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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576년 10월에 부임하여 1578년 6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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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기묘사화 때 대사간이었는데 집권층에 밉보여 지방관으로 10여 읍을 돌았다. 대제학 소세양(蘇世讓)의 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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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7~1881. 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효자. 고조부는 손만화(孫萬和), 증조부는 손택도(孫宅道), 조부는 손석두(孫錫斗), 부친은 손용서(孫龍瑞)이다. 정천면 갈룡리에서 태어났다. 1884년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증직(贈職)되고 정려가 내려졌다. →손동현 정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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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6~? 자는 찬문(贊文), 호는 만초(晩樵). 홍문관 제학 손비장(孫比長)의 후손이며, 공조참의 손성환(孫晟煥)의 손자이다. 향약을 실시하였고, 기근 때 주위 사람들을 구휼하였다. 손희채(孫熙彩)가 기록한 사적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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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시대 명현 40위 중 한 분. 자는 사오(士悟), 호는 초은(楚隱). 밀성군(密城君) 손빈(孫斌)의 후예로 한림(翰林) 손홍적(孫弘績)의 아들이다. 선조 때 참봉으로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전주를 침공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경기전(慶基殿)의 어진(御眞)을 정읍(井邑) 내장산 용굴암(龍窟庵)으로 옮겨두었다. 그러던 중 조헌(重峰 趙憲)이 금산에서 순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일으켰다. 군사 수천인을 이끌고 양성(陽城)에 이르러 왜적을 맞아 싸웠으나 끝내 전사하였다. 그의 가동(家僮)인 차곡석(車曲石), 이악금(李惡金) 등도 그의 순절을 보고 적진으로 나아가 전사하였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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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556년에 부임하여 1557년 병으로 교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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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1919. 자는 도윤(道允), 호는 운초(雲樵). 홍문관 제학 손비장(孫比長)의 후손이며, 공조참의 손성환(孫晟煥)의 손자이다. 손병식(←孫炳植)의 동생으로 효성이 뛰어나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다. 최병심(崔秉心)이 묘갈명을 찬하였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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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9~1923. 자는 치오(致五), 호는 벽산(碧山). 홍문관 제학 손비장(孫比長)의 후손이며,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손경석(孫敬奭)의 아들이다. 통사랑(通仕郞). 최병심(崔秉心)이 묘갈명을 찬하였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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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815년 9월에 부임하여 1816년 6월 남원현감으로 재직하다가 전임하였으나 전직 때의 일이 문제되어 어사가 장계 후 파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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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663년 2월에 부임하여 1664년 3월 홍문관으로 영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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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681년 10월에 부임하여 1682년 6월 파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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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956. 원불교인. 법명은 동환(東煥), 법호는 공산(公山). 1905년 2월 12일 마령면 평지리에서 부친 상풍(相豊)과 모친 김윤석의 4남매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마령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한학을 공부했으며 농업전수학원에서 학습을 했다. 1926년 11월 친구인 전음광의 인도로 원불교에 입교했다. 입교한 후 마령에서 가사를 돌보며 향리 발전을 위해 노력했으며, 마령교당 창립주무가 되어 재가수도를 하다가, 28세시에 전무출신을 서원했다. 