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하룡(梁夏龍)
운영자 23-12-18 18:44 683 hit
1699~1784조선 후기 진안에서 활동한 학자. 자는 운보(雲甫), 호는 만휴당(晩休堂). 고조는 성균 생원 양욱(梁昱), 증조는 통덕랑 양이관(梁以寬), 조부는 가선대부 양경일(梁擎日), 부친은 양우정(梁禹鼎)이다. 남원군 죽곡촌(竹谷村)에서 태어났다.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노형하(盧亨夏)와도 교유하였다. 성균회시(成均會試)에 번번이 떨어져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영조 때 학행으로 천거되어 호군(護軍)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80년에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에 올랐다. 지리산 줄기 풍악산(楓岳山) 아래에 정사(精舍)를 지어 놓고 경서를 연구하며 양송재(梁松齋)·윤매헌(尹梅軒)·진덕동(陳德洞)·최양묵(崔養默) 등과 교유하였는데, 이들을 죽계오현(竹溪五賢)이라 불렀다. 70세 이후에는 덕태산(德泰山) 아래 노계촌(蘆溪村)[현 백운면 노촌리]으로 이주하여 여생을 마쳤다. 저서로는 『경학요지(經學要旨)』·『훈몽지남(訓蒙指南)』 등이 있다. 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되었다. 황현(黃玹)의 『매천집(梅泉集)』에 묘표 ‘가선대부양공묘표(嘉善大夫梁公墓表)’가 실려 있다. 《참고문헌》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대한이산묘지』(진안문화원, 1998),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