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의 의병. 일명 보국(甫局). 성수면 오봉리 출신이다. 1907년 9월 12일 이석용의 호남의병창의동맹단에 가맹하여 한규정·박금동(←)과 함께 보급책임을 맡았다. 약 6개월 동안 의병 활동에 참가하던 중, 1908년 3월 21일 운현(雲峴)에서 일본군 토벌대의 기습을 받아 16명이 전사하고 2명이 생포될 때 간신히 죽음을 면하였다. 그 뒤 임실, 진안, 남원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 3월 6일 의진이 해산된 이후에도 그는 계속 이석용을 따랐으며, 경술국치 이후에는 김필수·김운서와 함께 남원군의 면사무소와 일본경찰의 앞잡이인 조선인의 집을 습격하는 등으로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4년까지 지하운동을 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5년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77년에 건국포장에 추서되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 9(국가보훈처, 1991), 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