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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728년 4월에 부임하여 1730년 6월 파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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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7~1593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시대 명현 40위 중 한 분.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영보(榮甫), 호는 성산(聖山). 이조판서 오팽숙(오膨叔)의 증손이며, 오사운(吳思雲)의 아들이다. 1590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홍문관 정자로 등용되어 국가문서를 맡아서 처리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扈從)하기보다 직접 적과 싸우기로 결심하고 의병장 고경명(高敬命) 휘하로 들어가 금산전투에 참가하였다. 그 싸움에서 아군이 패하자 이듬해 의병장 고종후(高從厚)와 함께 다시 의병을 모아 진주성으로 달려갔다. 그 해 8월, 총병력으로 공격해 오는 왜군과 처절한 혈전을 벌이다가 끝내 성이 무너지려 하자 판결사 김천일(金千鎰), 동료 고종후와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뒤에 병조참의에 증직되고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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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1915자는 도형(道亨), 호는 묵재(黙齋). 이조판서 오팽숙(吳彭淑)의 후손이다. 서광필(徐光弼)이 찬한 묘갈명이 있다. 《참고문헌》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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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696년 7월에 부임하여 1698년 6월 어사가 장계를 올려 파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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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5~1870자는 성오(聖五), 호는 만오재(晩悟齋). 동몽교관 오성복(吳成福)의 동생이다. 오도한(吳道漢)과 함께 송래희(宋來熙)의 문하에서 사사(師事)하였고, 임희진(林喜鎭)과 교유하였다. 김종한(金宗漢)이 찬하고 서광필(徐光弼)이 글씨를 쓴 묘갈명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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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34위 중 한 분. 자는 성술(聖述), 호는 죽파(竹坡). 을사늑약 이후 이석용, 김준, 전기홍 등의 의병단에 들어가 영광 불갑산 선치(蟬峙)와 나주 석문산 대명동, 광주 대치, 순창 내동, 함평 고막원 등지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사로잡혀 대구 옥중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참고문헌》 『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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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585년 10월에 부임하여 1599년 6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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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630년에 부임하여 1634년 부친 병환으로 사직. 향교를 용두동으로 이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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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892년에 부임하여 1894년 6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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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798년 3월에 부임하여 1798년 6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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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 조선 전기 진안 출신의 의병. 호는 남은(南隱). 좌복야(左僕射) 함양군(咸陽君) 오광휘(吳光輝)의 후손으로 좌랑(佐郞) 오세득(吳世得)의 손자이며 순릉 참봉(順陵參奉) 오인수(吳麟壽)의 아들이다. 마령면 평지리에서 태어났다. 남다른 덕행과 효성, 학문으로 많은 존경을 받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대를 조직하여 곧바로 금산의 의병진에 이르렀으나, 당시 창평현(昌平縣)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먼저 고경명(高敬明)의 진영에 와 있던 사촌형 오빈의 만류로 귀가하였다. 오형은 벽계(碧溪)의 선영으로 돌아와 노모의 봉양에 정성을 다하였다. 때마침 왜병(倭兵)이 쳐들어와 죽을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태연히 기운을 가다듬고 꾸짖으니 왜병도 의롭게 여기고 그냥 가버렸다고 한다. 그 후 사위 신담(申湛)과 더불어 학문에 정진하며 지냈다. 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대한이산묘지』(진안문화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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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1976현대 진안 출신의 종교인. 법명은 종태(宗泰), 법호는 형타원(亨陀院). 마령면 평지리에서 오종순(吳宗順)과 함께 쌍둥이로 태어났다. 마령공립보통학교를 다니다가 가정 형편이 어려워 3학년 때 자퇴하였다. 15세 때 전주로 가서 공장에서 일하던 중 1930년 원불교 교인인 최도화(崔道華)와 전삼삼(全參參)의 도움으로 1953년 오종순과 함께 출가하여 당리(當里)교무, 도양(道陽)교무, 수계(峀溪)교무, 중길(中吉)교무, 용암(龍岩)교무, 봉동교무, 장수교무를 지냈으며, 1956년 순교감(巡敎監), 1962년 감찰원 부원장, 1969년 영산선원장(靈山禪院長) 등을 역임하였고, 교육사업과 지역사회 발전에 공이 컸다. 원불교 초창기에 조전권(曺專權)·김영신(金永信) 등과 함께 교리를 통한 교세 확장에 기여하였다. 소태산(少太山)·정산(鼎山)·대산(大山) 등 3대에 걸친 종법사(宗法師)를 보필하여 대봉도 법훈을 받았다. 1976년 제11회 5·16민족상 사회부문 장려상을 받았다. 《참고문헌》 『내고장 솜리』(이리시, 1989),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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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568년에 부임하여 1573년 임기만료로 체임된 뒤 읍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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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0~1758. 자는 문백(文伯), 호는 장암(莊菴). 진사를 지냈으며,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증영의정 충의공(忠毅公) 원성모(元成模)의 후손이며, 원릉군(原陵君) 원승길(元升吉)의 증손이다. 조득영(趙得永)이 행적을 기록하였다. 《참고문헌》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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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9~1636. 조선 중기 무신. 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시대 명현 40위 중 한 분. 자는 경범(景範), 초휘는 경심(景諶), 호는 송운(松耘). 원산군(原山君) 원황(元滉)의 후예로 이조판서 원계검(元繼儉)의 손자이고 참찬 원호영(元虎英)의 아들이다. 첫째 아들은 선전관 원승길(元升吉)이고 막내아들은 좌랑 원이길(元頤吉)이다. 1603년 무과에 급제해 선교랑 거산도 찰방[종6품 현감과 동급]과 현령을 지냈다. 청렴하고 결백하여 백성들이 선정비를 세웠다. 시흥[당시 안산]에서 만년을 보내는 중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강화도를 점령한 청(淸)군은 시흥으로 진군해왔고 68세의 원성모는 두 아들과 함께 의병을 모아 정왕산으로 올라가 봉수산성에서 적과 전투를 벌였다. 청군의 기세가 만만찮아 의병을 이끌고 옥구도로 들어가 전투를 벌여 많은 적을 섬멸했다. 이후 그는 덕물도(德物島) 전투에서 적의 화공(火攻)에 밀려 두 아들과 함께 전장에서 순절했다. 가족들은 그가 유명을 달리하자 화살이 떨어진 배나루마을 산 중턱에 이들 삼부자의 시신을 묻었다. 묘는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 배나루에 있었으나, 1990년경 본래의 위치에서 서남쪽으로 약 300m 떨어진 선영으로 이장하였다(현재는 옥구공원에 있음). 이장할 때 원성모의 시신은 미이라로 발견되었다. 수염까지도 온전한 채로 속옷과 겉옷은 물론, 관복까지도 변색되지 않은 채 청군의 칼에 옆구리 두 곳을 맞아 흘린 혈흔이 관복에 남아있었다고 한다. 영조 때 순충장의 형난일등공신 영의정으로 증직하고 시호로 충의(忠毅)를 내렸다. 함께 전사한 장남 승길은 후에 좌찬성 원릉군으로, 막내아들 이길은 호조좌랑으로 추증되었다. 판서 이광적이 지은 신도비명이 상전면 용평리 대구평에 있다. 진안과의 인연은 원성모의 큰 며느리 구씨가 병자호란을 피해 진안군 상전면 용평리로 들어와 산 사실에서 비롯한다. 후에 진안의 유림이 원성모의 내력을 듣고 충절 3부자를 영모사에 배향했다. 《참고문헌》 『진안군사』(진안군사편찬위원회, 1992), 『진안향교지』(진안향교,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