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인백(閔仁伯)
운영자 23-12-18 18:44 728 hit
1552~1626. 조선 중기 진안현감을 지낸 문신. 자는 백춘(伯春), 호는 태천(苔泉). 시호는 경정(景靖). 증조는 첨정(僉正) 민규(閔珪), 조부는 장원(掌苑) 민종윤(閔宗胤), 부친은 부정(副正) 민사권(閔思權)이다. 민성(閔垶)·민청(閔埍) 두 아들과 네 딸을 두었다. 1573년 사마시에 진사로 합격한 후 진안현감으로 1578년에 부임하여 1579년 2월에 이임하였다. 1584년에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을 지냈다. 한 때 사헌부 감찰을 지낼 때 서인(西人)이라는 이유로 안협 현감으로 좌천되었다. 그때 기근이 들었으나 백성을 잘 무휼하고 진안현감으로 전임되었다. 진안 현감으로 재임 중 기축옥사가 발발하였다. 그때 정여립(鄭汝立)이 진안현의 경계로 들어오자 군사를 동원하여 정여립을 자결하게 하고 그 아들 정옥남(鄭玉男)을 잡아 들였다. 그 공으로 예조참의로 승진되고 평란공신(平亂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또한 장례원 판결사, 충주목사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황주목사로 임진강을 지켰으며 왕의 피난에 수행하였다. 성절사(聖節使)로 명(明)에 다녀왔다. 천장 문안관(天將問安官), 청주목사 등을 거쳐 1598년 여양군(驪陽君)에 봉해졌다. 1604년 주청부사(奏請副使)로 명에 다녀온 뒤 안변부사, 한성부좌윤 등을 역임하였다. 1621년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저서로는 『태천집(苔泉集)』이 있다. 묘는 김포시 월곶면 비아산(比兒山) 선대 묘역의 해좌(亥坐)인 언덕에 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우암집(尤菴集)』, 『국역 국조인물고』(세종대왕 기념 사업회, 1999), 『진안군 향토문화백과사전』(진안문화원,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