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성모(元成模)
운영자 23-12-18 18:44 620 hit
1569~1636. 조선 중기 무신. 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시대 명현 40위 중 한 분. 자는 경범(景範), 초휘는 경심(景諶), 호는 송운(松耘). 원산군(原山君) 원황(元滉)의 후예로 이조판서 원계검(元繼儉)의 손자이고 참찬 원호영(元虎英)의 아들이다. 첫째 아들은 선전관 원승길(元升吉)이고 막내아들은 좌랑 원이길(元頤吉)이다. 1603년 무과에 급제해 선교랑 거산도 찰방[종6품 현감과 동급]과 현령을 지냈다. 청렴하고 결백하여 백성들이 선정비를 세웠다. 시흥[당시 안산]에서 만년을 보내는 중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강화도를 점령한 청(淸)군은 시흥으로 진군해왔고 68세의 원성모는 두 아들과 함께 의병을 모아 정왕산으로 올라가 봉수산성에서 적과 전투를 벌였다. 청군의 기세가 만만찮아 의병을 이끌고 옥구도로 들어가 전투를 벌여 많은 적을 섬멸했다. 이후 그는 덕물도(德物島) 전투에서 적의 화공(火攻)에 밀려 두 아들과 함께 전장에서 순절했다. 가족들은 그가 유명을 달리하자 화살이 떨어진 배나루마을 산 중턱에 이들 삼부자의 시신을 묻었다. 묘는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 배나루에 있었으나, 1990년경 본래의 위치에서 서남쪽으로 약 300m 떨어진 선영으로 이장하였다(현재는 옥구공원에 있음). 이장할 때 원성모의 시신은 미이라로 발견되었다. 수염까지도 온전한 채로 속옷과 겉옷은 물론, 관복까지도 변색되지 않은 채 청군의 칼에 옆구리 두 곳을 맞아 흘린 혈흔이 관복에 남아있었다고 한다. 영조 때 순충장의 형난일등공신 영의정으로 증직하고 시호로 충의(忠毅)를 내렸다. 함께 전사한 장남 승길은 후에 좌찬성 원릉군으로, 막내아들 이길은 호조좌랑으로 추증되었다. 판서 이광적이 지은 신도비명이 상전면 용평리 대구평에 있다. 진안과의 인연은 원성모의 큰 며느리 구씨가 병자호란을 피해 진안군 상전면 용평리로 들어와 산 사실에서 비롯한다. 후에 진안의 유림이 원성모의 내력을 듣고 충절 3부자를 영모사에 배향했다. 《참고문헌》 『진안군사』(진안군사편찬위원회, 1992), 『진안향교지』(진안향교,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