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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1880. 자는 덕겸(德兼), 호는 노은(蘆隱). 신의련(愼義連)의 후손이다. 사림과 더불어 영모정(永慕亭)과 충효사(忠孝祠)를 지었으며, 의로움과 돈목함으로 여러 차례 천장이 올라갔다. 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고,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과 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을 겸대하였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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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6~1606. 조선 중기 진안 출신의 효자. 자는 의숙(宜叔), 호는 미계(美溪). 양렬공(襄烈公) 신이충(愼以衷)의 7대손이다. 천성이 효성스러워 어릴 때부터 병든 아버지를 모셨다. 임진왜란 때에도 병든 아버지 곁에서 간호하며 피난하지 않고 있었다. 어느 날 왜적이 세거지인 미계촌[현 백운면 노촌리] 마을에 쳐들어와 부친을 죽이려 하자 신의련은 자기 몸으로 부친을 가리며 “내가 대신 죽을테니 병든 노친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왜장이 효성에 감동하여 신의련의 이름을 물어 그 이름을 종이에 써서 태웠는데 종이가 타지 않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놀란 왜장이 동구 밖에 ‘효자가 사는 곳(孝子所居之地)’이라는 방을 붙여, 이후 왜적이 그 마을에는 침범하지 못 하였다. “임진왜란 시기에 이곳으로 피난하여 살아남은 사람이 5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래서 동네 이름을 ‘오만동(五萬洞)’이라 부르고 그 들판을 ‘면화평(免禍坪)’이라 하였다고 한다. 신의련의 일이 조정에 알려져 수의부위(修義副慰)의 품계와 정려가 내려졌다. 충효사와 백운면 노촌리의 거창 신씨 사당 송산재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진안의 문화재』(진안문화원, 1998), 지역정보포털(http://www.oneclick.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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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 전기 문신. 본관은 거창(居昌). 좌복야(左僕射) 공헌공(恭獻公) 신수(愼修)의 후손으로 증 호조판서(戶曹判書) 신인도(愼仁道)의 아들이고 설회(薛懷)의 사위이다. 아들로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 신후경(愼後庚)이 있다. 어려서부터 가학을 이어받아 문장에 능하였으며, 1377년(우왕 3) 연방시(蓮榜試)에 급제하였다. 당시 집권자인 신돈(辛旽)의 전횡을 비판하면서 태학의 유생들과 연맹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조선 개국 후 1397년(태조 6) 황해도 감찰을 지냈으며, 1410년(태종 10)에는 지방관으로 재직 당시 부친상 중에 종과 양민을 때려죽인 일과 아전을 때려죽인 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나 고의로 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 참작되어 용서를 받았다. 한편 1420년(세종 2) 판이천현사(判利川縣事)로 재직하면서 양녕대군의 비위를 고발하기도 하였다. 이후 세종 대 경상도 도사와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481년(성종 12) 아림부원군(娥林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고,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었으며 양렬(襄烈)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947년에는 대한이산묘 영모사가 건립되면서 유림 40위 중 하나로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태조실록』, 『태종실록』, 『세종실록』,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 『대한이산묘지』(진안문화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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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837년 1월에 부임하여 1839년 7월 의성으로 전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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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1933. 자는 응홍(應洪), 호는 덕암(德巖). 신의련(愼義連)의 후손이며, 신병관(愼炳觀)의 아들이다. 이병은(李炳殷)이 찬한 묘갈 명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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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550년에 부임하여 1555년 파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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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영산 신씨(靈山辛氏) 진안 마령면 입향조. 자는 계술(季述), 호는 서산정(西山亭). 고려 때 태학사를 지낸 문헌공(文憲公) 덕재(德齋) 신장(辛藏)의 후손으로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 신형(辛衡)의 아들이다. 선조 때 참봉 벼슬이 내려졌으나 나가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趙憲)의 막하로 들어가 싸우다가 적이 쏜 탄환에 맞아 금산(錦山)에서 순절하였다고 한다. 이정붕(李廷鵬)이 지은 묘갈이 전하고 있다. 《참고문헌》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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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진안군수. 1992. 7. 11 부임하여 1993. 5. 