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1951. 근현대 애국지사. 자는 윤직(允直), 호는 경헌(敬軒). 주천면 신양리 출생. 이덕응(李德應)의 문인. 1919년 화동학교(현 주천초등학교)에 다니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선두에 서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때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였다. 1923년 3월 1일 3·1운동을 회상하며 제천봉에 단을 만들고 봄·가을 두 차례 향화를 올려 독립정신과 배일사상을 고취하였다. 그 후 이덕응의 뒤를 이어 20여 년 동안 후진교육에 헌신하였다. 이덕응의 기일에 꼭 참석하는 등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남달랐다. 한편, 금산에 은거하고 있던 의병장 이송(李松)과 긴밀히 연락하며 교분을 가졌으며, 향리에서의 교우관계도 구국의지가 뚜렷하지 않은 사람과는 대면하지 않았다. 조국 광복과 더불어 국민운동에 앞장서는 한편 1946년에는 의열단을 설치하였다. 송병선(宋秉璿), 최익현(崔益鉉), 민영환(閔泳煥), 이준(李雋) 등 4열사와 안중근(安重根),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백정기(白貞基) 등 4의사의 애국정신을 기리며, 매년 8월 15일 향화를 잊지 않았다. 그의 애국심은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은 때부터 써 온 것으로 보이는 수상록 <제천지>에 잘 나타나 있다. 한국전쟁 때 공산당에게 끌려가 1951년 5월 28일 구암리에서 학살당했다. 《참고문헌》鎭安郡史(진안군,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