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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 의병 용담군 이동면 용암리 출신. 1908년 초 문태수가 지휘하는 호남의병단에 가입한 후 박춘실(朴春實)의 선봉 부대에 배속되어, 덕유산을 거점으로 각지에서 유격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1909년 9월 동료의병 20명과 함께 검거되어 10월 8일 전주재판부에서 태(笞) 100도를 맞고 풀려났다. 2013년 대통령표창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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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659년 9월에 부임하여 1661년 3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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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정공(糾正公) 박현(朴鉉)의 후손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옥과판관(玉果判官)에 이르렀다. 송주홍(宋柱弘)이 찬한 묘갈명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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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 명필. 평남 대동군 출신으로 대과를 거쳐 탁지부 참서관을 지낸 인물로 전해진다. 을사늑약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은둔하여 진안, 무주지방에서 활동하였다고 한다. 이 지방에서 많은 후진을 길러냈고 좋은 작품과 다수의 금석문과 현판 등을 남기고 있다. 대한이산묘 초기의 사우(祠宇)이던 ‘駬山精舍’ ‘麗澤軒’ ‘仁知齋’ 등의 현판이 그의 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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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문은 지금의 진안군 동향면 학선리(鶴仙里, 당시는 용담현)에서 태 어난 것으로 전할 뿐 인적 사항에 대하여는 전혀 알수 없다.
그는 구국 항일의 큰 뜻을 품고, 동지 10여명을 규합하여 문태서 창의소를 찾아가서 함께 의거 활동을 하기로 굳게 맹세하였다. 이에 호남의병 단을 조직하여 문태서를 총참모지휘장으로 추대하고 그는 비서가 되었다. 그리하여 약 4년 동안 때로는 문태서 의병장의 부장(副將)으로 활동하고 때로는 1지대를 이끌고 덕유산 주변의 3도 각 지역을 횡행하면서 끈질긴 유격 활동을 전개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1912년 8월 추석절을 맞이하여 그는 문태서 의병장을 따라 안의군 서상 면(安義郡 西上面)에 있는 문태서의 집에 가서 추석을 지내고 쉬고 있다 가 8월 17일에 문태서와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10년 형을 받아 대구 감 옥에서 복역을 마치고 돌아 왔는데 동향면 주재소의 석천(石)1l) 순사가 심하게 감시하므로 참다 못해 석천 순사를 단도로 찔렀다. 이에 살인 미수 로 다시 형을 받아 복역하다가, 옥중 고혼이 되었다. [참조] 전북의병사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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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용 (朴順用)
박순용(1882~?)은 용담군 일서면 구성리(龍潭郡 一西面 九星里, 지금 진안군 주 천면) 출신이다.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전북과 경남 등지에서 문태수의진(文泰洙義陣)과 전북 장수군(長水郡)에서 최익삼의진(崔益三義陣)에 참여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07년 음력 7월 14일부터 1910년 음력 1월 15일까지 문태수의 휘하에서 의병 1백 40~50명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전북 금산(錦山)ㆍ무주ㆍ용담ㆍ장수ㆍ진안ㆍ운봉(雲峰)ㆍ진산(珍山)ㆍ고산(高山)ㆍ전주(全州)ㆍ임실(任實), 경남 안의(安義)ㆍ함양(咸陽)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음력 8월에는 의병 약 150여 명과 함께 금산 읍내를 공격하여 우편취급소와 재무서 각 1동, 일본인 가옥 5동, 한인 가옥 4동을 불태웠으며, 일본인 3명을 사살했다. 1908년 음력 2월에도 관유(官有) 건물 2동, 민가 6동을 불태우고, 엽전 60냥을 군자금으로 모집하였다. 그리고 1910년 음력 2월 최익삼의진에 참여하여 전북 장수군 문천면(文川面) 옥자동(玉子洞)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10년 7월 1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이른바 폭동ㆍ강도ㆍ살인ㆍ상인(傷人)ㆍ방화죄로 징역 7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201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공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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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8~1456. 조선 초기의 문신. 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시대 명현 40위 중 한 사람. 자는 신숙(愼叔), 호는 청재(靑齋). 할아버지는 박침(朴忱)이고 아버지는 박강생(朴剛生)이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사온서직장(司醞署直長)이 되었고, 1436년에 친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기주관(記注官)으로 재직할 당시 함길도 절도사 김종서(金宗瑞)가 북방에 육진을 개척할 때 종사관(從事官)이 되었으며, 야인(野人: 여진족)에 대한 안무책(安撫策)으로 남쪽 지방의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할 것을 절도사에게 건의하여 시행하였다. 