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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654년에 부임하여 1655년 “염초를 삶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으나 읍민들은 송덕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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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군수. 1900년 이후 부임하였으나 부임연대와 이임연대는 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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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768년 9월에 부임하여 1770년 8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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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5~1393. 고려 후기 용담현령으로 재직했던 문신. 자는 헌숙(憲叔), 호는 동정(桐亭). 고려 시대 성리학을 익힌 윤택(尹澤)의 손자이다. 5대조 윤량비(尹良庇)는 호장 출신이었고 4대조 윤해(尹諧)는 과거에 합격하여 가문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아버지는 윤귀생(尹龜生), 윤회(尹淮)가 아들이다. 1360년에 성균시에 합격하고, 1365년 이인복과 이색(李穡)이 주관한 과거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365년 예부시에 을과 제1인으로 춘추수찬(春秋修撰)을 제수받았다. 예부산랑에 이어 1373년 좌정언이 된 그는 공민왕에게 개혁 상소를 올렸다. 6조항에 걸친 장문의 상소는 성리학 이념에 충실한 사대부 의식을 보여주었다. 1379년 전교시승(典校寺丞)·전의부령(典儀副令)·예문응교 등을 지내고 1386년 성균사예로 기용되었다. 1388년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에서 회군할 때에 동문 밖에 나가 영접하고 곽광전(涇光傳)을 바쳤다. 그것은 우왕을 폐하고 다른 성씨를 왕으로 추대할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그 뒤 전리총랑(典理摠郎)이 되었고 이어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로 승진하였다. 1389년 이인임(李仁任)의 죄를 논해 참관저택(斬棺瀉宅)을 청했으며, 이어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1390년 12월 좌상시가 되고 그해 2월 정월 경연 강독관이 되었다. 창왕 및 공양왕 대에는 조준과 결합하여 현실을 개혁하는 개혁상소를 올렸다. 조선 건국 후에는 원종공신이 되었으며 『고려사』의 편찬사업에도 참여하였다. 용담현령으로 재직하던 당시 이색과 함께 용담향교에 관련한 시를 지었다. 시문집으로는 『동정집』 8권이 있었지만 현존하지는 않는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고려사절요』에 윤소종의 작품이 실려 있다. 《참고문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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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835년 1월에 부임하여 1837년 12월 진산현령으로 영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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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690년 8월에 부임하여 1695년 5월에 이임하였다. 정사를 함에 두루 밝아 향리와 백성이 모두 편했다고 『鎭安誌』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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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791년 9월에 부임하여 1791년 12월 가리첨사로 전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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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884년 2월에 부임하여 1885년 5월 창평현령으로 전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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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시대 명현 40위 중 한 분. 자는 명서(明瑞), 호는 만헌(晩軒). 문경공(文景公) 윤신갑(尹莘甲)의 후예로 증지돈녕부사(贈知敦寧府事) 용원군(龍原君) 윤대희(尹大希)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힘이 남달라 병가서(兵家書)를 통독하였고, 무과에 올라 벼슬이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 왕이 의주로 피하는 사태가 일어나자 형 윤응인(尹應仁)과 함께 의병을 모아 왕을 호위할 목적으로 진군하였다. 전주 웅치(全州熊峙)에서 동복현감 황진(黃進)과 함께 왜군 백여 명을 죽이고 전선을 돌파, 어가(御駕)를 의주로 호위하는 데 공적을 세웠다. 선조는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선무원종공신이등(宣武原從功臣二等)으로 책록하였다. 오당(珸堂) 이상수(李象秀)가 지은 묘표(墓表)가 있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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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550년대 이전에 재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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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671년 5월에 부임하여 1671년 5월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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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708년 6월에 부임하여 1708년 7월 순찰사와 친족이 되므로 상피(相避) 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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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694년 5월에 부임하여 1695년 2월 이임하였다. 각 면에 치적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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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800년 8월에 부임하여 1802년 9월 재임중 사망. 옥과현령이었다가 맞바꾸어 본직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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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698년 7월에 부임하여 1701년 9월에 이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