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홍(李圭弘)
운영자 23-12-18 18:44 671 hit
1881~1929. 일제강점기 진안에서 활동한 의병. 자는 원오(元五), 호는 오하(梧下). 부친은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 이기영(李琪榮)이다. 1906년에 박이환(朴駬桓)과 문형모(文亨模)를 규합, 임병찬(林炳瓚)·최익현(崔益鉉)을 만나 의거에 동참할 것을 맹세하였다. 이규홍은 가산을 방매하여 자금을 마련 총포와 화약을 구입하고 병졸은 전주감영의 병정 100여 명, 각처에서 자원해온 의병 100여 명, 포수(砲手)·지사(志士) 50여 명이 규합되었다. 1908년까지 진안, 장수, 용담, 고산, 진산, 금산 등지의 산간으로 옮겨 다니며 일본군과 싸워 일본군 2백여명을 살상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1914년 3월에는 임병찬의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 창립 계획에 참여하였다. 1917년 10월 대덕군 오도산성(五道山城)에서 일본 경찰과 교전 끝에 탈출, 1918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도자와 접촉, 김규식(金奎植)의 독립청원서 제출을 위한 파리(Paris)행 여비로 1,300원을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에 협력하였다. 1920년 3월 만주로 옮겨 김좌진(金佐鎭)에게 군관학교 운영자금으로 3,000원을 헌납하였다. 그 해 6월 독립운동자금 조달을 위해 국내에 잠입하여 보부상으로 가장, 활약하였다. 1924년 2월 8일 서울에서 체포되어 4개월 동안 고문을 당하고 어깨가 절상되어 사경에 이르자 5월 28일 보석으로 출감되었다. 저술로는 『오하일기(梧下日記)』가 있다. 이는 1906년 초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활동한 때부터 의병을 해산하는 이듬해 4월까지 약 1년 4개월간에 걸친 기록이다. 1968년에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였고, 1977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 『전북의병사』하(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9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