 작고하였다. 1886년 동몽교관(童蒙敎官) 조봉대부(朝奉大夫)에 증직되었다. 1904년 최익현이 정려기(旌閭記))를 찬하였으며, 성수면 좌포리에 정려각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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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759년 12월에 부임하여 1762년 1월 순찰사와 친족이 되므로 상피(相避) 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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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1987. 본명은 대준(大駿), ‘해강’은 필명이다. 1903년 4월 16일 전주시에서 태어났다. 1922년 전주신흥학교를 마치고, 1925년 전라북도 공립사범학교(지금의 전주교육대학교)를 졸업한 뒤 진안초등학교, 전주사범학교, 전주고등학교 등에서 교육자로 평생을 보내면서 시를 썼다. 진안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한 6년 동안(1925~1930) 시에 입문, 1925년 『조선문단』 11월호에 〈흙〉이 추천되었고, 1926년 동아일보 공모 한국 최초의 「신춘문예」에 〈새날의 기원〉이 당선되었다. 또 같은 해 『신문예』 7월호에 〈흰 모래 위를 걷는 처녀의 마음〉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해강은 마이산의 신비로움에 심취하여 자신의 호를 ‘남봉(嵐峰)’이라 하였으나 일반적으로 해강(海剛)이라는 아호가 더 알려져 있다. 그 당시 진안에서의 생활은 한국문학사에 획기적인 금자탑을 세운 시기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즉 1920년대 「카프(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 전성기에 동반자 「프로」문학의 기수로 활동하면서 역사적인 작품들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때의 시는 조선일보를 통하여 집중 발표되었다. 〈도수장(屠獸場)〉, 〈지주망(蜘蛛網)〉, 〈조선의 거리〉, 〈아츰날의 찬미자〉, 〈도시의 겨울날〉, 〈빈처(貧妻)〉, 〈직공의 노래〉, 〈주린 자의 ‘설’노래〉, 〈용광로〉와 함께 『조선지광』에 발표된 〈가을의 향기〉, 〈5월의 태양〉 등은 모두 진안의 교직 생활 중 발표한 현실의 참혹한 실상을 고발하는 시들이다. 해강에게 진안에 관한 시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시를 “음풍영월이 아닌, 삶과 현실의 가장 엄숙한 긴장 체계”라고 믿고 사랑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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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660년에 부임하여 1662년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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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7∼1882. 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문신. 자는 봉주(奉周), 호는 야양재(也養齋). 금산군(錦山君) 김신(金侁)의 후손으로 증조는 부호군(副護軍) 김평(金平), 조부는 김상옥(金相沃)이며 아버지는 김성진(金性眞)이다. 아들로는 김동현(金東鉉), 김필현(金弼鉉), 김규현(金奎鉉), 김정현(金正鉉) 등이 있다. 장수군 신기촌(新基村)에서 태어났고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에서 거주하였다. 1867년(70세)에야 생원과에 합격하였다. 세도 정치가 한창이던 1862년 삼정(三政)의 문란에 항거하는 삼남지방 백성들의 봉기가 확산되자, 이에 대한 대책을 3가지로 정리하여 조정에 올리기도 하였다. 1866년 강화도에서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발발하자 척양문(斥洋文)을 지어 “백성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써 나라의 체통을 세울 수 있다”는 대의를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김혁장이 사망하자 각도의 유림들이 예조에 글을 올려 그를 추모하는 뜻을 밝히기도 하였다.《참고문헌》 『사마방목(司馬榜目)』,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진안군사』(진안군사 편찬위원회, 1992), 「성균생원야양재김공묘표(成均生員也養齋金公墓表」(이도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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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1~1810. 초명은 응철(應喆). 김일손(金馹孫)의 후손이다. “효성이 뛰어났다”고 한다. 이병은(李炳殷)이 찬한 기적비명(紀蹟碑銘)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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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689년 3월에 부임하여 1689년 4월 파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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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611년에 부임하여 1612년 파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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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 조선 중기 진안 출신의 무신. 자는 국진(國珍). 정숙공(貞肅公) 김인경(金仁鏡)의 후손으로 직제학 김작(金綽)의 6대손이다. 고조는 진사 김신경(金信經), 증조는 김택(金澤), 무과 김윤적(金允迪)의 손자, 부친은 통정 김윤보(金潤寶)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있었고, 1636년에 선전관을 지냈다. 『호남절의록』에 의하면 병자호란 때에 어가를 따라 강화도를 향하다가 무장의 본분을 자각, 전투에 참여하여 적이 숨어서 쏜 화살에 맞아 순절하였다. 청의 군사가 시신을 물에 던져버려 시신을 수습할 수 없었으나 풀을 묶어 시신을 삼아 매장하였다고 한다. 공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호남절의록』에 기록되었다. 기우만이 찬한 묘갈명이 있다. 《참고문헌》 신종우의 인명사전(http://www.shinjongwoo.co.kr/), 『호남절의록』, 『진안 향토문화 백과사전』(진안문화원, 2004), 『진안향교지』(진안문화원,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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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767년 1월에 부임하여 1768년 8월에 이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