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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761년 10월에 부임하여 1762년 6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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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865년 9월에 부임하여 1865년 12월 봉고파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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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겸직이었다. 1654년 2월에 부임하여 1655년 1월에 이임하였다. 1655년 1월에 진안현을 다시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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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875년 4월에 부임하여 1875년 12월 가평군수로 전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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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1940. 한말의 학자, 의사(義士).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34위 중 한 분. 초명은 진삼(鎭三), 자는 도홍(道弘), 호는 남파(南坡) 또는 율재(栗齋). 기우만(奇宇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고광선(高光善)·박인섭(朴寅燮) 등과 교유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기우만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장성과 나주 등지에서 왜병과 싸웠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아미산(峨嵋山) 남쪽 기슭에 남파서실(南坡書室)을 짓고 두문불출하면서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심혈을 경주하여 많은 영재를 배출하였다. 1940년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이를 거부하며 맹세코 성을 고치지 않겠다는 ‘절명시(絶命詩)’ 2절과 유서를 남기고 우물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저서로 『남파유고』가 있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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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오(1881~?) 한말의 의병 용담군 이동면 내유곡리 출신. 1908년 초 문태수가 지휘하는 호남의병단에 가입한 후 박춘실(朴春實)의 선봉 부대에 배속되어, 덕유산을 거점으로 각지에서 유격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1909년 9월 동료의병 20명과 함께 검거되어 10월 8일 전주재판부에서 태(笞) 100도를 맞고 풀려났다. 2013년 대통령표창 수상하였다. [참고문헌] 공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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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8~1423. 옥천사에 배향된 고려말·조선초기 문신. 자는 자수(自修), 호는 독곡(獨谷). 시호는 문경(文景). 조부는 판도총랑 성군미(成君美)이고, 부친은 창성부원군 성여완(成汝完)이다. 첫째 아들은 성지도(成志道), 둘째 아들은 성발도(成發道)이다. 동생인 성석용(成石瑢)과 성석연(成石烟)은 각각 보문각 대제학(普文閣大提學)과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성석린은 1341년 동정직(同正職)으로 사온서승(司醞署丞)을 받고, 1355년 사마시에 제3등으로 합격하였다. 1357년 과거에 급제, 국자학유(國子學諭)의 벼슬을 받았다. 이어 사관(史官), 예문관(藝文館)의 공봉(供奉), 삼사(三司)의 도사(都事), 전의시(典儀寺)의 주부(注簿), 차자방(箚子房), 전교시부령(典校寺副令), 지인상서(知印尙書), 예부총랑(禮部摠郎) 등을 역임하였는데, 신돈(辛旽)의 미움을 사서 외관으로 해주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다시 내직으로 들어가 성균관 사성, 삼사 좌윤, 정당문학 등을 지냈다.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참여하여 단성보절찬화공신(端誠保節贊化功臣)의 녹권이 내려지고 창성군 충의군(昌成郡忠義君)에 봉해졌다. 조선 건국 후 개성부 판사, 한성부 판사를 지냈으며, 1393년 문하시랑 찬성사 판호조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정종이 즉위하자 서북면 도순찰사, 평양 부윤 등을 지내고 내직으로 문하시랑 찬성사가 되었다. 태종이 즉위한 후 좌명공신이 되고 창녕부원군에 봉해졌다. 1402년 영의정 부사를 거쳐 이듬해 우의정이 되었다. 1407년에 좌의정을 지냈고 1411년 사직을 원했으나 허락되지 않아 1414년 부원군으로 휴직하였다. ‘제1차 왕자의 난’이 있은 뒤 태조가 함흥에 머물렀는데 태종이 여러 사자를 보냈으나 감히 문안하지 못하였다. 이에 성석린이 태조의 옛 친구로 중재에 나서 비로소 태조와 태종이 화합하게 되었다. 검소한 생활을 즐겼으며 초서를 잘 쓰고 시를 잘 지었다.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면서, 쉬는 곳에는 항상 나무궤를 놓아두고 앉아 ‘양화(養和)’라 이름하였다. 1423년 86세로 사망하자 세종이 제문을 내리고 부의(賻儀)하였다. ‘성석린 좌명공신 왕지’는 조선 1402년 방간(芳幹)의 난을 평정하고 태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로로 익대좌명삼등공신(翊戴佐明三等功臣)에 포상되었던 성석린에게 내려진 것이다. 성석린 좌명공신 왕지가 진안에 남게 된 것과 성석린의 위패가 진안 옥천사에 배향된 이유는 성석린의 후손들 중 일부가 진안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태조실록(太祖實錄)』, 『정종실록(定宗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문종실록(文宗實錄)』, 『일성록(日省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한국문집총간 해제』1( 민족문화추진회, 1991), 『진안군 향토문화백과사전』(진안문화원, 200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국역 고려사』(경인 문화사, 2006), 디지털 포천 문화 대전(http://pocheon.grandcultur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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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9~1862. 