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 진안군수였다. 기록이 멸실되어 구체적 재임연대는 미상이나 1925년부터 1945년 사이에 재임하였다.
  • 용담현령. 1782년 1월에 부임하여 1783년 3월 영산현감이었다가 본직으로 왔다. 부친의 병환으로 사직하였다.
  • 진안현감. 1710년 4월에 부임하여 1711년 10월에 이임하였다.
  • ⇒전태길 송포기
  • 1904~1951. 근현대 애국지사. 자는 윤직(允直), 호는 경헌(敬軒). 주천면 신양리 출생. 이덕응(李德應)의 문인. 1919년 화동학교(현 주천초등학교)에 다니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선두에 서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때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였다. 1923년 3월 1일 3·1운동을 회상하며 제천봉에 단을 만들고 봄·가을 두 차례 향화를 올려 독립정신과 배일사상을 고취하였다. 그 후 이덕응의 뒤를 이어 20여 년 동안 후진교육에 헌신하였다. 이덕응의 기일에 꼭 참석하는 등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남달랐다. 한편, 금산에 은거하고 있던 의병장 이송(李松)과 긴밀히 연락하며 교분을 가졌으며, 향리에서의 교우관계도 구국의지가 뚜렷하지 않은 사람과는 대면하지 않았다. 조국 광복과 더불어 국민운동에 앞장서는 한편 1946년에는 의열단을 설치하였다. 송병선(宋秉璿), 최익현(崔益鉉), 민영환(閔泳煥), 이준(李雋) 등 4열사와 안중근(安重根),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백정기(白貞基) 등 4의사의 애국정신을 기리며, 매년 8월 15일 향화를 잊지 않았다. 그의 애국심은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은 때부터 써 온 것으로 보이는 수상록 <제천지>에 잘 나타나 있다. 한국전쟁 때 공산당에게 끌려가 1951년 5월 28일 구암리에서 학살당했다. 《참고문헌》鎭安郡史(진안군, 1992)
  • 유학자. 호는 성담(性潭). 한영식(韓永湜)이 지은 제문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1843~1914. 근대 진안 출신의 유학자. 후진 양성에 앞장선 유학자이다. 자는 내호, 호는 묵헌(默軒). 증조부는 송규오(宋圭五), 조부는 송헌철(宋獻喆), 부친은 돈녕부도정 송석로(宋錫老)이다. 송병선(宋秉璿)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학문을 인정받아 묵헌처사라는 호를 받았다. 1905년 송병선이 망국의 설움을 안고 순절했을 때에 김종섭(金鍾燮), 이문흠(李文欽), 이기회(李起晦) 등과 ‘사광계(四狂契)’를 조직하고, 고금의 시사를 논하면서 후진 양성에 앞장섰다. 1914년초 부인에게 4월에 사망할 것임을 예언하고, 그 말대로 4월에 의관을 정제한 자세로 별세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의 죽음을 ‘선화(仙化)’라 부르기도 하였다. 『독서수차기(讀書手箚記)』 여러 권을 저술하였다. 송희렴의 묘갈명은 전우(田愚)가 찬하고, 정종엽(鄭鍾燁)이 묘표를 지었다. 《참고문헌》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진안군사』(진안군사 편찬위원회, 1992), 「묵헌처사 송공희렴 묘갈명(默軒處士宋公希濂墓碣銘」
  • 장수현감으로 진안현감 겸직이었다. 1647년 8월에 부임하여 1648년 12월에 이임하였다.
  • 1879∼1944. 일제강점기 진안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일제의 조선 병탄 이후 조선 통치에 끝내 협력하지 않은 인물이다. 자는 덕삼(德三), 호는 연파(蓮坡). 조부는 증 가선대부(贈嘉善大夫) 호조참판 동지의금부사(戶曹參判同知義禁府事) 신병용(愼炳瑢)이고 부친은 통정대부(通政大夫) 행 동부승지(行同副承旨) 신종각(愼宗珏)이다. 백운면 노촌리에서 태어났다. 1910년에 일제는 조선의 국권을 찬탈한 이후에 「은사금(恩賜金)」이라는 회유책과 채찍을 함께 동원하여 지역의 유지들을 대상으로 일본에 적극 협력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신달성은 이에 굴하지 않고 아예 두문불출(杜門不出)하는 형태로 그들의 회유에 저항하였다. 《참고문헌》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 ?~1908. 한말의 의병. 별명은 명선(明先). 전라북도 무주 출신. 1907년 8월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무주 덕유산을 거점으로 동지를 규합해서 의거하였다. 그 해 10월 진안군 정천면 심원사(深院寺)에서 의병장 김동신(金東臣)의 의진과 합세하여 일본군과 교전하여 큰 타격을 주었다. 순창, 무주, 진안 등지에서 항일투쟁과 국권회복운동의 전개를 독려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1908년 4월 무주, 안성 등지로 이동하면서 추격해 온 일본군 부대와 분전, 지휘하던 중 전사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1838~1913. 자는 선장(善章), 호는 묵재(黙齋). 아림부원군(娥林府院君) 신이충(愼以衷), 신의련(愼義連)의 후손이다. 선조를 받드는 일에 정성을 기울여 족제(族弟) 신병오(愼炳五)와 함께 신의련을 기리는 영모정(永慕亭)을 세웠다. 이도복(李道復)이 묘갈명을 찬하였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1860~1888. 자는 여성(汝聖), 호는 운계(雲溪). 신의련(愼義連)의 8세손으로 부친은 신유영(愼有永)이고 동생은 신병오(愼炳五)이다. 아들로 신종규(愼宗圭)가 있다. 백운면 미계촌[노촌리]에서 태어났다. 1882년 증광시(增廣試)에 생원 3등 85위로 합격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자상하였으며 인근의 가난한 사람을 잘 도와주어 주민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사람들이 ‘독실군자(篤實君子)’라고 일컬었다. 《참고문헌》 『사마방목(司馬榜目)』, 『임오증광사마방목(壬午增廣司馬榜目)』(국립 중앙도서관),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鎭安郡史(진안군, 1992)
  •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병자호란 때에 의병에 참가한 의사(義士)이다. 자는 숙존(淑尊), 호는 성계(城溪). 아버지는 감찰을 지낸 신기(辛麒)이다. 1636년 조정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농성을 벌여야 하는 위기에 직면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옥과현감(玉果縣監) 이흥발(李興渤), 대동찰방(大同察訪) 이기발(李起渤), 순창현감 최온(崔縕), 전 한림(翰林) 양만용(梁曼容), 전 찰방(察訪) 유즙(柳楫) 등이 함께 내놓은 의병 참여 요청 격문(檄文)에 호응하여 의병에 참가하였다. 형 신성언(辛成彦)과 정동협(←鄭東俠), 전응철(←全應哲) 형제 등과 함께 여산(礪山)의 의병 집결지[募義所]로 갔다. 다시 의병과 함께 경기도 과천(果川)까지 진군하였으나 이미 조선과 청이 강화를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왔다. 《참고문헌》 『진안군사』(진안군사 편찬위원회, 1992)
  • 개항기 진안 출신의 의병. 백운면 백암리에서 태어났다. 1908년 4월 15일에 이석용의 호남의진에 들어가 23일까지 진안지역에서 유격 활동에 참가하였다가 귀가하였다. 1909년 1월 26일에 재가입하여 13명과 함께 유격 활동을 하였다.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11월 24일에 3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였다. 《참고문헌》 『전북의병사』하(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90), 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 진안현감. 1571년 9월에 부임하여 1578년 7월에 이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