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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899년 3월에 부임하여 1900년 3월 회령현감으로 전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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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550년대 이전에 재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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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9~1784조선 후기 진안에서 활동한 학자. 자는 운보(雲甫), 호는 만휴당(晩休堂). 고조는 성균 생원 양욱(梁昱), 증조는 통덕랑 양이관(梁以寬), 조부는 가선대부 양경일(梁擎日), 부친은 양우정(梁禹鼎)이다. 남원군 죽곡촌(竹谷村)에서 태어났다.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노형하(盧亨夏)와도 교유하였다. 성균회시(成均會試)에 번번이 떨어져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영조 때 학행으로 천거되어 호군(護軍)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80년에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에 올랐다. 지리산 줄기 풍악산(楓岳山) 아래에 정사(精舍)를 지어 놓고 경서를 연구하며 양송재(梁松齋)·윤매헌(尹梅軒)·진덕동(陳德洞)·최양묵(崔養默) 등과 교유하였는데, 이들을 죽계오현(竹溪五賢)이라 불렀다. 70세 이후에는 덕태산(德泰山) 아래 노계촌(蘆溪村)[현 백운면 노촌리]으로 이주하여 여생을 마쳤다. 저서로는 『경학요지(經學要旨)』·『훈몽지남(訓蒙指南)』 등이 있다. 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되었다. 황현(黃玹)의 『매천집(梅泉集)』에 묘표 ‘가선대부양공묘표(嘉善大夫梁公墓表)’가 실려 있다. 《참고문헌》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대한이산묘지』(진안문화원, 1998),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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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만세운동의 선봉. →삼일운동과 진안. 《참고문헌》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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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1943, 자는 창언(昌彦), 호는 화은(華隱). 혜강공(惠康公) 양팽손(梁彭孫)의 후손이며, 참봉 양업관(梁業官)의 아들이다. 정귀영(鄭貴泳)이 묘표를 찬하였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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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730년 9월에 부임하여 1733년 7월 파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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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대 진안군수. 1960. 1. 9 부임하여 1960. 5. 24 까지 5개월간 재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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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702년 5월에 부임하여 1705년 4월 전주판관으로 전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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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666년 12월에 부임하여 1668년 12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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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군 이동면 유곡리 출신 한말의 의병. 1908년 초 문태수가 지휘하는 호남의병단에 가입한 후 박춘실(朴春實)의 선봉 부대에 배속되어, 덕유산을 거점으로 각지에서 유격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1909년 9월 동료의병 20명과 함께 검거되어 10월 8일 전주재판부에서 태(笞) 100도를 맞고 풀려났다.
[참고문헌] 전북의병사 하, 한말 전북의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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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550년대 이전에 재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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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지승람』 <용담현>편에 실려 있는 인물. 고려 말엽에 왜구(倭寇)가 진포(鎭浦)에 쳐들어와 주군(州郡)을 약탈하였다. 그 때 고윤덕(高允德)과 함께 현령 피원량(皮元亮)을 도와 현의 남쪽에 목책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돌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여섯 곳에 돌을 쌓아 놓고 왜적이 쳐들어오면 돌을 내려뜨려 격퇴하는 전략을 세웠다. 적이 이쪽의 방비가 튼튼한 것을 엿보고 접근하지 못하고 물러가, 온 경내가 무사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신증동국여지승람(관찬지리서,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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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군수. 1900년 이후 부임하였으나 부임연대와 이임연대는 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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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3.09~1950.09.28. 애국지사, 제헌의원. 자는 낙중(洛中), 호는 둔암, 마령면 평지리에서 출생. 이조판서를 지낸 오팽숙(吳彭淑)의 후손이다. 1907년에는 이석용(李錫庸)의 호남의병창의동맹단에 참가하여 조영국·김학문과 함께 식량운반의 책임을 맡았고, 1919년 4월 6일 전영상(全永祥)·김구영(金龜永)·황해수(黃海水) 등과 함께 마령면 평지리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는데, 황해수가 붙잡혀 감으로써 해산하였다. 전영상·김구영 등과 함께 4월 13일 다시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전영상과 함께 일본경찰에 붙잡혀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제헌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 의해 전주형무소에서 피살당하였다. 포상으로 국민훈장 무궁화장 대훈장, 독립유공건국훈장 애족장이 있다. 부인 박찬순(朴燦順)과의 사이에 3남 3녀를 두었다. 《참고문헌》鎭安郡史(진안군,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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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7~1906. 자는 운서(雲瑞), 호는 옥은(玉隱). 이조판서 오팽숙(吳彭淑)의 후손이며, 증 교관 오성복(吳成福)의 아들이다. 진사를 지냈다. 송래희(宋來熙)의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기정진(奇正鎭)과 교유하였다. 김종한(金宗漢)이 찬하고 윤용구(尹用求)가 글씨를 쓴 묘갈명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