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6. 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 중기 의병. 자는 평중(平仲), 호는 남계(南溪). 증조부는 이조판서를 지낸 원계검(元繼儉)이고 조부는 승지를 지낸 원호영(元虎英)이고 아버지는 충의공(忠毅公) 원성모(元成模)이다. 성품이 근실하고 겸손하였으며, 이홍주(李弘冑)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일찍부터 문무를 익혔다. 1636년 12월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원승길은 아버지와 동생 원이길(元頤吉)과 더불어 종실 영가군(永嘉君)과 협력하여 의병을 이끌고 분전했다. 형세가 불리하자 안산을 버리고 덕물도로 들어갔으나 청군의 화공(火攻)을 받아 세 부자가 순절하고 말았다. 부인 능성 구씨(綾城具氏)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부인은 남편의 전사 소식을 듣고 쏟아지는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따라 죽기로 맹세하였으나, 아들 광옥(光玉)이 어린 나이에도 어머니를 위에서 감싸고 통곡하니 적도 의롭게 여겨 함부로 하지 않았다 한다. 구씨는 남편의 장례를 마친 후 아들을 데리고 진안군 상전면 용평리로 와서 살다가 세상을 마쳤다. 이후 자손들이 진안과 장수 등지에 널리 퍼져 큰 성씨를 이루었다. 묘는 경기도 안산군 마유면 이진리[현 시흥시]에 아버지 원성모의 묘소 왼쪽에 있으나, 진안으로 내려온 구씨의 묘는 진안군 상전면 용평리 설암산(雪巖山)에 있다. 전쟁이 끝난 후 자손들의 상소를 받은 조정에서 무과선전관훈련도정 이조참의 증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贈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 좌찬성 원릉군(原陵君)으로 추증하였다. 원승길 신도비(←원승길 신도비문)가 상전면 용평리 대구평 마을에 있다. 《참고문헌》
  • 한말의 의병. 자는 운중(雲中), 호는 율은(栗隱). 원릉군(原陵君) 원승길(元升吉)의 후손이며 원일상(元壹常)의 아들이다. 1908년부터 1910년까지 3년 동안 인삼, 양곡, 지류(紙類) 등을 의병대에 공급하였다. 그러던 중 일본군 헌병대에 발각되어 형을 받고 복역하였다. 원도희(元道喜)가 찬한 묘표가 있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 호는 포재(浦齋). 사림의 천거로 궁내부주사(宮內府主事)를 지냈으며 대덕산에 은거하였다. 김대유(金大有)가 지은 실기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용담현령. 1872년 9월에 부임하여 1873년 1월 영평현령으로 전임하였다.
  • 용담현령. 1793년 7월에 부임하여 1797년 7월 금산현령으로 전임. 호조좌랑이었다가 본직으로 왔다.
  • 18대 진안군수. 1963. 1. 1 부임하여 1963. 3. 24까지 3개월간 재임하였다.
  • 조선 후기 진안 용담 출신의 효자. 자는 자익(子益), 호는 용강(龍岡). 사륙신 유응부(兪應孚)의 8대손이다. 7세에 『효경』에 정통하였다. 정려는 진안군 용담면 호미동에 있다. 《참고문헌》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 1832~1910경상북도 안동 출신의 순국 지사.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34위 중 1위. 자는 승수(承叟), 호는 회은(晦隱). 세자 시강원 부수(世子侍講院副率) 유진휘(柳進徽)의 아들이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과정에 일화도 많이 남겼다. 1910년 8월 경술국치 이후 안동의 옛집으로 돌아가 마당에 자리를 마련하고 북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한 다음 곡기를 끊어 자결하였다. 단식을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자지(自誌)’, ‘자명(自銘)’ 등 여러 편의 시를 지었다. 첫째 아들 유신영도 1919년 고종의 인산일에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1951년 안동의 유지들이 사회장을 지내고 화산(花山)에 이장하였으며, 대한이산묘에 배향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1(국가보훈처, 1986)
  • 용담현령. 1670년 5월에 부임하여 1671년 5월 사망하였다.
  • 용담현령. 1712년 8월에 부임하여 1714년 6월 파직되었다.
  • 진안현감. 1700년 11월에 부임하여 1701년 11월에 이임하였다.
  • 1865~1926. 의원(醫員). 상전면 수동에 살았던 그는 명의로 전해온다. 처음 정천면 모정리 두곡에 살던 당시 난산의 산모에게 밤 한 톨을 달여 먹게 해 순산시켰다 한다. 병든 사람이 약국에 와 앉아있는 자리를 보고 처방을 해주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무료로 약을 주고 부유한 사람에게도 재료값 이외에는 받지 않았다 한다. 그가 죽을 무렵 아들에게 부자가 되고 싶은가 큰 인물이 되고 싶은가 물어 아들이 부자가 되고 싶다 하니 대문을 서쪽으로 고친 뒤 죽었다 한다. 그 뒤 3천석을 하게 된 아들 유정석(劉井錫)이 선대의 약업을 번성시켜 한때 전주시 한의사협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 용담현령. 1550년대 이전에 재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진안현감. 1550년대 이전에 재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1911. 자는 도운(道雲). 완산백(完山伯) 유습(柳濕)의 후손이며, 증 호조참판 유종원(柳宗瑗)의 손자이다. 늦은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혜민원(惠民院) 주사(主事)가 내려졌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아들 두환(斗煥)이 찬한 묘갈명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