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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873년 2월에 부임하여 1876년 4월 맹산현령으로 전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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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775년 12월에 부임하여 1777년 12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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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겸직이었다. 1649년 1월에 부임하여 1653년 12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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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1~1419. 조선 초기의 개국공신. 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시대 명현 40위 중 한 분. 초명은 겸(謙), 자는 경지(敬之), 호는 구정(龜亭). 검교시중(檢校侍中) 남을번(南乙蕃)의 아들이며, 남은(南誾)의 형이다. 1371년 진사시에 제5등으로 합격하였다. 이후 1408년 대사헌이 되었고, 1414년 우의정, 의령 부원군(宜寧府院君)에 제배(除拜)되고,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로 과거를 관장하여 권도(權蹈)와 성개(成漑) 등을 시취(試取)하였다. 또 하륜(河崙)과 함께 『고려사』를 개수하였다. 1419년 12월 14일 사망하자 세종이 직접 조문하였다. 성품이 활달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마음가짐을 지극히 삼가면서도 바깥 형식에 거리낌이 없었다. 문장이 평정(平正)하고 아름다웠으며, 산술에 두루 통하여 누구도 풀 수 없는 것을 풀어내었으므로, 세상에서 그를 ‘남산(南算)’이라 불렀다. 조선 태조의 묘정(廟廷)에 추가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구정유고(龜亭遺稿)』가 있으며,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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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623년에 부임하여 1625년 파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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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미 제24사단장으로 대전에서 적을 방어하다가 패퇴, 낙오하여 진안지방에서 붙잡혀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는 1899년 출생하여 1923년 보병 소위로 임관되었고 1944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제44사단장으로 유럽전선을 전전하며 전투를 지휘하였다. 2차대전 종식 후 한국의 군정관으로 입국하여 경찰, 후생복지, 운송, 통신관계 업무를 담당하였고, 1949년 1월 일본 삿뽀로로 이동하였는데, 1949년 미 제24사단장으로 취임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대전을 수비하다가 세(勢)부족으로 잔여병력을 수습하여 옥천가도를 찾아 남하하던 중 금산도로로 잘못 진입, 도로를 차단당해 보문산으로 은신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야간에 이동 중 낭떠러지로 떨어지면서 실신하여 철수대에서 낙오하였다. 이후 산속을 헤매던 그는 물로만 연명하다가 36일 만인 8월 25일 당시 상전면(현재 진안읍) 운산리 송대마을(진안지방에서는 상전면 구룡리 코큰이재였다고도 전해지고 있으나 와전임)에서 안천면 주민 한두규(韓斗圭)와 조우하였다. 그러나 언어가 통하지 않아 손짓 발짓으로 지리를 묻다가 한두규의 밀고를 받은 북한군에게 붙잡혀 진안보안서에 유치되었다가 전주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이후 북한을 거쳐 모스크바로 보내져 소비에트 연방공화국(당시)의 라디오 방송에서 대미 심리전에 이용되기도 하였다. 3년간의 포로 생활 뒤 포로교환협정에 따라 1953년 9월 4일 판문점을 통하여 귀환하였다. 한편, 그를 붙잡는데 조력한 한두규는 9·28 수복 후 체포되어 1954년 9월 23일 서울지법에서 징역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교도소에서 복역하였다. 후에 딘 소장이 그의 감형을 탄원하여 1957년 5월 21일 감형 출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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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557년 3월에 부임하여 1559년 6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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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 개항기 진안 출신의 의병. 용담군 이동면(동향면) 대량리 보촌 출신이다. 문태수(←文泰洙) 의진에 가담하여 진안지역에서 활동하며 화약제조, 총기수리 등 주로 의병부대의 화력 지원 활동을 하였다. 1909년 6월 9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 9(국가 보훈처, 1991), 『전북 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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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584년에 부임하여 1587년 파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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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550년대 이전에 재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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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1913. 한말의 의병장. 경상남도 안의(함양군) 출신. 본명은 태현(泰鉉), 별명은 태서(泰瑞), ‘태수’는 의병장 시절의 이름이다. 일찍이 군문에 들어가 1907년 하사에 이르렀다. 1907년 대한제국군이 강제 해산된 후 ‘대한관동 창의장 이인영(李麟榮)’이 의병활동을 촉구하는 격문을 뿌리자 각도 대표들과 출진, 호남창의대장에 임명되어 13도 연합의병부대의 일진이 되었다. 그러나 이인영의 부친상으로 서울 진격계획이 취소되자 의병을 이끌고 무주로 복귀하여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1908년 무주·장수·용담·남원·청산·금산·영동·옥천·상주·청주·보은 등지로 이동하며 일본 군경에 타격을 주는 전투를 벌였다. 11월, 일본 경찰의 밀정과 격투 끝에 부상을 입고 붙잡혀 대구감옥에서 숨졌다. 일설에는 일본의 히로시마(廣島)에서 사형 당하였다고도 한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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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진안 출신의 효자·자선가. 본관은 남평(南平). 호는 지강(芝岡). 용담면 옥거리에서 태어났다. 효성이 지극하였고, 이웃 사람들이 굶주리는 것을 보고 돈과 곡식을 나누어 주어 구휼하였다. 1895년 동학농민운동 때에는 많은 사람들을 모집하여 동학운동에 가담하였으며, 군사들에게 군량을 대어주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전라문화의 맥과 전북 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진안군사』(진안군사편찬위원회,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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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 서울 출신. 한말의 의병장.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34위 중 한 분. 1897년 대한제국군 원주 진위대 고성 분견대의 정교(正校)를 지내고, 뒤에 춘천 분견대에 전입, 1901년 특무정교가 되고 원주 진위대에 전입되었다. 1907년 8월 일제가 대한제국군을 해산하려 하자 300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원주 우편취급소와 일본 경찰을 습격, 3시간 동안 격전하였다. 그 뒤 의병 부대를 소단위의 부대로 편성하고, 제천·죽산·장호원·여주·홍천 등지에서 유격전으로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1908년 2월 29일 일본군과 접전 중 사로잡혀 탈출하던 중 사살 당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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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578년에 부임하여 1580년 파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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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1905. 서울 출신.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34위 중 한 분. 자는 문약(文若), 시호는 충정공(忠正公), 호는 계정(桂庭). 호조판서 민겸호(閔謙鎬)의 아들이다. 1877년 동몽교관이 되었으며 이듬해 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 정자(正字), 검열, 설서(設書), 수찬(修撰), 검상(檢詳), 사인(舍人) 등을 역임하다가 임오군란의 발발로 아버지 민겸호가 살해되자 사직하였다. 1884년 이조참의에 임명된 뒤 도승지 등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하자 국운이 기울어졌음을 깨닫고 죽음으로 항거하여 국민을 각성시킬 것을 결심하고 본가에서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으며, 동상은 안국동 로터리에서 와룡동 창덕궁 앞으로 옮겨졌다. 유고 중 대표적인 것으로 『해천추범(海天秋帆)』, 『사구속초(使歐續草)』, 『천일책(千一策)』 등이 있고, 그밖에 많은 소(疏), 차(箚) 등이 있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