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심문(朴審問)
운영자 23-12-18 18:44 688 hit
1408~1456. 조선 초기의 문신. 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시대 명현 40위 중 한 사람. 자는 신숙(愼叔), 호는 청재(靑齋). 할아버지는 박침(朴忱)이고 아버지는 박강생(朴剛生)이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사온서직장(司醞署直長)이 되었고, 1436년에 친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기주관(記注官)으로 재직할 당시 함길도 절도사 김종서(金宗瑞)가 북방에 육진을 개척할 때 종사관(從事官)이 되었으며, 야인(野人: 여진족)에 대한 안무책(安撫策)으로 남쪽 지방의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할 것을 절도사에게 건의하여 시행하였다. 1447년 평안도 판관이 되었고, 이듬해인 1448년 도체찰사(都體察使)의 종사관 등을 역임하였다. 1453년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기 위해서 일으킨 계유정란 때 김종서 등이 살해되자 크게 분개하여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은밀히 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 등과 왕래하면서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였다. 1456년 질정관(質正官)으로 명(明)에 다녀오다가 의주에 이르러 성삼문 등 육신(六臣)이 참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음독자살하였다. 일찍이 세종과 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을 뿐 아니라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을 보살펴 달라는 문종의 고명(顧命)을 받았다. 정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충남 공주 숙모전(肅慕殿)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참고문헌》 『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