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효자. 성석린(←成石璘)의 후손으로 통덕랑(通德郞) 성창하(成昌夏)의 아들이다. 동향면 대량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학업에 열중하여 연익서를 저술하였다. 아들 성필원(成弼源)과 함께 1886년에 정려가 내려졌다.《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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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효(丁載孝)가 지은 졸우당기(拙愚堂記)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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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9~1397. 고려말·조선초기 문신. 초명(初名)은 한생(漢生), 호는 이헌(怡軒). 시호는 문정(文靖). 창녕 성씨의 시조 성인보(成仁輔)의 고손으로 조부는 전객사 부령(典客司 副令)을 지낸 성공필(成公弼)이고 부친은 판도총랑(版圖摠郞)을 역임한 성군미(成君美)이다. 조선 초기에 영의정을 지낸 성석린(成石璘)이 아들이다. 1336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 군부정랑(軍簿正郞), 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 상서우승(尙書右丞), 지형부사(知刑部事), 어사중승(御史中丞), 전법판사(典法判事), 첨서밀직(簽書密直),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역임하였다. 1371년 성여완이 민부상서(民部尙書)로 재직하고 있을 당시 신돈(辛旽)이 처형되었는데 이 때 신돈과 같은 당류(黨類)로 지목되어 곤장을 맞고 유배되었다. 1378년 복권되어 정당문학상의(政堂文學祥議)를 지냈다. 1389년에 이성계가 창왕(昌王)을 폐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스스로 왕방거사(王方居士)라 부르면서 경기도 포천 계류촌(溪流村)에 은거하게 된다. 성여완은 태조 이성계가 고려 구신(舊臣) 회유책으로 검교 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 창녕 부원군(昌寧府院君)에 봉하고자 하였으나 극구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승낙한다. 그러나 태조가 경복궁 경회루에서 큰 잔치를 베풀고 자신을 초청하자 흰 옷을 입고 나타나 고려 충신의 절조(節操)를 나타냈다. 1397년 89세로 사망하자 조정에서 쌀과 콩 1백석을 하사하여 장례를 돕도록 하였다. 동향면 대량리 옥천사에 주벽(主壁)으로 배향되어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태조실록(太祖實錄)』, 『기년편고(紀年便攷)』, 『일성록(日省錄)』, 『진안군 향토문화백과사전』(진안문화원,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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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5~1793. 초명은 석룡(錫龍), 자는 의서(義瑞), 호는 동계처사(銅溪處士). 성계종(成繼宗)의 후손이다. 문장에 능하여 계고(稽古) 한 편과 가사(歌詞) 두 편을 남겼다. 성대영(成大永)이 찬한 행장(→성은명행장)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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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홍(1887~?) 한말의 의병 용담군 이동면 평지리 출신. 1908년 초 문태수가 지휘하는 호남의병단에 가입한 후 박춘실(朴春實)의 선봉 부대에 배속되어, 덕유산을 거점으로 각지에서 유격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1909년 9월 동료의병 20명과 함께 검거되어 10월 8일 전주재판부에서 태(笞) 100도를 맞고 풀려났다. 2013년 대통령표창 수상하였다. [참고문헌] 공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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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준문(이명 仲文)은 한말의 의병 용담군 이동면 평지리 출신. 1908년 초 문태수가 지휘하는 호남의병단에 가입한 후 박춘실(朴春實)의 선봉 부대에 배속되어, 덕유산을 거점으로 각지에서 유격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1909년 9월 동료의병 20명과 함께 검거되어 10월 8일 전주재판부에서 태(笞) 100도를 맞고 풀려났다. 2013년 대통령표창 수상하였다. [참고문헌] 공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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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진갑(1881~?) 개항기 진안 출신의 의병. 용담군 일동면 봉곡리(현 진안군 동향면 학선리) 출신이다. 같은 마을의 조진봉(趙辰奉)과 함께 문태수의진에 참여하여 전북 금산ㆍ용담(龍潭) 등에서 활동을 벌였다. 1909년 2~3월경 전북 금산군 어재리(於在里)에서 동료 의병들과 함께 군자금 100냥을 모집하였으며, 1909년 3월 12일 조진봉 등 동료 의병들과 총을 휴대하고 금산군 수통동(水通洞)에서 길은좌(吉殷左)의 농우(農牛) 1두를 군수품으로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1909년 6월 9일에 전주 재판소에서 10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201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전북의병사』 하(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90), 『진안군 향토문화백과사전』(진안군·진안문화원, 2004), 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공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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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태언 한말의 의병 용담군 일동면 양지리 출신. 1908년 초 문태수가 지휘하는 호남의병단에 가입한 후 박춘실(朴春實)의 선봉 부대에 배속되어, 덕유산을 거점으로 각지에서 유격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1909년 9월 동료의병 20명과 함께 검거되어 10월 8일 전주재판부에서 태(笞) 100도를 맞고 풀려났다. [참고문헌] 한말전북의병사(광복회전라북도지부)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