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담현령. 1811년 8월에 부임하여 1815년 6월 김제현령으로 영전하였다.
  • 용담현령. 1848년 1월에 부임하여 1848년 3월 재임 중 사망하였다.
  • 32대 진안군수. 1981. 12. 23 부임하여 1982. 9. 18 까지 9개월간 재임하였다.
  • 1848~? 개항기 진안군수를 지낸 무신. 보은군 왕래면(旺來面) 적암리(赤巖里)에서 태어났다. 1866년에 무과에 급제한 후 훈련원 주부(主簿), 웅천(熊川)현감, 곽산(郭山)군수 등을 지냈으며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는 군무아문 참의(軍務衙門參議), 나주부 세무시찰관(羅州府稅務視察官), 영천(永川)군수, 증산(甑山)군수, 장수(長水)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진안 현감으로 부임한 것은 1907년이었으며 이듬해 초에 이임하였다. 《참고문헌》 『대한제국 관원 이력서』
  • 용담현령. 1590년에 부임하여 1593년 사직. 정유재란 때 불탄 향교를 용두동에 옮겨 창건하였다. 벼슬이 통정대부에 이르렀다.
  • 박창선(1888.7.13.~1959.3.28)한말의 의병으로 이명은 朴昌甫이며 용담군 이동면 하행원리(진안군 동향면 성산리 하향마을) 출신이다. 1908년 초 문태수가 지휘하는 호남의병단에 가입한 후 박춘실(朴春實)의 선봉 부대에 배속되어, 덕유산을 거점으로 각지에서 유격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1909년 9월 동료의병 20명과 함께 검거되어 10월 8일 전주재판부에서 태(笞) 100도를 맞고 풀려났다. 2000년 대통령표창 수상하였다. [참고문헌] 공훈록
  • 1875∼1914. 개항기 진안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박춘실은 을사늑약 후 의병을 모아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서 전과를 올렸으며 문태수 의진과 연합하여 13도 연합 의병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다시 본거지로 돌아온 후 덕유산 일대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본관은 밀양(密陽). 박동식(朴東植)이라고도 한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무주·장수·진안·용담 등지에서 격문을 배부하여 의병을 모집하였다. 의병 52명을 이끌고 용담 구봉산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6년 가을 문태수 의진과 연합하여 장수 및 무주 일대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으며, 이듬해 13도 연합의진의 서울 진공이 있을 때에 호남창의대장으로 양주까지 진출하여 참전한 바 있다. 1907년 무주 상창곡에서 적과 교전하여 다시 전과를 올렸다. 1908년에는 무주군 구천동에서 일본군 헌병대와 교전하는 등 1909년 3월까지 5년 동안에 걸쳐 진안군 천반산, 성수산, 장수군 덕유산, 무주군 적상산, 토옥동 문성어전, 농수리, 양악, 진도리 등지에서 60여 차례 교전하였다. 김성범·문태수와 함께 200~700명의 의병을 지휘하여 경상북도와 전라북도를 무대로 일병 300여 명을 사살하고 무기 400여 정을 노획하는 전공을 세웠다. 1909년 5월 6일 일본군 토벌대 30명이 장계 등지로 출동하였다. 8일 오후 박춘실은 130명의 동지와 더불어 유진하고 있는 문성동 북쪽에 떨어진 산중에 이르러 적군과 교전하던 중 의병 13명이 전사하고 박춘실은 체포되었다. 1909년 7월 17일 교수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14년 전주형무소를 탈옥하려다 실패하였다. 그 후 대구형무소로 이감되자 벽을 파괴하고 동지 100여 명을 탈옥시킨 후 본인은 자진 순사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 1(국가보훈처, 1986)
  • 30대 진안군수. 1980. 3. 12 부임하여 1980. 12. 1까지 9개월간 재임하였다.
  • 1871~? 개항기 진안 출신의 의병. 정천면에서 태어났다. 1907년 말 문태서(文泰瑞) 의진에 가입, 약 1년 6개월 동안 덕유산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하였다. 1908년 2월 15일 밤에는 경상남도 안의군 황산면 신모 가택에 잠입하여 엽전 1백 냥을 군자금으로 확보하였다. 1909년 6월 9일 전주 재판부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참고문헌》 『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진안 향토문화백과사전』(진안문화원, 2003), 광주 지방법원 전주지청 판결문[공훈전자사료관(http://e-gonghun.mpva.go.kr/)
  • 진안현감. 1781년 7월에 부임하여 1782년 10월에 이임하였다.
  • 호는 초산(樵山). 최성식(崔性植)이 지은 초산기(樵山記)가 있다.
  • 용담현령. 1833년 5월에 부임하여 1834년 2월 강등되어 이임하였다.
  • 호는 구재(龜齋), 사시(私諡)는 정효(靖孝). 박소(朴紹)의 후손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여러 번 포장(褒獎)이 있었고 군지와 도지에 사적이 실렸으며 벼슬은 사헌부 감찰에 이르렀다. 이지(李至)가 찬한 유허비문과 아들 박승우(朴勝雨)가 쓴 가장(家狀)이 전한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진안현감. 1791년 12월에 부임하여 1793년 6월 어사가 봉고파직하였다.
  • 1818~1881. 자는 신재(愼哉). 정재공(貞齋公) 박의중(朴宜中)의 후손이다. 호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아들 박용묵(朴庸黙)은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이다. 손우식(孫祐植)이 찬한 묘갈명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