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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649년에 부임하여 1654년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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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진안군수였다. 기록이 멸실되어 구체적 재임연대는 미상이나 1925년부터 1945년 사이에 재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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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 3. 25~1957. 12. 8. 효령대군의 15세손이다. 임실군 둔남면 둔덕리에서 성우(成宇)와 능주 구씨(綾州具氏) 사이에 2남으로 태어났다. “명산을 찾아 수도하던 중 ‘난세와 억조창생을 구원하려면 공을 들여야 한다’는 신의 계시와 깨달음으로 솔잎을 생식하며 천지음양이치와 팔진도법으로 1885년부터 30여 년 간에 걸쳐 마이산을 비롯 정읍 신태인의 백산사 등에 탑을 쌓고 일생을 기도로 살았다”고 한다. 한편 “신의 계시로 썼다”는 30여 권의 ‘신서’와 부적을 남겨 놓았다고도 한다. →마이산탑, 탑사. 《참고문헌》 道士李甲龍先生事蹟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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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568년에 부임하여 1568년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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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4∼1246고려 후기 전주 이씨의 진안 입향조. 호는 만상(晩祥)·정암(靖菴). 시조는 사공(司空) 이한(李翰), 아버지는 이용부(李勇夫)이고 형제로는 이린(李璘)이 있다. 전주 자만동(紫晩洞)에서 태어나 진안의 백운면 평장리로 이주하였다. 『진안지』에는 “관직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고 기재되어 있다. 성수면 좌포리 산수동 전주 이씨 재실 안에는 1964년에 건립된 신도비가 있다. 비표에는 ‘고려대사마대장군평장사겸시중증시문성공이거신도비(高麗大司馬大將軍平章事兼侍中贈諡文成公李踞神道碑)’라 새겨져 있다. 《참고문헌》 『태조실록』 , 『씨족원류』,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진안의 금석문』(진안문화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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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714년 9월에 부임하여 1717년 5월 재임중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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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군수. 1900년 이후 부임하였으나 부임연대와 이임연대는 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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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858년 9월에 부임하여 1861년 6월 금구군수로 전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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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563년 9월에 부임하여 1567년 6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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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630년 11월에 부임하여 1635년 12월에 이임하였다. “은혜와 위엄을 갖추었다”고 『鎭安誌』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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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778년 6월에 부임하여 1781년 6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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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771년 6월에 부임하여 1775년 12 임기만료로 체임되었다. 금부도사였다가 본직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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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6~1902. 개항기 진안 출신의 효자. 자는 덕인(德仁), 호는 원사재(源沙齋). 부친은 이우춘(李佑春)이고 이조(李晁)의 9대손이다. 아들로 도문(道文)·도화(道華)가 있다. 마령면 평지리에서 태어났다. 독서당을 짓고 ‘원사재(源沙齋)’라 하여 가난한 수재들을 가르쳤으며, 나중에 원사재는 마령초등학교가 개교할 때 학당으로 쓰였다. 또한 새집 짓는 동민에게는 며칠씩 무료로 봉사하고, 가난한 농사꾼의 농기구를 수선하여 주었다.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동네를 돌아다니며 기동(起動)을 재촉하여 근면 생활을 권장하기도 하였다. 효행과 덕행으로 『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에 등재되어 있다. 이도복(李道復)이 지은 ‘효자 이광범전(孝子李光範傳)’이 있다. 《참고문헌》 『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 『진안의 맥』(진안군, 1982),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진안군사』(진안군사편찬위원회,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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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홍재(弘宰), 호는 귀락당(歸樂堂). 문성공(文成公) 이명성(李明誠)의 후예로 도사(都事) 이현산(李賢山)의 아들이다. 1567년에 사마시(司馬試)에 올라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재은 참봉(齋隱參奉)이 되었다. 1570년 을사사화 때 화를 당했던 좌의정 유관(柳灌),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의 복권 노력이 있었는데 이광필 또한 연명 상소에 동의하면서 사림을 보호하려 노력하였다. 1583년에 함경도 경흥부사(慶興府使)로 나가 1월부터 7월까지 여진족의 침입(「니탕개의 난」)을 평정했다. 이 공로로 온성부사(穩城府使) 신립, 부령부사(富寧府使) 김의현, 유원첨사(柔遠僉使) 이박 등과 함께 관서백(關西伯)에 제수되었다. 이후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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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4. 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 초기 문신. 자는 흥서(興瑞), 호는 괴은(槐隱, 塊隱). 증조부는 대호군(大護軍) 이승안(李承顔), 조부는 상호군(上護軍) 이정공(李靖恭), 부친은 증좌의정(贈左議政) 이원발(李元發)이다. 아들로 이속(李續)을 두었다. 좌의정 이귀령(李貴齡)의 동생이다. 태조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1410년에 한성윤(漢城尹)으로 이른바 ‘천추절(千秋節)’ 사절로 명(明)에 다녀왔다. 1413년에 경성수보도감(京城修補都監) 제조(提調)가 되어 군조(軍調)를 수축(修築)하고, 경기, 충청, 경상, 전라, 강원, 풍해에 ‘10만 양병(十萬養兵)’을 제안하는 등 새로운 법을 많이 창안하였다. 1414년에 경상도 도관찰사, 1415년에 개성부 유후(開城副留侯)에 이어 강원도 도관찰사 등, 벼슬이 형조와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이르렀다. 만년에 용인 구수동으로 물러나 두 그루의 괴목(槐木)을 심어 스스로 괴은(槐隱)이라 하며 은둔하였다. 묘갈은 1831년에 다시 세워졌으며, 비문은 19세손 이의덕(李義悳)이 짓고 17세 방손 이병욱(李炳勗)이 썼다.《참고문헌》 『대한이산묘지』 (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