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1~1419. 조선 초기의 개국공신. 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시대 명현 40위 중 한 분. 초명은 겸(謙), 자는 경지(敬之), 호는 구정(龜亭). 검교시중(檢校侍中) 남을번(南乙蕃)의 아들이며, 남은(南誾)의 형이다. 1371년 진사시에 제5등으로 합격하였다. 이후 1408년 대사헌이 되었고, 1414년 우의정, 의령 부원군(宜寧府院君)에 제배(除拜)되고,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로 과거를 관장하여 권도(權蹈)와 성개(成漑) 등을 시취(試取)하였다. 또 하륜(河崙)과 함께 『고려사』를 개수하였다. 1419년 12월 14일 사망하자 세종이 직접 조문하였다. 성품이 활달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마음가짐을 지극히 삼가면서도 바깥 형식에 거리낌이 없었다. 문장이 평정(平正)하고 아름다웠으며, 산술에 두루 통하여 누구도 풀 수 없는 것을 풀어내었으므로, 세상에서 그를 ‘남산(南算)’이라 불렀다. 조선 태조의 묘정(廟廷)에 추가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구정유고(龜亭遺稿)』가 있으며,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