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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665년 10월에 부임하여 1666년 12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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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747년 8월에 부임하여 1750년 3월 합천으로 전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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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803년 11월에 부임하여 1805년 6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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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1929. 일제강점기 진안에서 활동한 의병. 자는 원오(元五), 호는 오하(梧下). 부친은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 이기영(李琪榮)이다. 1906년에 박이환(朴駬桓)과 문형모(文亨模)를 규합, 임병찬(林炳瓚)·최익현(崔益鉉)을 만나 의거에 동참할 것을 맹세하였다. 이규홍은 가산을 방매하여 자금을 마련 총포와 화약을 구입하고 병졸은 전주감영의 병정 100여 명, 각처에서 자원해온 의병 100여 명, 포수(砲手)·지사(志士) 50여 명이 규합되었다. 1908년까지 진안, 장수, 용담, 고산, 진산, 금산 등지의 산간으로 옮겨 다니며 일본군과 싸워 일본군 2백여명을 살상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1914년 3월에는 임병찬의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 창립 계획에 참여하였다. 1917년 10월 대덕군 오도산성(五道山城)에서 일본 경찰과 교전 끝에 탈출, 1918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도자와 접촉, 김규식(金奎植)의 독립청원서 제출을 위한 파리(Paris)행 여비로 1,300원을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에 협력하였다. 1920년 3월 만주로 옮겨 김좌진(金佐鎭)에게 군관학교 운영자금으로 3,000원을 헌납하였다. 그 해 6월 독립운동자금 조달을 위해 국내에 잠입하여 보부상으로 가장, 활약하였다. 1924년 2월 8일 서울에서 체포되어 4개월 동안 고문을 당하고 어깨가 절상되어 사경에 이르자 5월 28일 보석으로 출감되었다. 저술로는 『오하일기(梧下日記)』가 있다. 이는 1906년 초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활동한 때부터 의병을 해산하는 이듬해 4월까지 약 1년 4개월간에 걸친 기록이다. 1968년에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였고, 1977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 『전북의병사』하(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9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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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876년 4월에 부임하여 1877년 6월 괴산현령으로 전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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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진안군수였다. 1921. 10. 12 부임하여 1923. 3. 3 임실군수로 전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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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용담(用耼), 호는 불류재(不流齋). 이대윤(李大胤)의 후손이다. 마령면 모사실[沙谷]에 살았다. 기정진(奇正鎭)과 송병선(宋秉璿)에게 수학하였다. “학행으로 이름났으며 쓴 글이 집안에 가득하였다”고 전한다. 《참고문헌》 鎭安誌(진안향교,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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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호조참판 홍습(洪濕)의 사비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상전면 수동리 산정마을에도 왜군이 밀어닥쳤다. ‘충비열녀 이성난향지려(忠婢烈女李姓蘭香之閭)’에 의하면 “당시 마을에는 난을 피해 서울에서 내려왔던 참판 홍습(洪濕)이 있었는데, 왜군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다시 재 너머 깊은 산중까지 피신하였지만 서두르는 바람에 식량을 준비하지 못해 끼니를 걱정할 처지였다. 주인 가족의 어려움을 보다 못한 난향이 식량을 구하려고 야음을 틈타 마을에 내려왔으나 홍습의 집은 이미 잿더미가 되어 버렸고 어디서도 쌀 한 톨 구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갑자기 마을을 순찰하던 왜군들에게 붙잡혔다. 난향은 왜군들에게 끌려가 온갖 수모를 당했으나 끝내 주인이 있는 곳을 고하지 않았고 욕을 당하기 전에 혀를 깨물어 자결하였다.”고 한다. 1604년에 명정(命旌)을 내렸다.《참고문헌》 『진안의 금석문』(진안문화원,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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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857년 12월에 부임하여 1858년 8월 재령군수와 자리를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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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 초기 문신. 자는 기원(基遠), 호는 유계(幽溪). 직제학(直提學) 이교(李校)의 증손(曾孫)이고 참봉(參奉) 이계남(李繼南)의 아들이다. 