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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895년 3월에 부임하여 1896년 7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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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대유(1884.12.08.~?)는 용담군 일동면 봉곡리(鳳谷里) 동향면 학선리 출신 개항기 의병. 1908년 문태서(文泰瑞)의 호남의병단에 가담하여 약 1년 6개월 동안 용담, 금산 등지를 잠행하면서 군자금을 모으고 유격 활동에 참가하다가 체포되었다. 1909년 6월 9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재판부에서 10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 『전북의병사』하(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90), 『진안군 향토문화백과사전』(진안군·진안문화원, 2004), 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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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742년 10월에 부임하여 1746년 3월 신병으로 조병사가 장계하여 파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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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751년 3월에 부임하여 1755년 5월 동생이 역모에 걸리므로 연좌되어 종의 신분이 되어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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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550년대 이전에 재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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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상(1887~?) 진안 용담군 이동면 대야리 출신, 1908년에 문태서(文泰瑞)의 호남의병단에 가입, 박춘실(朴春實)의 선봉 부대에 배속되어 장수군 계북면 문성동 뒤의 덕유산을 근거지로 활동하면서 1909년 5월 김준대(金俊大)·고명주(高明柱)·고원중(高元仲)·신치수(辛致守)·안왈오(安曰五)·원도숙(元道淑)·조경화(趙京化)·하준태(河俊太)·한청여(韓淸汝) 등 200여 명의 동료 의병들과 함께 장수·용담 등 부근 촌락에서 군자금품을 수합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러다가 붙잡혀 1909년 10월 8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태형(笞刑) 100도를 받는 고초를 당했다.
1995년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였다.《참고문헌》 『독립운동사 자료집 별집』1(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1974), 『전북의병사』(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90), 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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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9~?] 조선 후기 용담 현령을 지낸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군필(君弼).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 심지원(沈之源)의 아들이고, 형은 심익선(沈益善)이다. 동생은 심익현(沈益顯), 심익창(沈益昌), 심익성(沈益成) 등이다. 1660년 증광시(增廣試)에서 생원이 되었다. 1676년 5월에 용담현령으로 부임하여 1681년 8월에 임기 만료로 체임되었다. 용담 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또한 1681년에 암행어사 오도일에게 진안현감 이의징과 용담현령 심익상을 포상하도록 건의하였다. 그 후 1742년에 손자 심사득(沈師得)이 현령으로 와서 그 자리에 비각을 세웠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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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599년 11월에 부임하여 1604년 5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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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707년 2월에 부임하여 1708년 9월 사헌부지평 승지로 전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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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군수. 1907년 2월에 부임하여 1907년 5월 사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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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1971. 주천면 주양리 출신의 군인.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출전하였다. 해방 후에 육군에 입대, 6·25전쟁에 출전하였고 그해 12월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어 국방대학교를 졸업하고 3사단 부관부, 5군단, 육군본부 등에 관리 장교로 근무하다가 베트남전쟁에 파견되어 주월군사령부 부관 참모로 근무 중 1971년 헬리콥터를 타고 순찰하다가 순직하였다. 준장으로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鎭安郡史(진안군, 1992), 『진안의 맥』(진안군, 1982),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진안군사』(진안군사편찬위원회,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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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604년 7월에 부임하여 1607년 2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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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550년대 이전에 재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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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9~? 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효자. 안유(安裕)의 19세손이고 안원현(安鎭賢)의 16세손이다. 부친은 안진현(安鎭賢)이다. 정천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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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왈오(1886~?) 용담군 이동면 내유곡 출신, 개항기 진안 출신의 의병. 1906년 안왈오를 포함한 의병대가 지리산으로 들어가 거의(擧義)한 후 무주(茂朱)에서 덕유산으로 가던 중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여 여러 명을 사살하였다. 9월 하순에는 장수(長水)를 점령하고 일본군 3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특히 안왈오는 의병대에서 200여 명의 동료 의병들과 함께 장수·진안·용담 등 부근 촌락에서 군자금 및 군수 물자를 수합하는 활동을 하였다. 1908년 문태서(文泰瑞)의 호남의병단에 가입하여 의병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1909년 10월 8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태형(笞刑) 100도를 받는 고초를 당하였다. 1995년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였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 자료집 별집』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전북의병사』 하(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