26까지 11개월간 재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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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치수(1873~?) 개항기 진안 출신의 의병. 문태서(文泰瑞) 의진에 가담하여 장수·용담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초에 문태서 호남의병단에 가입한 후 박춘실(朴春實)의 선봉 부대에 배속되었다. 김준대(金俊大), 고명주(高明柱), 고원중(高元仲), 안왈오(安曰五), 심우상(沈尤相), 원도숙(元道淑), 조경화(趙京化), 하준태(河俊太), 한청여(韓淸汝) 등 200여 명의 동료 의병들과 함께 장수, 용담 등 부근 촌락에서 군자금품을 수합하는 활동을 하였다. 1909년 5월에 장수군 계북면 문성(文城) 동북쪽의 산중에서 함양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다가 선봉장 박춘실이 부상하여 체포되었고, 의병 13명이 전사하자 부대가 궤멸하는 참패를 당했다. 그 후 다시 호남의병단에 귀속하여 유격 활동을 하다가 1909년 9월에 검거되었다. 1909년 10월 8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재판부에서 태(笞) 100도를 맞고 풀려났다. 1995년 대통령 표창에 추서되었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 『독립운동사 자료집 별집』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전북의병사』 하(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90), 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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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722년 9월에 부임하여 1725년 8월 대간에서 소를 올려 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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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1969. 근현대 진안 출신의 효자. 자는 재민(才玟), 호는 미산(美山). 증조는 신종각(愼宗珏), 부친은 신달성(愼達晟)이다. 효행이 지극하여 부친의 병중에 온갖 탕약으로 구완하려 노력하였다. 부친이 죽자 예의를 다하여 장례를 치렀으며 3년 동안 시묘하였다. 부인도 함께 효성이 지극하였다. 《참고문헌》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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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593년에 부임하여 1599년 파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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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상의 인물. 신원충 또는 신언충이라는 전언도 있다. 전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천면 모정리 망덕에 신현충이라는 소년이 살았다. 마을 지주의 아들이었던 그는 학문보다는 무예를 좋아하였고 힘이 장사였다. 그는 활쏘기에도 빼어나 그의 누이가 동구 밖 우물에서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오도록 하고 수백 보 떨어진 사랑채 마루에서 물동이를 쏘아 맞히기도 했다. 또한 자신이 타고 다니던 용마와 활쏘기 시합을 벌이기도 했다. 즉 활을 쏘고 말을 달려 화살보다 먼저 목적지에 도착하는 시합이다. 정천면 망화리 자금마을에는 그가 활쏘기 연습을 했다는 활터가 남아 있다. 그는 평소 동네 젊은이들과 함께 병정놀이, 사냥놀이 등을 즐겨했는데 행동이 일사불란했고 기세도 대단했다. 그러자 인근은 물론 관아에까지 그 소문이 퍼지고 결국 한양까지 알려지게 되어 조정에서는 역모를 꾀하는 것이라고 짐작하여 군병으로 하여금 토벌에 나서게 했다. 관군이 출동하자 마을의 젊은이들은 이리저리 도망치다 결국 용담교(龍潭橋) 서쪽에 있는 층암절벽의 암굴에까지 몰리게 되었다. 그러자 관군은 그의 어머니를 붙잡아 왔다. 그리고는 말의 꼬리에 어머니를 매달아 길거리로 끌고 다녔다. 어머니의 비명소리가 산골을 울리자 견디다 못한 신현충은 그 자리에서 자결하고 말았다. 그러나 조정의 징벌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역적은 조상의 산소 중에 명당이 있어서 태어났다는 생각에서 아예 그 소지를 없애기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선산이 있던 망덕 뒷산과 갈두리·용평리 등의 묘, 그의 용마가 나왔다는 황산리의 용마혈 등을 파헤치고 숯불로 떴다. 또한 월평리 뒷산에 있는 ‘장군무도 족답월혈(將軍舞蹈足踏月穴)’을 파헤치려고 할 때 뇌성병력과 함께 소나기가 퍼부어 모두 놀라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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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783년 10월에 부임하여 1788년 5월 임기만료 체임. 읍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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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낙광(1884~1910.11.06.) 이명 심낙선 (沈洛先)은 개항기 용담군 일동면 봉곡리(현 동향면 학선리) 출신 의병 이다. 1908년 2월 경남 안의군(安義郡, 현 함양군) 등지에서 문태수의진(文泰洙義陣)에 참여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08년 2월 15일 밤, 수 명의 의병과 함께 경남 안의군 황산면(黃山面) 김 모의 집에서 군자금으로 엽전 150냥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1909년 6월 9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10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201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전북의병사』하 (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90), 『진안군 향토문화백과사전』(진안군·진안문화원, 2004), 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