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담현령. 1886년에 부임하여 1887년 청양현령으로 전임하였다.
  • 안원필(1874~?) 용담군 이동면 내유곡리 출신, 문태수의진에 참여하여 전북 장수군 계북면 문성동 뒤의 덕유산을 근거지로 활동하였다. 1909년 5월 5일 밤부터 안원필은 고원중등 200여 명의 의병들과 함께 장수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 9월 20일 체포되어 소위 폭동죄(暴動罪)로 기소되었다. 1909년 10월 8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태형(笞刑) 100도(度)를 받았다. 201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공훈록
  • 안일(1924.05.08.~2015.12.09.) 진안군 정천(程川)면 용평(龍坪)리 1002 출신의 애국지사, 1944년 전주사범학교 재학 중 동교생 백진우(白鎭禹)·한칠석(韓七錫) 등과 비밀결사 독서회(讀書會)를 조직하여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평소 민족의식이 투철하던 안일은 1944년 동급생 백진우·한칠석 등과 함께 비밀결사 독서회를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독서회를 중심으로 국제정세를 분석하면서 일제의 패망을 확신하였고, 아울러 일반인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로 결의하였다. 1944년 10월 경, 이들은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독립선언서를 작성, 배포할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일경의 감시를 피해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임시정부의 연락원과 연결되어 태극기와 애국가도 인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이 1945년 2월 일본헌병에 탐지됨으로써 안일은 헌병대 구치소에 수감되어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후 광복이 되면서 1945년 8월 17일 석방되었다. 199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 용담군 이동면 유곡리 출신의병, 908년 초 문태수가 지휘하는 호남의병단에 가입한 후 박춘실(朴春實)의 선봉 부대에 배속되어, 덕유산을 거점으로 각지에서 유격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1909년 9월 동료의병 20명과 함께 검거되어 10월 8일 전주재판부에서 태(笞) 100도를 맞고 풀려났다 [참고문헌] 전북의병사 하
  • 죽성군(竹城君) 안원형(安元衡)의 20세손이며, 통정대부 중추원 의관 안주열(安周烈)의 아들이다. 1939년 군(郡)에 자작농토를 나눠줄 것을 청하여 정천면(程川面) 용평리(龍坪里) 일대에 혜택을 주었다. 그 공덕을 기리는 비를 길가에 세웠는데, 황재묵(黃在黙)이 찬한 음기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1879~1910. 황해도 해주 출신. 한말의 교육가, 의병장, 의사(義士).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34위 중 한 분.
  • 안형(1926.11.08. ~ 1996.04.16.) 이명 안성(安盛), 진안군 정천면 용평리 출신의 애국지사, 1945년 2월 전북 전주공립농업학교(全州公立農業學校)에 재학 중, 동창생 정진호(鄭鎭浩) 등과 함께 일제 식민지하의 조선어말살정책, 창씨개명, 강제징용 등 일제의 식민지정책으로 인한 민족말살과 강제수탈이 심화되는 것을 비판하였다. 또한 장차 일제의 패망과 조국 독립에 대비할 것을 맹약하는 혈서동맹으로 항일학생운동을 주도하고 민족정신을 고취하다가 붙잡혀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약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45년 8월 17일, 전주지방법원에서 검사의 불기소처분으로 석방되었다. 1995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 진안현감. 1844년 7월에 부임하여 1846년 12월 통천부사로 전임하였다.
  • 용담현령. 1689년 6월에 부임하여 1694년 4월 임기만료로 체임되었다.
  • 1861~1937. 자는 재영(在英), 호는 구일(九逸). 양능양(梁能讓)의 후손이다. 기정진(奇正鎭)에게 사사하였고 황현(黃玹)과 교유하였다. 이병은(李炳殷)이 묘갈명을 찬하였다. 《참고문헌》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38대 진안군수. 1990. 5. 29 부임하여 1991. 7. 16까지 1년 2개월간 재임하였다.
  • 1874~1950 일제강점기 진안에서 활동한 교육자. 자는 성구(成九), 호는 지산(支山). 부친은 양경현(梁璟鉉)이다. 아버지를 따라 주천면 주양리로 들어와 7살 때부터 김태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91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김태현과 함께 자신의 재산을 모두 내놓아 화동학교[현 주천초등학교의 전신]를 설립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양봉래의 집에서 회의를 소집하여 학교 설립을 만장일치로 가결하였으며, 화동학교 설립이 인가된 후에는 화동학교의 고문에 선임되었다. 《참고문헌》
  • 28대 진안군수. 1976. 9. 6 부임하여 1978. 7. 31까지 1년 11개월간 재임하였다.
  • 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효자. 자는 군약(君若), 호는 운재(雲齋). 숭록대부(崇祿大夫) 좌찬성(左贊成) 양원근(梁元瑾)의 후손이다. 1892년 ‘양원하·양명수·의성 정씨 석정(石旌)’이 백운면 평장리 송림마을 어귀에 건립되었다. 석조 정려의 비표에는 우측으로부터 ‘효자학생양원하지려(孝子學生梁源河之閭)’, ‘효자학생양종윤지려(孝子學生梁鍾潤之閭)’, ‘열녀양명수처의성정씨지려(烈女梁命洙妻義城丁氏之閭)’ 등 3명의 비명이 새겨져 있고, 비음에는 그들의 행적이 실려 있다. 1992년에 효자 양원하, 효자 양종윤, 열녀 의성 정씨의 기적비를 따로 세워서 기리고 있다. 《참고문헌》 『남원 양씨 양세 효행 문장 후서』,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진안현감. 1608년 7월에 부임하여 1610년 10월에 이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