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2~1626. 조선 중기 진안현감을 지낸 문신. 자는 백춘(伯春), 호는 태천(苔泉). 시호는 경정(景靖). 증조는 첨정(僉正) 민규(閔珪), 조부는 장원(掌苑) 민종윤(閔宗胤), 부친은 부정(副正) 민사권(閔思權)이다. 민성(閔垶)·민청(閔埍) 두 아들과 네 딸을 두었다. 1573년 사마시에 진사로 합격한 후 진안현감으로 1578년에 부임하여 1579년 2월에 이임하였다. 1584년에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을 지냈다. 한 때 사헌부 감찰을 지낼 때 서인(西人)이라는 이유로 안협 현감으로 좌천되었다. 그때 기근이 들었으나 백성을 잘 무휼하고 진안현감으로 전임되었다. 진안 현감으로 재임 중 기축옥사가 발발하였다. 그때 정여립(鄭汝立)이 진안현의 경계로 들어오자 군사를 동원하여 정여립을 자결하게 하고 그 아들 정옥남(鄭玉男)을 잡아 들였다. 그 공으로 예조참의로 승진되고 평란공신(平亂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또한 장례원 판결사, 충주목사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황주목사로 임진강을 지켰으며 왕의 피난에 수행하였다. 성절사(聖節使)로 명(明)에 다녀왔다. 천장 문안관(天將問安官), 청주목사 등을 거쳐 1598년 여양군(驪陽君)에 봉해졌다. 1604년 주청부사(奏請副使)로 명에 다녀온 뒤 안변부사, 한성부좌윤 등을 역임하였다. 1621년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저서로는 『태천집(苔泉集)』이 있다. 묘는 김포시 월곶면 비아산(比兒山) 선대 묘역의 해좌(亥坐)인 언덕에 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우암집(尤菴集)』, 『국역 국조인물고』(세종대왕 기념 사업회, 1999), 『진안군 향토문화백과사전』(진안문화원, 2004)
  • 개항기 진안 출신의 의병. 진안군 용담면에서 태어났다. 1908년 창의하여 박경삼 등과 함께 약 2년 동안 용담과 금산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하며 군자금 확보에 주력하였다. 《참고문헌》 『진안지역 근현대 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진안 향토문화백과사전』(진안문화원, 2003), 광주지방법원전주지청 판결문[공훈전자사료관(http://e-gonghun.mpva.go.kr/)
  • 1524~1580. 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시대 명현 40위 중 한 사람.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군옥(君沃), 호는 관원(灌元). 아버지는 이조판서 박충원(朴忠元)이다. 조성(趙晟) 형제의 문인이다. 1543년 진사가 되고 1552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에 보임되었다가 곧 예문관검열과 정자를 역임하였다. 1555년 사가독서하고, 곧 부수찬을 지냈다. 그 해 을묘왜변을 계기로 경상도 평사(慶尙道評事)가 되어 유장(儒將)을 양성하는 책임을 맡았다. 곧 수찬을 거쳐 병조와 이조의 좌랑을 지내고, 1556년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동지사(冬至使)를 따라 명(明)에 다녀왔다. 1558년 이조정랑을 거쳐 홍문관 부교리, 의정부 검상, 사인 등을 역임하였고, 사헌부 장령과 교서관 교리를 겸하였다. 그 뒤 성균관 직강을 지내고 승문원 참교가 되었다. 1559년 장단 부사(長湍府使)가 되어 치적이 현저하였다. 1563년 사간원 대사간에 올랐다가 성균관 대사성으로 옮겼고, 곧이어 예조·형조·병조의 참의를 두루 역임하였다. 1565년 도승지가 되었고, 곧 시약청 제조(侍藥廳提調)를 거쳐 한성 좌윤이 되었다가 대사헌이 되었다. 동인과 서인의 정쟁이 심함을 걱정하여 이를 제지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편저로 『밀산세고(密山世稿)』가 있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한말의 의병. 진안 출신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1907년 9월 12일 이석용의 호남의진에서 한규정·박문국(←)과 함께 보급부장으로 활동하였다. 더 자세한 기록은 없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 한말의 의병 용담군 이동면 하행원리(진안군 동향면 성산리 하향마을) 출신이다. 1908년 초 문태수가 지휘하는 호남의병단에 가입한 후 박춘실(朴春實)의 선봉 부대에 배속되어, 덕유산을 거점으로 각지에서 유격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1909년 9월 동료의병 20명과 함께 검거되어 10월 8일 전주재판부에서 태(笞) 100도를 맞고 풀려났다.