『대한이산묘지』에 의하면 “타고난 용모와 성품이 순수하고 아름다웠고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의 병환을 직접 간호하며 여러 차례 감응을 얻었다” 한다. 김굉필(金宏弼)과 알고 지냈다. 성종 때 효행·문장(文章)·덕업(德業)으로 천거되어 벼슬이 안악군수(安岳郡守)에 이르렀다. 1498년의 무오사화 때 상소하여 사림(士林)을 구하려 하였으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연산군의 방탕이 날로 심해지자 이를 말리는 상소를 올린 일로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붙잡혀 갇혔는데 사헌부에서 구원하여 겨우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이 일이 있은 뒤로 두문불출하며 지내다 세상을 마쳤다. 충정공(忠貞公) 이상진(李尙眞)이 지은 묘갈(墓碣)이 전해진다. 《참고문헌》 『대한이산묘지』(진안문화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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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701년 10월에 부임하여 1704년 1월 의원사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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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1949. 일제강점기의 유학자·관원. 일찍이 궁내부(宮內府) 판임관(判任官)을 지냈다. 호는 수당(守堂)·추운(鄒雲).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이초(李岹)의 11대손이고 증 사헌부지평 이홍(李泓)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증 동몽교관 이희식(李希植)이다. 서울에서 태어났다. 송병선(宋秉璿)·송시열(宋時烈)의 학풍을 이어 받았으며 전우(田愚)와도 교유하였다. 1910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낙향하여 주천면 대불리 개화동에 화양도원[대불초등학교(폐교)의 전신]을 열고 후진 양성에 노력하였다. 1919년 고종 승하를 맞아 화양산에서 제사지낸 이후, 1922년 순종이 ‘삼극사(三極使)’로 임명하자 화양산 정상과 전국 6개소에 ‘황단(皇壇)’을 설치하여 국태민안과 자주독립을 염원하는 삼극제를 매년 음력 8월 29일 정오에 지냈다. 삼극이란 ‘천극(天極), 지극(地極), 인극(木極)’으로서 각각 ‘옥황상제, 공자, 고종’ 등 3위(位)를 말한다. 1922년에는 유림건약(儒林建約) 십삼도(十三道) 도강원(都講院)으로부터 13도(道) 도순강장(都巡講長)에 임명되어 전국을 순방하면서 학문에 전념하는 인재를 구하여 전통적인 유교정신과 배일사상을 기르고, 삼부강의문(三府講義文)을 통하여 우국충정을 역설하였다. 체계적인 저서는 남기지 않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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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1951. 일제강점기 진안 출신의 학자. 자는 여일(汝日), 호는 산남(山南)이다. 고려 정당문학 문열공(文烈公) 이조년(李兆年)의 후손으로 증조는 이규열(李奎烈)이고 조부는 이우만(李佑萬)이며 이공범(李貢範)의 아들이다. 아들은 이길수(李吉洙)이다. 『진안지』와 『진안군지』에 의하면 “최익현과 송병선, 전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이도복(李道復)에게서도 수학하였다. 집안이 가난하였으나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경학(經學)이 뛰어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스승으로 삼아 ‘산남선생’이라 불리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령면 평지리 사곡(沙谷)에 세워진 비석에는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내용의 ‘산남애친가(山南愛親歌)’가 새겨져 있다. 《참고문헌》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진안군사』(진안군사 편찬위원회, 1992), 「이도계 묘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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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1930. 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효자. 자는 선일(善日), 호는 소능(小能). 이조(李晁)의 10대손이며 경무공(景武公) 이제(李濟)의 후손으로 부친은 이광범(李光範)이다. 마령면 평지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부모를 지극하게 섬겼다. 글을 좋아하여 최흠재와 교유하면서 학문을 논하고 남의 집 비문 등 금석문을 많이 써 남겼다. 또한 동생 이도화(李道華)와는 우애가 돈독하여 땅을 사면 동생에게도 나누어 주었고 조카들을 공부시키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 마령면에서는 ‘우애 깊은 아무개’라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라고 『삼강록』에 실려 있다. 《참고문헌》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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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1938. 개항기 진안에서 은거하며 활동한 학자. 자는 양래(陽來), 호는 후산(厚山). 고려 정당문학(高麗政堂文學) 성산군(星山君) 이조년(李兆年)의 후예로 부친은 이동범(李東範)이다. 아들로는 이면수(李冕洙), 이곤수(李袞洙), 이필수(李鞸洙) 등이 있다. 단성현(丹城縣)[현 함양군] 신안동에서 태어났다. 성품이 곧고 재주가 비범하여 사우들의 추종을 받았다. 1882년 송병선(宋秉璿)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고 1888년 최익현(崔益鉉)에게 사사하였으며, 한유(韓愉)·정재규(鄭載圭)·전우(田愚) 등과 교류하였다. 1905년에 곽종석(郭鍾錫)과 함께 ‘을사늑약 무효화와 을사오적 처형’을 상소했다. 그 해 5월 송심석(宋心石)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