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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향면 숭모사에 배향된 조선 전기 문인. 자는 천경(天經), 호는 임회당(臨淮堂), 고려 수절신 박힐(朴詰)의 고손이며 초산 군수 박린(朴麟)의 아들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55년, 사헌부 감찰로 있던 중 단종이 폐위되자 아버지와 함께 고향 금산으로 낙향, 영월로 가려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집 뒤에 단을 쌓고 단종에게 매년 제사 지냈으며 예류정(禮流亭)을 짓고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박희권이 진안에 거주하지는 않았으나 그 후손들이 진안으로 이주하여 살았고, 그를 비롯해 반남 박씨를 배향한 재각 숭모사가 진안군 동향면 능금리 안쇠실 뒷산에 있다. 무주군 안성면 도산서원과 진안군 동향면 숭모사에 배향되어 있다. 고조부 박힐, 아버지 박린과 함께 무주군 안성면 금평리 두문마을 입구에 삼세충의비각이 세워져 있다. 이유태가 지은 행장과 유희춘이 지은 찬이 있다. 《참고문헌》 『적성지』(1898),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진안군사』(진안군사 편찬위원회1992), 鎭安郡史(진안군,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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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705년 10월에 부임하여 1707년 2월 시강원문학으로 전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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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대 진안군수. 1984. 11. 1 부임하여 1987. 3. 10까지 2년 3개월간 재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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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7~1916. 자는 경원(敬元), 호는 만회(晩悔). 백인걸(白仁傑)의 후손이며, 효행으로 포장을 받은 백치수(白致洙)의 아들이다. 벼슬은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에 이르렀다. 묘갈명은 윤영구(尹寧求)가 찬하고, 판돈녕원사(判敦寧院事) 윤용구(尹用求)가 글씨를 썼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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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1936. 전라북도 정읍 출신의 독립 운동가.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34위 중 한 분. 호는 구파(鷗波).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을 목격하고 고향에 돌아가 동지를 규합하여 일제와의 무장항쟁을 전개하였다. 1933년 주중(駐中) 일본 대사가 상해 훙커우(虹口)의 일본식 요정에서 일본 정객·참모부원, 친일 중국 정객과 군인 백여 명을 초대하여 연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이강훈(李康勳)·원심창(元心昌)과 함께 습격하려다가 잡혔다. 일본 나가사키 법원(長崎法院)에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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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학수(1872~?) 용담군 이남면(二南面) 비단리(鼻丹里) (현 상전면 구룡리 금당) 출신 의병, 1908년 경남 안의군(安義郡, 현 함양군) 황산면(黃山面)에서 문태수의진(文泰洙義陣)에 참여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08년 2월 15일 의병 수 명과 함께 안의군 황산면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1909년 6월 9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강도죄로 징역 10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201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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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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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829년 10월에 부임하여 1830년 8월 순안현령으로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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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사묵(士黙), 호는 겸재(謙齋). 수직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받았다. 절효공(節孝公) 서릉(徐稜)의 후손이며, 사복시정(司僕寺正) 서국빈(徐國賓)의 아들이다. 서정표(徐廷杓)가 찬한 행장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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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진안군수였다. 1917. 9. 10 부임하여 1919. 10. 8 옥구군수로 전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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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군수. 1900년 이후 부임하였으나 부임연대와 이임연대는 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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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 개항기 진안 출신의 의병. 일명 서병훈(徐丙勳). 호는 고암(孤岩).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진안에서 ‘진안동맹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항일 대열의 길에 들어섰다. 이석용(李錫庸) 의진(義陣)에 합류한 후 진안읍을 습격하여 일본군을 패주시키고 많은 군수물자를 노획하기도 하였다. 1908년 3월에는 운현(雲峴)에서 일본군과 일대 격전을 벌였으나 박운서(朴雲瑞) 등 16명의 동료 의병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1968년에 대통령 표창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002년 임실군 성수면 소충사에 배향되었으며, 2005년에는 임실군 성수면 태평리 1008-5번지 ‘운현전적지 추모공원’ 내에 ‘운현전적 의혼추모비(雲峴戰績義魂追慕碑)’가 건립되었다. 《참고문헌》 『진안지』(진안 향교, 1924),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전북의병사』(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92), 『진안군사』(진안군사편찬위원회,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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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802년 9월에 부임하여 1806년 6월 대흥현령으로 영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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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영춘현감이었다가 1758년 5월에 용담현령으로 부임하였으나, 전임지의 환곡사건으로 잡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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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580년에 부임하여 1583년 병으로 물러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