  • 용담현령. 1671년 5월에 부임하여 1676년 4월 임기만료 체임. 관아건물이 협소하여 토성 아래에 새로 고쳐지었다. 읍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 ⇒박춘실(朴春實)
  • 2대 진안군수. 1946. 7. 30 부임하여 1947. 10. 23까지 1년 3개월간 재임하였다.
  • 한말의 의병. 일명 보국(甫局). 성수면 오봉리 출신이다. 1907년 9월 12일 이석용의 호남의병창의동맹단에 가맹하여 한규정·박금동(←)과 함께 보급책임을 맡았다. 약 6개월 동안 의병 활동에 참가하던 중, 1908년 3월 21일 운현(雲峴)에서 일본군 토벌대의 기습을 받아 16명이 전사하고 2명이 생포될 때 간신히 죽음을 면하였다. 그 뒤 임실, 진안, 남원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 3월 6일 의진이 해산된 이후에도 그는 계속 이석용을 따랐으며, 경술국치 이후에는 김필수·김운서와 함께 남원군의 면사무소와 일본경찰의 앞잡이인 조선인의 집을 습격하는 등으로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4년까지 지하운동을 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5년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77년에 건국포장에 추서되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 9(국가보훈처, 1991), 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 진안현감. 1708년 10월에 부임하여 1710년 3월에 이임하였다.
  • 진안현감. 1562년 7월에 부임하여 1563년 6월에 이임하였다.
  • 1836~1900. 자는 양숙(良淑). 충정공(忠貞公) 박심문(朴審問)의 후손이며, 통정대부 박이상(朴履祥)의 아들이다.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신영균(申永均)이 묘갈명을 찬하였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1854~1940. 자는 여성(汝性). 충정공(忠貞公) 박심문(朴審問)의 후손이며, 박이상(朴履祥)의 아들이다. 부호군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1707~1765. 조선 후기 진안에서 활동한 학자. 자는 성응(聖應), 호는 주천(朱川)·만곡(晩谷). 판결사(判決事) 박적손(朴迪孫)의 후손이고 박초옥(朴楚玉)의 아들이다. 1746년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진안 주천과 와룡암(臥龍庵)에서 후진들을 가르쳤다. 세상의 공명에는 담담하였고 빈곤한 생활에도 개의치 않았다. 예학의 거두인 김간(厚齋 金幹)에게 수학하여 스승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 경전이나 성리서 및 예학은 물론, 선가(仙家)·불가(佛家)·복서(卜筮)·의약·천문·지리·재정·군사 등에까지 통달하였다. 주요 저술로는 「대학구문통변(大學句問通辨)」·「중용구문통변(中庸句問通辨)」·「태극도변의(太極圖辨疑)」·「동유예휘(東儒禮彙)」·「상례상변(喪禮常變)」·「홍범연의(洪範衍義)」·「고금성현총록(古今聖賢總錄)」과 시문 50여 권이 있다. 《참고문헌》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한국 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호남인물지』(호남인물지 편찬위원회, 1991)
  • 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효자. 할아버지는 추국관(推鞫官) 박수현(朴秀賢)이다. 동몽교관에 증직되었으며 1780년 정려를 받았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진안의 맥』(진안군, 1982),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진안군사』(진안군사편찬위원회,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