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 전기 문신. 본관은 거창(居昌). 좌복야(左僕射) 공헌공(恭獻公) 신수(愼修)의 후손으로 증 호조판서(戶曹判書) 신인도(愼仁道)의 아들이고 설회(薛懷)의 사위이다. 아들로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 신후경(愼後庚)이 있다. 어려서부터 가학을 이어받아 문장에 능하였으며, 1377년(우왕 3) 연방시(蓮榜試)에 급제하였다. 당시 집권자인 신돈(辛旽)의 전횡을 비판하면서 태학의 유생들과 연맹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조선 개국 후 1397년(태조 6) 황해도 감찰을 지냈으며, 1410년(태종 10)에는 지방관으로 재직 당시 부친상 중에 종과 양민을 때려죽인 일과 아전을 때려죽인 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나 고의로 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 참작되어 용서를 받았다. 한편 1420년(세종 2) 판이천현사(判利川縣事)로 재직하면서 양녕대군의 비위를 고발하기도 하였다. 이후 세종 대 경상도 도사와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481년(성종 12) 아림부원군(娥林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고,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었으며 양렬(襄烈)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947년에는 대한이산묘 영모사가 건립되면서 유림 40위 중 하나로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태조실록』, 『태종실록』, 『세종실록』,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 『대한이산묘지』(진안문화원,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