1447년 평안도 판관이 되었고, 이듬해인 1448년 도체찰사(都體察使)의 종사관 등을 역임하였다. 1453년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기 위해서 일으킨 계유정란 때 김종서 등이 살해되자 크게 분개하여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은밀히 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 등과 왕래하면서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였다. 1456년 질정관(質正官)으로 명(明)에 다녀오다가 의주에 이르러 성삼문 등 육신(六臣)이 참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음독자살하였다. 일찍이 세종과 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을 뿐 아니라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을 보살펴 달라는 문종의 고명(顧命)을 받았다. 정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충남 공주 숙모전(肅慕殿)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참고문헌》 『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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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625년에 부임하여 1630년 임기만료로 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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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550년대 이전에 재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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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1968. 근현대 진안 지역의 효부. 허채(許採)의 부인이며 아버지는 판관(判官) 박종혁(朴宗赫)이다. 총명하고 매사에 솔선수범하며 후덕하고 인심 좋기로 정평이 있었다. 효부로도 유명하여 『원용담군지(元龍潭郡誌)』와 족보에는 시어머니의 5년 병환을 극진히 구완하였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또한 종부로서 선영에 대한 제사를 극진히 모셨으며, 당내간(堂內間)의 친목을 돈독히 하였고 자녀 교육에도 성의를 다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원용담군지』(용담향교, 1973),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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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경삼(卿三). 정재공(貞齋公) 박의중(朴宜中)의 후손이다. 손우식(孫祐植)이 묘갈명을 찬하였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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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효자. 호는 반곡(盤谷). 충정공 박심문(朴審問)의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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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열(1907.08.17.~1988.03.03.) 전라북도 진안 上田 珠坪 506 출신 애국지사. 1929년 11월 서울 협성실업학교(協成實業學校) 3학년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으로 다수의 한국 학생들이 일경에 붙잡히는 등 탄압을 받게 되자, 이것을 일제의 민족차별정책으로 규정하고 각지의 학생들과 동맹휴교 및 시위운동을 전개하여 일제의 탄압에 대항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1929년 11월 16일 정윤희(鄭允熙)·이세원(李世遠) 등과 함께 약 1백여 명의 학생들을 규합하여 두 부대로 나누어 '학원의 독립', '만세, 피압박 민족' 등의 문구를 적은 기(旗)를 각각 선두에 들고 교문을 나서, 종로와 파고다공원,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익선동(益善洞)을 지나 창덕궁을 거쳐 봉익동(鳳翼洞)으로 각각 시위 행진을 주도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1930년 7월 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실형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같은 달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9월에 집행유예 3년이 확정되었다.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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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9~? 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문신. 호는 능계(菱溪), 자는 중오(仲吾). 증(贈) 이조참의 박윤무(朴允茂)의 후손이고 부는 박정수(朴禎壽)이다. 동향면 능금리 내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서 성리학을 배웠으며 공부에 몰두하여 마을의 후진 교육에 힘썼다. 49세 때 식년시에서 진사 3등으로 합격하였다. 성균관 지사를 지냈으며 그 후 낙향하여 용담향교에 사마재를 건립하고 향리 발전과 후학 교육에 힘썼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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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833년 5월에 부임하여 1833년 12월에 이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