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9~1892. 자는 덕운(德雲), 완산백(完山伯) 유습(柳濕)의 후손이며, 증 호조참판 유홍묵(柳泓黙)의 아들이다. 만년에 토산현감(兎山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유제근(柳濟根)이 찬한 묘갈명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진안현감. 1892년 4월에 부임하여 1893년 11월 보성군수로 전임하였다.
  • 진안현감. 1655년 2월에 부임하여 1659년 8월에 이임하였다. “효로써 백성을 대하며 청덕으로 많은 백성을 감화시켜 고을백성이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鎭安誌』에 전한다.
  • 진안현감. 1628년 4월에 부임하여 1630년 9월에 이임하였다.
  • 1881~1909. 개항기 진안에서 활동한 의병.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9월 초순경부터 의병대를 편성하고 용담(龍潭), 고산(高山), 은진(恩津) 등지를 누비면서 일본군과 수차례 교전하여 전과를 올렸다. 10월 3일에는 금산읍을, 10월 10일에는 우북면 장암 등을 습격, 무기를 탈취하고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1908년 7월 13일에 일본군 헌병에게 체포되었으나 탈출하여 다시 유격전을 벌였다. 1909년 1월 23일에 다시 잡혀 3월에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그대로 형이 확정되었다. 1977년에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 자료집 별집』1(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1974), 『전북의병사』하(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90), 『진안군 향토문화백과사전』(진안군·진안문화원, 200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용담현령. 1668년 7월에 부임하여 1669년 12월 파직되었다. 관아를 지을 자재와 기와를 모았으나 작업을 하지는 못했다.
  • 일제하 진안군수였다. 1914. 3. 8 장수군수에서 부임하여 1917. 8. 9 이임하였다.
  • 진안현감. 1689년 5월에 부임하여 1690년 7월에 이임하였다.
  • 유환기(1876.12.25.~1923.03.04.)는 용담군 일동면 금곡리(龍潭郡 一東面 金谷里, 지금의 진안군 동향면 능길리) 출신이다. 무주(茂朱)ㆍ금산(錦山)에서 문태수의진(文泰洙義陣)에 참여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08년 음력 3월 20일경 문태수의진 의병 11명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무주군 유가면(柳加面) 도치곡(道峙谷), 음력 4월 23일 무주군 일안면(一安面), 음력 7월 15일에는 금산군 군북면(郡北面) 사기소(沙器所)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었다. 1910년 2월 21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7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201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전북의병사, 공훈록
  • 진안현감. 1847년 1월에 부임하여 1847년 7월에 이임하였다.
  • 용담현령. 1789년 10월에 부임하여 1790년 7월 사망. 호조좌랑이었다가 본직으로 왔다.
  • 진안현감. 1669년 2월에 부임하여 1671년 9월에 이임하였다.
  • 진안현감. 1793년 6월에 부임하여 1795년 12월 선산부사로 전임하였다.
  • 용담현령. 1550년대 이전에 재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1908~1932독립운동가, 의사(義士). 충청남도 예산 출신.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34위 중 한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