출가하여 공익ㆍ육영ㆍ상조부장 등을 역임하고, 35세부터는 ‘보화당한약방’의 대표이사로 18년 동안 헌신 봉공했다. 39세인 1943년에 수위단원에 보선되었고, 광복 후에는 전재동포 구호사업에 앞장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다. 또한 원불교 재단 설립과 발전에 심혈을 기울려 원광대학 창설에도 공헌했다. 익산보화원장, 신룡양로원장, 제1대 성업봉찬회 부회장, 이리보육원장 등의 역직을 수행하며 교단 창업의 주역이 되었다. 1950년 원평에 교단 최초로 ‘요양원’을 마련했다. 이 요양원이 익산으로 옮겨지면서 정식 북일진료소로 발전했고, 송혜환은 요양원장의 직을 맡게 되었다. 과중한 업무로 병을 얻어 1956년12월 5일 열반했다. 1964년 10월 제9회 수위단회에서는 송혜환의 높은 공덕을 추모하면서 대봉도의 법훈을 추서키로 결의했다.《참고문헌》 『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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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1590. 조선 전기 진안 출신의 효자. 자는 윤일(允一), 호는 월계(月溪). 송보산(宋寶山)의 후손이며 고조는 부사(府使) 송공선(宋公善), 증조는 목사(牧使) 송지은(宋之殷), 조부는 적순 부위(迪順副尉) 송유경(宋裕景), 부는 송맹현(宋孟賢)이다. 정여립(鄭汝立)의 외숙부이며 이인현(李仁賢)의 처남이다. 송림은 이항의 문인으로 김천일(金千鎰), 기효간(奇孝諫), 이인현 등과 친분이 깊었다. 부모 생전의 봉양은 물론 3년 상을 마친 뒤에도 매일 비바람을 무릅쓰고 큰 내를 건너 성묘를 하니 동네 사람들이 그 정성에 감복하여 다리를 놓아 주고 ‘송효자교(宋孝子橋)’라 불렀다고 한다. 마령면 강정리 앞 냇가의 지명을 ‘효자 다리’라 한다. 그 후 효성으로 천거되어 영릉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평소 출세를 좋아하지 않고 오직 수도에 전념하며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여 당시 사람들이 월계 선생(月溪先生)이라 불렀다. 대한이산묘 영모사와 마령면 강정리 구산사(龜山祠)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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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6∼1905.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순국지사. 자는 화옥(華玉), 호는 연재(淵齋)·동방일사(東方一士). 시호는 문충(文忠).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고 송면수(宋勉洙)의 첫째 아들이고 참의 송달수(宋達洙)와 송근수(宋近洙)의 종질이며 송병순(宋秉珣)의 형이다. 송병선은 대전 회덕(懷德)에서 태어났다. 백부 송달수에게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1882년에 공조참판,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충청북도 옥천에서 정자를 짓고 후학을 가르치면서 세상일을 잊고 지냈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고종을 알현하여 을사오적의 처단, 현량을 뽑아 쓸 것, 기강을 세울 것 등의 「십조봉사(十條封事)」를 올렸다. 이어서 을사늑약에 대한 반대 투쟁을 전개하려고 하였으나 경무사 윤철규에게 속아 납치되어 강제로 향리에 호송되었다. 이에 통분하여 그해 음력 12월 30일 세 차례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자결 순국하였다. 송병선은 황제와 국민과 학생들에게 드리는 유서를 남겼는데 “을사오적의 처형과 을사늑약의 파기 및 의로써 궐기하여 국권을 찾을 것” 등을 호소하였다. 저술로는 『무계만집(武溪謾輯)』, 『근사속록(近思續錄)』, 『패동연원록(浿東淵源錄)』, 『동감강목(東鑑綱目)』 등 53권이 있으며, 문집으로는 『연재집(淵齋集)』이 있다. 1914년 충청북도 영동군 문충사(文忠詞)에 배향되었는데 1970년 대전광역시 동구 용운동으로 이전되어 용동서원(龍洞書院)이라 불린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1(국가보훈처, 198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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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2~1504. 조선 전기 진안의 문신. 자는 대인(大仁), 호는 퇴휴재(退休齋). 숙의공(肅毅公) 송경(宋卿)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성 송광언(宋光彦)이고 아버지는 화녕부(和寧府) 소윤(少尹)을 역임한 송흥도(宋興道)이다. 유년 시절부터 경전과 제가서(諸家書)를 두루 읽었으며, 특히 『춘추(春秋)』에 조예가 깊어 세상에서는 ‘송춘추’라 불렀다고 한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과 교류하였다. 1448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고, 이듬해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이후로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역임하고, 1490년에는 가선대부에 올라 도승지와 예조판서를 역임하기에 이르렀다. 세조 때 성삼문(成三問)과 박팽년(朴彭年)을 비롯한 많은 충신들이 화를 당하자 이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호남의 장수현(長水縣)으로 내려가 청심정(淸心亭)을 짓고 한사로 자처하면서 학문 연구로 여생을 마쳤다. 한편 장수와 진안의 경계에 있는 천반산(天盤山)에는 두 개의 큰 굴이 있는데 “송보산과 그의 부인이 이 굴에 은거했다” 하여 현재까지 각각 ‘송판서 굴’과 ‘할미 굴’이라 불리고 있다. 1828년 진안과 장수 지역 유림의 발의로 구산서원(龜山書院)과 월강서원(月崗書院)에 배향되었다. 한편 1949년 구산서원 내에 박성양(朴性陽)이 찬한 예판퇴휴재선생송공보산신도비(禮判退休齋先生宋公寶山神道碑)가 세워졌다. 《참고문헌》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장수군지』(장수군지 편찬위원회, 1990), 『진안군사』(진안군사 편찬위원회,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