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여완(成汝完)
운영자 23-12-18 18:44 686 hit
1309~1397. 고려말·조선초기 문신. 초명(初名)은 한생(漢生), 호는 이헌(怡軒). 시호는 문정(文靖). 창녕 성씨의 시조 성인보(成仁輔)의 고손으로 조부는 전객사 부령(典客司 副令)을 지낸 성공필(成公弼)이고 부친은 판도총랑(版圖摠郞)을 역임한 성군미(成君美)이다. 조선 초기에 영의정을 지낸 성석린(成石璘)이 아들이다. 1336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 군부정랑(軍簿正郞), 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 상서우승(尙書右丞), 지형부사(知刑部事), 어사중승(御史中丞), 전법판사(典法判事), 첨서밀직(簽書密直),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역임하였다. 1371년 성여완이 민부상서(民部尙書)로 재직하고 있을 당시 신돈(辛旽)이 처형되었는데 이 때 신돈과 같은 당류(黨類)로 지목되어 곤장을 맞고 유배되었다. 1378년 복권되어 정당문학상의(政堂文學祥議)를 지냈다. 1389년에 이성계가 창왕(昌王)을 폐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스스로 왕방거사(王方居士)라 부르면서 경기도 포천 계류촌(溪流村)에 은거하게 된다. 성여완은 태조 이성계가 고려 구신(舊臣) 회유책으로 검교 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 창녕 부원군(昌寧府院君)에 봉하고자 하였으나 극구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승낙한다. 그러나 태조가 경복궁 경회루에서 큰 잔치를 베풀고 자신을 초청하자 흰 옷을 입고 나타나 고려 충신의 절조(節操)를 나타냈다. 1397년 89세로 사망하자 조정에서 쌀과 콩 1백석을 하사하여 장례를 돕도록 하였다. 동향면 대량리 옥천사에 주벽(主壁)으로 배향되어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태조실록(太祖實錄)』, 『기년편고(紀年便攷)』, 『일성록(日省錄)』, 『진안군 향토문화백과사전』(진안문화원,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