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8~1423. 옥천사에 배향된 고려말·조선초기 문신. 자는 자수(自修), 호는 독곡(獨谷). 시호는 문경(文景). 조부는 판도총랑 성군미(成君美)이고, 부친은 창성부원군 성여완(成汝完)이다. 첫째 아들은 성지도(成志道), 둘째 아들은 성발도(成發道)이다. 동생인 성석용(成石瑢)과 성석연(成石烟)은 각각 보문각 대제학(普文閣大提學)과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성석린은 1341년 동정직(同正職)으로 사온서승(司醞署丞)을 받고, 1355년 사마시에 제3등으로 합격하였다. 1357년 과거에 급제, 국자학유(國子學諭)의 벼슬을 받았다. 이어 사관(史官), 예문관(藝文館)의 공봉(供奉), 삼사(三司)의 도사(都事), 전의시(典儀寺)의 주부(注簿), 차자방(箚子房), 전교시부령(典校寺副令), 지인상서(知印尙書), 예부총랑(禮部摠郎) 등을 역임하였는데, 신돈(辛旽)의 미움을 사서 외관으로 해주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다시 내직으로 들어가 성균관 사성, 삼사 좌윤, 정당문학 등을 지냈다.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참여하여 단성보절찬화공신(端誠保節贊化功臣)의 녹권이 내려지고 창성군 충의군(昌成郡忠義君)에 봉해졌다. 조선 건국 후 개성부 판사, 한성부 판사를 지냈으며, 1393년 문하시랑 찬성사 판호조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정종이 즉위하자 서북면 도순찰사, 평양 부윤 등을 지내고 내직으로 문하시랑 찬성사가 되었다. 태종이 즉위한 후 좌명공신이 되고 창녕부원군에 봉해졌다. 1402년 영의정 부사를 거쳐 이듬해 우의정이 되었다. 1407년에 좌의정을 지냈고 1411년 사직을 원했으나 허락되지 않아 1414년 부원군으로 휴직하였다. ‘제1차 왕자의 난’이 있은 뒤 태조가 함흥에 머물렀는데 태종이 여러 사자를 보냈으나 감히 문안하지 못하였다. 이에 성석린이 태조의 옛 친구로 중재에 나서 비로소 태조와 태종이 화합하게 되었다. 검소한 생활을 즐겼으며 초서를 잘 쓰고 시를 잘 지었다.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면서, 쉬는 곳에는 항상 나무궤를 놓아두고 앉아 ‘양화(養和)’라 이름하였다. 1423년 86세로 사망하자 세종이 제문을 내리고 부의(賻儀)하였다. ‘성석린 좌명공신 왕지’는 조선 1402년 방간(芳幹)의 난을 평정하고 태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로로 익대좌명삼등공신(翊戴佐明三等功臣)에 포상되었던 성석린에게 내려진 것이다. 성석린 좌명공신 왕지가 진안에 남게 된 것과 성석린의 위패가 진안 옥천사에 배향된 이유는 성석린의 후손들 중 일부가 진안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태조실록(太祖實錄)』, 『정종실록(定宗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문종실록(文宗實錄)』, 『일성록(日省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한국문집총간 해제』1( 민족문화추진회, 1991), 『진안군 향토문화백과사전』(진안문화원, 200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국역 고려사』(경인 문화사, 2006), 디지털 포천 문화 대전(http://pocheon.grandculture.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