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7∼1882. 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문신. 자는 봉주(奉周), 호는 야양재(也養齋). 금산군(錦山君) 김신(金侁)의 후손으로 증조는 부호군(副護軍) 김평(金平), 조부는 김상옥(金相沃)이며 아버지는 김성진(金性眞)이다. 아들로는 김동현(金東鉉), 김필현(金弼鉉), 김규현(金奎鉉), 김정현(金正鉉) 등이 있다. 장수군 신기촌(新基村)에서 태어났고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에서 거주하였다. 1867년(70세)에야 생원과에 합격하였다. 세도 정치가 한창이던 1862년 삼정(三政)의 문란에 항거하는 삼남지방 백성들의 봉기가 확산되자, 이에 대한 대책을 3가지로 정리하여 조정에 올리기도 하였다. 1866년 강화도에서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발발하자 척양문(斥洋文)을 지어 “백성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써 나라의 체통을 세울 수 있다”는 대의를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김혁장이 사망하자 각도의 유림들이 예조에 글을 올려 그를 추모하는 뜻을 밝히기도 하였다.《참고문헌》 『사마방목(司馬榜目)』,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진안군사』(진안군사 편찬위원회, 1992), 「성균생원야양재김공묘표(成均生員也養齋金公墓表」(이도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